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27일(목)
오늘은 성남누비길 6구간을 걷는 날. 시작지점인 하오고개까지 가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지하철을 타고 수인분당선 수내역 3번 출구로 나가 버스정류장을 찾아가야 하는데, 하필이면 3번 출구가 공사 중이어서 막혀있다. 안내문에는 다른 출구를 이용하라는데, 어느 출구로 나가야 하나?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약도를 보니 4번 출구가 차선일 것 같았다.
일단 밖으로 나와 3번 출구 방향으로 걸어갔는데 밖에서도 3번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혹시나 해서 골목으로 들어갔더니 거긴 2번 출구였다. 나중에 보니 4번 출구보다는 2번 출구로 나오는 게 더 빠른 길이었다. 암튼, 골목을 되돌아 나와 큰길을 따라 걸어서 ‘정자사거리’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하오고개까지 가려면 버스를 2번 타야 한다. 먼저 220번 버스를 타고 ‘뫼루니육교’까지 가야 하는데 기다리는 시간이 꽤 된다. 그래도 어쩌겠나! 시간이 지나 220번 버스를 타고 7정류장 지나 내렸다. 이젠 하오고개까지 가는 103번 버스를 기다려야 한다.
한참 기다렸다가 103번 버스를 타고 하오고개에 내렸는데, 목적지인 육교는 공중에 떠있다. 저 육교를 건너야 하는데 어떻게 올라가지? 주위를 둘러봐도 올라가는 길은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길도 없는 가파른 언덕을 오르니 또 따른 포장도로가 나타났다. 조금 걷다가 주위를 둘러보니 육교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다. 이정표를 보니, 하오고개 전 정류장인 ‘운중동 먹거리촌’에서 내려 2km 걸어와야 했나 보다. 어떻든 길을 찾았으니 됐다.
오늘은 시작부터 나무데크 계단을 오른다. 그리고 길은 공동묘지로 이어졌다. 묘지 주변에는 유난히 붉은 철쭉들이 많았다. 주위에는 연분홍 색깔들 뿐인데.
녹음이 우거진 낙엽 쌓인 흙길은 다른 구간과 비슷한데 , 6구간에는 난코스가 꽤 여러 곳 있었다. 어떤 곳은 가파른 바위만 있었다. 이곳도 길인가 싶었는데 바로 위에 밧줄을 묶어놓은 게 보였다. 초보자들은 다니기 어려운 길이었다. 베테랑이라도 방심은 금물! 긴장하면서 다리에 힘을 주고 한발짝씩 어렵게 올라야 하는 길이었다.
산길을 걷다 보면 다른 종류의 나무들이 뒤엉켜 있는 모습을 가끔 보게 된다. 같은 종류의 나무들은 한 곳에 자라는 경우가 많으니까 더러 그럴 수 있겠지만, 다른 나무가 우연히 만나 서로 엉켜서 자라는 것은 둘 다 힘들지 않을까. 물론 나무들이야 그런 느낌을 모를 테지만.
09시30분, 국사봉(國思峰, 540m)에 도착했다. ‘성남누비길’의 다른 ‘봉’들과는 달리 이곳은 정말 봉우리다. 그렇지만 능선을 따라 걷기 때문에 여느 산을 오를 때만큼 오르는 건 아니다. 정상석 밑에는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세워지자 청계산에 은거하던 고려충신 조윤(趙胤)이 멸망한 나라를 생각하던 곳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란 설명이 있다. 그런데, 인터넷을 찾아보니 조윤은 고려가 망하자 자(字)를 종견(從犬)으로, 이름은 조견(趙狷)을 바꾸고 은거했다고 하지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따르면 최종 벼슬이 판우군도총제부사(세종1년, 1419)에 이르렀으며, 궤장(几杖, 나라에 공이 많은 70세 이상 대신에게 내리던 궤와 지팡이)을 하사 받고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에 책봉(세종3년, 1421)됐다고 한다. 게다가 죽어서는 평간(平簡)이란 시호까지 받았다. 그러니까 ‘국사봉’ 이름에 대한 얘기는 평양 조씨 족보와 문중에 전해오는 야사에 따른 것일 뿐이다.
09시45분, 스탬프 박스가 설치돼있는 이수봉(545m)에 도착했다. 이곳 정상석에도 “조선 연산군 때 유학자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이 스승인 김종직(金宗直, 1431~1492)과 벗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이 연루된 무오사화(戊午史禍)의 변고를 예견하고 한때 이 산에 은거하며 생명의 위기를 두번이나 넘겼다고 해서 후학인 정구(鄭逑)가 이수봉(二壽峰)이라 명명했다”는 설명이 쓰여있다.
이수봉 주위에는 나무데크를 깔아 놓았는데 나무들을 위한 공간이 너무 비좁아 보인다. 처음에는 넉넉하게 구멍을 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꽉 차게 자랐는데, 앞으로 나무가 좀 더 자라려면 구멍이 더 커야 할 것 같다. 만약 그대로 두면 나무가 더 못 자라거나 기형적으로 자랄까 봐 염려스럽다.
이제 길은 청계산으로 이어진다. 청계산 제1봉은 망경대(望京臺, 618m)지만, 국가시설이 설치돼있어서 갈 수는 없다. 그 망경대로 가는 길에 <송산 조견(趙狷) 선생과 망경대>란 설명문이 세워져 있다. 이에 따르면, “본래는 상봉에 오르면 눈 아래 만경(萬景)이 전개된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었지만, 조견이 그곳에 자주 올라 개경을 바라봤다고 해서 세인들이 ‘망경대’로 부르게 됐다”고 했는데, 앞의 ‘국사봉’에서처럼 근거 없는 야사이기 때문에 ‘만경봉(萬景峰)’이 훨씬 그럴 듯해 보인다.
한편 청계산(淸溪山)은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산’이란 뜻으로, 옛골원터골 등 계곡이 많은 편이다. 청룡이 승천했던 곳이라고 해서 청룡산(靑龍山)으로 불리기도 하며, 풍수지리학적으로는 수리산을 백호, 청계산을 청룡이라 하여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의 개념으로 해석하기도 한단다.
청계산의 실질적인 제1봉인 매봉(582.5m)으로 향하는 길에 ‘혈읍재’를 지나는데, 그곳에 세워진 설명문에 따르면, “조선 연산군 때 유학자 정여창이 스승 김종직이 무오사화로 부관참시 당했다는 소식에 은거지인 금정수(하늘샘)으로 가기 위해 피(血) 눈물을 흘리며(泣) 넘어다녔다는 고개”라고 한다. 이성적(理性的)인 판단으로는 나올 수 없는 이름이란 생각이 든다.
10시47분, 매봉에 도착했다. 여기까지 걷는 동안 한 두 사람밖에 만나지 못했는데, 이곳에는 여러 사람들이 있었다. 게다가 사람들이 계속 올라왔다. ‘매봉’ 표지석 옆에 나무벤치가 있는데 그늘진 곳은 벌써 먼저 온 사람이 차지했고, 다른 곳은 햇볕이 따가울 것 같아 그늘진 바위에 자리잡고 점심을 먹었다. 그 전에 땀에 젖은 패딩점퍼를 벗고 역시 젖어있는 티셔츠만 입고 있었더니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으스스하다. 점심으로 싸간 약밥을 조금 먹고 커피도 한잔 마신 다음 배낭에 넣어갔던 티셔츠로 갈아입으니 조금 따뜻해졌다.
점심 먹은 배낭을 다시 꾸리고 매봉 정상석 사진을 몇 장 찍은 다음 하산을 시작했다. 매바위를 지나, 오늘도 아쉬운 마음에 ‘청계산 충혼비’에 다시 들렀다. 매번 올 때마다 소주나 한잔 올려야지 생각했었지만 오늘도 이곳을 지나는지 몰라 그냥 온 게 좀 서운하다. 그래도 어쩌겠나!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물론 그런다고 달라질 거야 없겠지만.
11시15분, 헬기장을 지났는데 원래 코스대로라면 왼쪽으로 가서 ‘옛골 등산로 입구’로 내려가야 하지만, 어차피 귀가하려면 ‘청계산입구역’으로 가서 지하철을 타야 하기 때문에 ‘원터골’로 바로 내려가기 위해 오른쪽 길을 택했다.
원터골로 내려가는 길도 여러 갈래지만 가장 짧은 거리를 택해 왼쪽으로 가니 계단이 정말 많다. 그래도 헉헉거리며 올라오는 사람들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하산할 수 있었다. 원터골 조금 못 미처 청계산 등산로 입구에 설치된 에어청소기로 신발과 바지에 묻은 먼지를 털고 청계산입구역까지 걸어가서 지하철을 2번(양재, 오금) 갈아타고 귀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