열사흘째, 숙소 찾느라고 헤맨 부르고스

by 이흥재

2018년 10월1일 (월요일), 오전 흐리다가 오후에 맑음


저녁식사를 할 때마다 다양한 경험을 했었기 때문에 오늘도 엊저녁 얘기로 시작한다. 어제 숙소를 정하면서 오늘 아침식사까지 한꺼번에 계산했다. 저녁은 10유로, 아침은 3유로. 막상 저녁식사 예약을 하고 나서 밖으로 나오니 집집마다 순례자메뉴(menu del Peregrino)가 있다고 써 놓았다. 오늘까지 여러 마을을 지나쳐 왔지만, 어제 묵었던 아헤스(Agés)처럼 여러 곳에서 순례자메뉴를 제공한다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다. 숙소에서 한 저녁예약을 취소할 수도 없으니까!


저녁식사는 6시와 7시 반, 두 번 예약을 받았는데, 어쩌다 보니 나를 비롯해서 한국사람 넷이 같은 시간(6시)에 저녁식사를 함께 하게 되었다. 내가 주문한 메뉴는 파에야. 그런데, 전에 먹었던 것보다 쌀이 설 익은 것 같은 느낌이다. 원래 이런가? 분명히 여러 가지 다양한 재료가 들어간 것 같기는 한데, 꼭 파스타를 먹는 것 같다. 이런 식감(食感) 때문에 파스타를 좋아하지 않는 건데. 양도 꽤 많았다. 그런데, 와인과 함께 먹고 있는 중에 물어보지도 않고 그릇을 가져가 버렸다. 물론, 먹는 중이라고 얘기했으면 돌려주긴 했겠지만, 배도 어느 정도 부른 상태라서 그냥 두었다.


아침식사는 바게트와 계란, 주스와 커피가 나왔다. 음료는 ‘밀크(스페인어로는 레체[leche])’ 소리만 듣고 그걸 시켰는데, 나온 건 카페라테(스페인어로는 카페 콘 레체[café con leche])였다. 난, 그냥 우유가 나오는 줄 알았는데. 뭐, 마셔보니 카페라테도 그런대로 마실 만은 했다. 그렇다고 다시 마시고 싶지는 않지만.


아침식사를 끝낸 후에 출발준비를 마치고 나니 오늘도 7시 10분 전이다. 밖은 역시 캄캄하다. 그런데, 아헤스를 출발하면서 보니 카미노 표시가 거의 없다. 그저 방향만 잡고 가는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 포장도로를 따라 30분쯤 가니 아타푸에르카(Atapuerca) 마을이다. 이 마을은 최고(最古, 80만년 전)의 원시인류(호모 안테세서[homo antecessor], 라틴어로 ‘탐험가’란 뜻) 유적이 발굴되어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유명해졌는데, 실제로는 마을에서 3km를 더 가야 발굴현장이 있다고 한다. 이번에는 관광이 아닌, 걷는 게 최우선이기 때문에 그냥 지나치기로 한다. 대신에 마을입구에 세워 둔 안내간판이라고 사진 찍으려고 했더니 너무 어두워서 찍기가 쉽지 않다. 간신히 후레쉬를 켜고 몇 장 찍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아타푸에르카까지는 아스팔트 포장길을 따라 왔는데, 이 마을을 지나면서 길은 왼쪽 산으로 접어들었다. 산이라기 보다는 자갈과 돌멩이가 많은 언덕이다. 어두울 때일수록 이런 곳을 지나려면 특히 조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발목이 아픈데, 발을 잘못 디디기라도 하면 아예 걷지 못할 수도 있다.


언덕 꼭대기에 올라가니 먼저 출발한 듯한 순례객 몇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도 몇 장을 찍었는데, 나중에 확인해 보니 빛이 없어서 너무 흐릿하다. 여명에서 사진을 찍으면 찍을 때는 꽤 밝다고 생각되는데도 실제로 찍히는 건 더 어두워 보인다.


언덕 위에서는 멀리 오늘의 목적지인 부르고스(Burgos)의 불빛이 보였다. 그렇지만, 부르고스까지 가려면 아직 5시간 이상을 더 가야만 한다. 언덕을 내려가서 왼쪽으로 가면 몇 개의 마을이 있지만, 알아본 정보로는 순례객을 위한 별다른 서비스가 없다고 하고, 마침 카미노 화살표도 오른쪽을 향하고 있어서 그곳으로 발길을 향했다. 그러다가 또 갈림길이 나오는데, 방향으로는 직진하면 될 듯 하지만, 화살표는 왼쪽을 가리키고 있다.


이번에는 왼쪽 길로 가다 보니 방향을 표시해 주는 화살표가 계속 나타난다. 조금 지나니 재미있는 간판이 보였다. 버스 모양에 알베르게를 광고하는 거였는데, 특이하게도 맨 중앙에 태극기를 그려 놓았다. 한국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라고 그런 건가! 그렇지만, 위치로 봤을 때 묵어갈 만한 곳이 아니다. 아무튼, 장하다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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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해서 2시간을 걸은 후에 처음 만나는 바에 들어갔다. 늘 이 시간쯤이면 화장실도 이용하고 맥주도 한잔 마시기 위해 바에 들르는 편이다. 그런데, 오늘은 특이하게도 수박주스를 팔고 있었다. 가끔 직접 갈아주는 오렌지주스는 마셔 보았지만, 대부분의 바에서 마실 거라고는 맥주와 커피 뿐이다. 이런 바에서는 수박주스를 꼭 마셔야지! 귤도 팔고 있어서 2개를 사서 배낭에 넣은 후에 바를 나왔다.


이제 날이 밝고 해가 떴는데도 바람이 많이 불어서인지 꽤 춥다. 그래도 오늘은 잠바를 입었더니 그런대로 견딜 만하다. 장갑까지 꼈어야 했는데, 귀찮아서 그냥 버텼다.


오늘은 걷는 동안 지나는 마을이 거의 없었다. 다른 날 같으면 한 군데 더 들러서 쉬어 갔을 텐데, 그럴 만한 바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부르고스라는 이정표를 보았다. 그런데, 그곳에서 부르고스까지는 10km를 더 가야 하는 거리다. 그러니까, 오늘 묵어갈 숙소까지 가려면 아직도 10km 이상을 더 가야 한다는 거다. 그런데, 여기부터 카미노 표시가 없어졌다. 그저 부르고스 방향으로 큰 길 옆에 난 보도(步道)를 따라 계속 걸어갈 뿐이다. 가끔 아주 작게 카미노 표시가 보이기는 하지만, 꼭 장난쳐 놓은 것 같아서 긴가 민가 하다.


그래도 계속 걷다보니 노란 화살표가 나타나곤 한다. 지나가는 현지주민들에게, 대답하기 가장 쉬울 것 같은 대성당(Catedral de Burgos)이 어디에 있냐고 물어보았더니 아직도 한참을 더 가야 한다고 했다. 숙소도

대성당에서 가깝다고 했으니까 대성당까지만 잘 찾아가면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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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다리를 터덜거리며 걷고 있는데, 맥도널드 간판이 보인다. 스페인에 와서 처음 보는 거였다. 11시가 지났으니 잠시 쉬면서 점심을 먹기 위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서 주문을 하자마자 화장실로 직행했다. 6.9유로짜리 햄버거 세트를 시켰는데, 우리나라와 가격차이는 별로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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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버거를 잘 먹고 나서 출발하려고 일어서니 발이 너무 아프다., 이젠 절뚝거리면서 걸어야 할 정도다. 그런데, 숙소까지는 아직도 1시간 이상을 더 가야 할 텐데 걱정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 같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처지가 아니다. 정확한 위치는 모르지만 방향이 맞는 것 같으니까 계속 걷다 보면 숙소에 도착하겠지!


휴대전화로 지도를 찾아보니 산탄데르 거리(Calle Santander)에서 왼쪽으로 가도록 되어 있는데, 도로표시가 없어서 어디가 산탄데르 거리인지 알 수가 없다. 가다가 무작정 왼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다가 현지주민을 만나 대성당 위치를 다시 물어보았더니 아직도 한참을 더 가야 한다고 했다. 다리는 계속 아픈데 큰 일이다.


꽤 오래 걸었다고 생각하면서 현지주민에게 이번에는 숙소(Urban Burgos)의 위치를 물어 보았다. 그 사람은 지도까지 찾아가면서 열심히 알려 주었다. 그리고는, 앞으로 계속 가다가 세번째 만나는 다를 건너가면 된다고 했다. 그때부터 다리를 하나씩 세면서 걷다가 드디어 세번째 다리를 건너, 경찰인 듯한 사람에게 물어보니 아직도 더 가야만 한다고 했다.


이번에는 청소부에게 숙소가 있는 거리이름을 물어보니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했다. 걷던 방향으로 조금 더 가다 보니 카미노를 떠나기 전에 예약했던 숙소가 드디어 보인다.


그런데, 간판은 보이는데 출입구가 어디인지 모르겠다. 먼저, 바로 옆에 있는 바에 들어가서 맥주 한잔(생선 핀초가 함께 나왔다)를 시켜놓고 종업원에게 숙소에는 어떻게 들어가면 되냐고 물어보니까 뭐라고 가르쳐 주기는 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다.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알지 못해서 인터넷도 쓸 수도 없었다.


급한 마음에 로밍을 이용하기로 했다. 번역기로 요구사항을 적어 종업원한테 보여주었다. 그런데, 대답을 들어봐도 내가 알 수 없는 시스템이었다. 마침 그 종업원이 밖으로 나가길래 따라가서 다시 한번 숙소에 어떻게 들어가야 하는지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랬더니, 초인종을 누르고 잠시만 기다리면 문이 열린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간신히 숙소건물 안으로는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두번째 난관(難關)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방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메일로 방에 들어갈 수 있는 비밀번호를 보내줬다고 하는데, 받은 기억이 없다. 숙소주인을 만나려고 이리저리 다니다가 사람소리가 나길래 쫓아가 보니, 막 숙소를 나가는 여자 둘이 있어서 어떻게 방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문에 붙어있는 전화번호로 연락해서 물어보면 된다고 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스페인어로 물어볼 수 있나!


그래서, 그 여자들에게 부탁했더니 전화를 걸어주었다. 그리고는 전화기 너머로 내 신분을 확인하는 듯한 소리가 들리길래 전에 받아놓았던 이메일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해서 문을 열 수 있는 비밀번호를 받아내고 드디어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니, 방에 들어가기 전에 복도에 들어올 수 있는 번호도 따로 주었다. 이렇게 무인으로 관리하는 숙소 시스템은 처음이다. 새로운 경험이다.


너무나 고마워서 그 여자들에게 갖고 다니던 작은 선물을 하나씩 주었더니 너무 좋아한다. 그러니 나도 기분이 좋다. 그 여자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한참 동안을 밖에서 더 기다려야 했을 텐데! 방 번호는 휴대전화 메모장에 잘 기록해 두었다. 내일아침 체크아웃 때까지 밖을 들락거리면서 계속 사용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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