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2일(일)
엊저녁에는 너무 일찍(저녁 9시 반쯤) 자서 그런지 새벽에 잠이 깨어 시계를 보니 아직 3시 반밖에 안됐다. 아무래도 너무 이른 것 같아 좀더 뒤척이다가 5시에 일어나 짐을 챙겨 식당으로 가서 유튜브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인터넷에는 알베르게 요금에 아침식사가 포함됐다고 했는데, 몇 시에 주는 미처 확인하지 못해 6시까지 기다리다가 아무런 소식이 없어 배낭을 메고 밖으로 나와 걷기 시작했다.
지난번 왔을 때는 이 시간이면 밖이 어두웠었기 때문에 헤드랜턴까지 준비해왔는데, 오늘은 벌써 훤하다. 그래서 헤드랜턴을 다시 배낭에 챙겨 넣고 발걸음을 옮겼다. 이른 시간이지만 나 말고도 걷고 있는 순례자들이 더러 있었다.
경사진 성채거리를 내려가 성모승천성당(Église Paroissiale de l’Assomption de la Vierge) 옆에 있는 노트르담 문(Porte Notre-Dame)을 지나 문을 연 빵집 안으로 들어가 그림을 보고 아침식사로 먹을 빵을 4.5유로에 샀는데, 입맛에 맞질 않는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배 고프면 안되니 꾸역꾸역 다 먹고 밖으로 나오니 배가 불러서 그런지 걷는데 힘이 더 들어가는 것 같다.
스페인문(Porte d'Espagne)을 지나면서 오르막길이 시작됐다. 그리고 이내 발카를로스 루트(Ruta de Valcarlos)와의 갈림길이 나왔지만, 오늘은 나폴레옹 루트(Ruta Napoleon )를 따라 걷기로 작정한 터였다. 이정표를 보니 오늘의 목적지인 론세스바예스까지는 24.5km, 예상시간은 6시간35분으로 돼있었다.
걷기 시작한지 1시간쯤 지나 첫번째 마을인 온토(Honto, ou Huntto en basque)를 지나는데, 아스팔트 길이지만 경사가 너무 급해 땀을 뻘뻘 흘리며 걷는다. 그리고 온토를 지나자마자 산길로 접어드는데, 경사가 더 급하다. 그래도 아직은 초반이니 걸을 만하다.
산길을 15분쯤 올라 다시 아스팔트 길을 만났는데, 여기부터는 안개가 자욱하다. 시야가 너무 짧아서 자동차 운전하는 사람들은 정말 조심해야겠다. 걷는 사람들에게는 크게 위험하진 않지만 주위경치를 볼 수 없으니 아쉽다.
오전 8시 조금 지나 오리송 알베르게(Refuge Orisson)에 도착했는데, 오른쪽 데크 위에 있는 천막들이 전부 접혀있어서 문을 닫았나 했더니 영업 중이어서 안으로 들어가 맥주 한잔을 마시고 화장실까지 다녀온 후에 다시 오르막길을 올라간다. 그래도 맥주기운에 힘을 좀더 낼 수 있는 것 같다. 이정표에는 론세스바예스까지 17.1km, 4시간20분이 소요될 것이라고 써있다.
걸어갈수록 앞에 걸어가고 있는 순례자들이 점점 많이 보인다. 나보다 걷는 속도가 느린데도 앞에서 걷고 있는 건 나보다 일찍 출발했다는 건데, 도대체 몇 시에 출발한 거야? 길 옆에는 군데군데 돌무더기가 보이는데, 한곳에는 한글이 적힌 반듯한 돌들도 몇 개 있다.
오전 9시쯤 오리손 성모상(La Vierge d'Orisson= La Virgen de Biakorri)이 있는 곳에 도착해서 배낭을 길가에 벗어놓고 가까이 다가가 사진을 몇 장 찍고 돌아왔다. 하지만 다른 순례자들은 성모상에 별 관심이 없는지 대부분 그냥 무심하게 지나갔다. 오늘 넘어야 하는 레푀데르 고개(Collado de Lepoeder)는 해발 1430m나 되기 때문에 그곳까지는 계속 올라가만 한다. 중간에 평평한 길도 가끔 만나지만 그 구간이 너무 짧다.
1시간쯤 더 걸어 올라가 길가에 있는 푸드트럭을 만났다. 바람도 많이 불고 너무 추워서 따끈한 커피라도 한잔 마시고 싶었지만, 음료수라곤 모두 차가운 것들 뿐이다. 쉬기도 하고 요기도 할 겸 바나나 하나를 1유로에 샀다. 계란도 1개에 1유로라는데, 너무 퍽퍽할 것 같아서 사진 않았다.
돌무더기 위의 롱스보(Roncevaux) 이정표 옆에 있는 십자가(Croix de Thibault)를 지나는데, 한무리 사람들이 승합차에서 내려 걷기 시작한다. 10명 정도 되는데, 처음 걷기 시작하는 거라서 그런지 씩씩하게 잘 걷는다.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앞에서 가이드가 열심히 설명도 해준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765km라는 표지석과 롤랑의 샘(Fuente de Roldán)을 지나고 나니, 나바라 표지석이 서있다. 여기부터 스페인이란 표시다. 오래 전부터 세워져 있었을 텐데, 6년전 처음 왔을 때는 본 기억이 없다. 그래서 언제 스페인 국경을 넘었는지 알지 못했었다. 롤랑의 샘은 분명 본 기억이 나는데.
나무가 우거진 숲속에 있는 흙길을 만났는데, 이내 진흙탕 길로 변해있다. 언제 비가 와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꽤 넓은 길에 진흙탕이 꽉 차 있어서 신발을 버리지 않고는 도저히 지나갈 수가 없다. 몇몇 순례자는 산으로 올라가서 지나가려고 하지만 쉽진 않다.
100m 앞에 집표시를 한 이정표가 있어서 뭔가 궁금했는데, 다다가 보니 대피소였다. 집표시만 보고 혹시 알베르게가 이런 외진 곳에 있나? 그러면 먹을 걸 팔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잠시 가졌지만 모두가 허사였다.
지루하게 오르막을 올라 11시40분쯤 드디어 정상인 레푀데르 개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내 두갈래 내리막길이 나타났다. 어제 생장피에드포르의 순례자사무실에서 왼쪽 길은 위험하니 반드시 오른쪽 길로 가라고 했기에 오른쪽 길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몇몇 순례자들은 모험이라도 하려는 듯 왼쪽 길로 내려가기도 했다.
11시44분, 이바녜타 언덕(Puerto de Ibañeta)에 도착해 롤랑의 거석(Monumento a Roldán)과 산 살바도르 성당(Iglesia de San Salvador de Ibañeta) 사진을 몇 장 찍고 숙소(Albergue de peregrinos de Roncesvalles)를 향해 내려갔다. 성당에는 구경하기 위해 온 관광객들이 더러 있었지만, 성당 문은 닫혀있었다.
이바녜타 언덕에서 숙소까지는 가까운 줄 알았더니 20여분 가까이 내려가야만 했다. 그렇게 낮 12시45분쯤 숙소에 도착했는데, 오후 1시부터 접수를 시작한다고 해서 사무실 앞에 쭈그리고 앉아 시간을 보내다가 두번째로 접수를 마치고 침대를 배정받았다.
숙소 안을 이곳저곳 기웃거리다가 샤워장을 찾아가 씻은 다음 빨래를 들고 세탁기를 찾아가려는데, 오후 2시 반부터 쓸 수 있다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아직 1시간 정도 남았으니, 그동안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을 찾아나섰다. 숙소 옆에 있는 식당(Casa Sabina Roncesvalles)으로 가서 확인해보니 오늘저녁 순례자메뉴(Menú del Peregrino)를 먹을 곳도 여기였다. 좀전에 침대를 배정받으면서 저녁에 먹을 순례자메뉴도 함께 신청해둔 터였다.
점심을 주문하려는데 앉을 자리가 없어, 먼저 온 사람들과 합석하게 됐다. 닭가슴살이 들어간 바게트 샌드위치와 맥주 한잔을 시켰는데, 샌드위치가 너무 커서 반쯤 남겨 남겨야 할 것 같았지만 먹다 보니 다 먹어버렸다.
식당을 나와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가게에 들르려고 했지만, 그 사이 문을 닫았다. 오늘이 일요일이나 문을 일찍 닫은 건가? 이 마을은 너무 작아서 물 한변 살 만한 곳도 없다. 낮에 땀을 많이 흘려 목이 마르지만 어쩔 수 없다. 저녁 먹을 때까지 참을 수밖에.
오후 2시 반쯤 세탁기가 있는 지하로 내려가 빨래를 맡겼다. 세탁은 3유로, 건조는 4유로였다. 아직은 시간이 많이 남아있으니 세탁만 해서 밖에 널면 될 것 같다. 빨래를 손으로 해도 되지만 조금 귀찮은 것도 있고, 오늘처럼 흐린 날에는 조금이라도 빨리 말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세탁기를 돌리게 됐다. 세탁기는 탈수까지 해주니 손빨래 해서 어설프게 짜는 것보다 물기가 훨씬 덜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일기를 쓰고 동영상을 보다가 저녁 7시가 되어 점심을 먹으로 갔던 식당으로 다시 갔다. 그런데 저녁 먹는 자리가 영 불편하다. 식당에서는 비슷한 순례자들이라고 해서 합석하도록 했겠지만, 언어도 다르고 성향도 다른 사람들이 함께 앉아있으니 서로가 민망한 것 같다. 그래도 유럽사람들끼리는 어찌어찌 언어가 통하니 소소한 대화를 이어가는데,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여간 고역이 아니다. 결국, 디저트를 먹자마자 먼저 일어나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식당을 나와버렸다.
낮에 널어놓은 빨래를 가지러 갔는데, 거의 마르지 않았다. 이 정도면 세탁기를 돌린 보람도 없다. 하긴 손빨래를 했으면 이 정도도 마르지 않았겠지! 그런데 낮에 널려있던 다른 순례자들의 빨래들은 보이지 않는다. 젖은 빨래를 들고 숙소로 돌아와 창문과 침대에 덕지덕지 널어놓았다. 내일차임까지 마르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