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일, 론세스바예스에서 수비리까지

by 이흥재

2024년 6월3일(월)


오늘도 꼭두새벽부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내 윗 침대를 쓴 순례자인데, 일찍부터 짐을 꾸리는 것 같다. 예절을 아는 사람이라면 짐을 모두 챙겨서 1층으로 내려가 짐을 싸면 좋을 텐데, 잠자는 사람들을 방해하면서 시끄럽게 하면 어떡하나! 밤에는 조그만 소리도 크게 들리니 잠을 잘 수가 없다. 옆 침대에서 소곤거리는 대화도 잠을 방해한다.


엊저녁에 일찍 잤으니 수면시간은 충분한 것 같지만, 너무 일찍 일어나면 마땅하게 할 일도 없어 5시 반에 알람을 맞춰놓고 일어나려고 했는데, 너무 시끄러워서 결국 일어나기로 하고 시계를 보니 5시24분이다.


얼른 화장실부터 다녀온 다음, 어제 널어놓은 빨래와 침낭 등을 챙겨 1층으로 내려가 배낭을 꾸렸다. 그리고 6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에 출발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더니 안개가 너무 짙어서 비가 내리는 것 같다. 얼른 안으로 들어가 배낭커버를 씌웠다. 비옷을 입을 정도는 아닌 것 같다. 그리고 드디어 출발이다.


이 시간에 출발하는 순례자들이 나 말고도 몇 명 더 있었다. 안개가 짙은데다 숲속을 지나야 해서 처음으로 헤드랜턴을 켰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밝지 않다. 외길이고 노면상태가 좋으니 그런대로 괜찮긴 해도 만족스럽지는 못하다.


엊그제 생장피에드포르의 순례자사무소에서 나눠준 자료를 보면, 오늘 아침식사를 첫 마을인 부르게테(Burguete, Auritz en euskera) 마을에서 하라고 했었는데, 막상 부르게테에 도착해보니 문을 연 바르나 식당이 없다. 어쩔 수 없이 다음 마을인 에스피날(Auritzberri/ Espinal)까지 가야 한다. 부르게테 거리를 지나는데, 대문 위에 표시된 연도를 보니 상당수가 18~19세기에 지어진 건물들이다. 그동안 보수를 했겠지만, 대단히 오래됐다. 그리고, 그 당시 유행이었는지 대문 위에 연도표시를 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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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길에서 벗어나 숲길을 지나는데, 목장에서 소와 말들이 풀을 뜯고 있다. 말 옆에는 망아지들이 겅중거리며 뛰어다닌다. 동물들도 어릴 때는 먹는 걸 싫어하나? 풀은 안중에도 없는 듯, 장난치며 돌아다니느라 여념이 없다.


아침 7시 반쯤 에스피날에 도착했다. 마을입구에 있는 요상하게 생긴 성당(Iglesia de San Bartolomé)을 지나 마을로 들어가는데, 24시간 문을 연다는 안내간판을 따라가니 자판기였다. 간식거리와 음료수를 팔고 있었는데, 1유로를 넣고 물 한병을 샀다. 그런데 물병 재질이 너무 얇아 흐물흐물하다. 이러다가 물병이 찢어져 물이 새는 건 아닌지 염려스러울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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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피날에도 부르게테와 비슷한 대문을 가진 집들이 아주 많다. 물론 연도표시도 다 돼있는데, 부르게테와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집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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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가다 보니 문을 연 바르(bar)가 보인다. 안으로 들어가니 ‘아침식사’라고 써놓은 안내문도 있다. 음식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맛을 몰라 망설이고 있었더니 주인이 열심히 설명해준다. 그중에 포요(pollo) 소리만 알아듣고 오렌지주스와 함께 9유로를 내고 주문했는데, 먹다 보니 닭 냄새가 조금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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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를 나와 마을을 막 벗어나려는데 마주오던 마을주민이 순례자냐고 물어서 그렇다고 했더니, 길을 잘못 들었단다. 그제서야 주민이 가르쳐준 방향을 보니 도로바닥에 노란 화살표가 큼직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니다. 이걸 놓치다니, 큰 실수다. 무심코 계속 걷다가 헛수고할 뻔했다. 고마워요, 주민씨!


메스키리스 고개(Alto de Mezquiriz, en euskera: Mezkiritz)로 올라가는 길이 한참 이어진다. 여러 가이드북을 보면, 어제 피레네산맥을 힘들게 넘어온 순례자들에게 오늘 여정은 보상이 될 만큼 쉬운 코스라고 했는데, 말도 안되는 소리다. 오늘은 고개를 2개나 넘어야 해서 만만한 여정이 아니다. 그리고 올라갈수록 힘이 더 든다. 이건 나이 때문이 아니다. 젊은 순례자들도 자주 쉬고 천천히 걸어가는 걸 보면 그저 힘든 길일 뿐이다.


고개를 넘고 나서도 계속 숲길로 이어진다. 이정표를 보니 오늘의 목적지인 수비리(Zuburi)까지 13.1km 남았다. 꽤 많이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3분의1쯤 걸은 셈이다. 지나는 길에는 순례길 표시인 노란 화살표와 함께 GR (Sendero de Gran Recorrido)을 표시하는 하얗고 빨간 두줄 표시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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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시12분, 비스카렛(Viscarret-Guerendiáin, en euskera: Bizkarreta-Gerendiain) 마을 초입에 있는 간이바르에 들러 맥주를 한잔 마셨다. 힘들기도 해서 오늘은 자주 쉬는 편이다. 그런데 맥주 맛이 너무 쓰다.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주문했더니 흑맥주를 줬나 보다. 게다가 맥주 맛도 너무 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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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지나 숲길로 접어든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 있는 린소아인(Linzoáin. Lintzoain en euskera) 마을 놀이터 옆에 있는 나무벤치에 앉아 신발 속에 들어간 작은 돌멩이들을 털어냈다. 길을 걷다 고개를 들어 우연히 산을 바라보니 그 위에 있는 하늘이 너무 파랗다. 눈으로 넓은 지역을 보면 지저분한 모습도 보이지만, 사진을 찍으면 멋진 장면만을 담을 수 있어 더 좋은 풍경을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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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에로 고개(Alto de Erro)를 향해 올라가는 초입에 지난해 새롭게 만들어놓은 순례자 묘가 보인다. 묘라고 해봐야 조그만 돌무더기와 작은 철제십자가가 전부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만들어놓은 정성이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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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막길을 한참 걸어서 11시쯤 드디어 에로 고개에 도착했다. 하지만 에로 고개 표지판이 밑에 있는 걸 보면 고개보다 더 높은 곳을 걸어온 셈이다. 그리고 고개 옆에는 언제나처럼 푸드트럭이 서있다. 우선 의자에 배낭을 내려놓고 푸드트럭으로 가서 3유로를 내고 오렌지주스를 하나 샀다. 오렌지를 직접 갈아주는 거라서 꽤 걸쭉하고 시원하다. 이곳에서는 음식도 팔고 있지만, 아직은 점심식사 할 시간이 아니어서 구경만 했다. 트럭 옆에는 나무로 엮은 조그만 통을 놔두고, “안입은 속옷을 놔두면 행운을 준대요”라고 한글로도 써놨다. 이런 걸 모아서 뭘 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두고 간 속옷들이 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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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산길로 접어드는데, 이정표를 보니 수비리까지 3.1km 남았다. 그리고 계속 올라왔으니 지금부터는 내리막길 경사가 심하다. 게다가 노면도 고르지 못하다. 아예 깨진 점판암 투성이다. 그러니 바닥이 뾰족한 곳도 있어서 두 눈을 크게 뜨고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수비리에 도착해서 처음 찜해뒀던 알베르게(Albergue Zaldiko) 앞에 도착하니 낮 12시 10분 전이다. 인터넷에는 12시에 문을 연다고 돼있어서 잠시 기다렸지만 시간이 되도 문을 열리지 않고 안에서는 인기척조차 없다. 이 알베르게는 예약할 수 있는 곳이라 무작정 기다렸다가는 침대가 없을 수도 있어, 다음으로 생각했던 공립알베르게(Albergue municipal de Zubiri)로 갔더니, 예상과 달리(인터넷에는 오후 1시에 문을 연다고 돼있다) 접수를 받고 있었다. 앞서온 순례자들을 기다렸다가 내 차례가 됐다. 숙박비는 14유로. 인터넷에는 12유로라고 돼있는데, 좀 비싸다. 그리고, 위층 침대를 배정해 주길래 아래층으로 달라고 했더니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아래층으로 해줬다.


샤워를 끝내고 빨래하는 곳을 직원에게 물어보니 이곳에선 세탁과 건조까지 포함해서 3유로라고 하길래 오늘도 빨래를 모두 맡겨버렸다.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가야겠는데, 숙소와 조금 떨어져 있어서 나기는 게 귀찮다. 하긴 같은 마을이니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지만, 오늘은 극히 피곤하고 발도 정상이 아니어서 더 그런 것 같다. 그렇다고 점심을 굶을 수는 없으니, 결국 식당까지 걸어가서 소시지 샌드위치와 맥주를 한잔 시켰다. 그리고 저녁은 몇 시부터 먹을 수 있느냐니까, 8시 반부터 지금과 같은 메뉴를 팔 거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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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을 나와 바로 앞에 있는 가게에 들어갔더니 간단하게 데워먹을 수 있는 음식을 팔고 있다. 이래저래 저녁걱정 없이 이걸 데워먹으면 될 것 같다.그리고 이참에 내일아침에 데워먹을 파에야도 함께 샀다. 요구르트와 납작복숭아(paraguayo= flat peach) 2개까지 두 끼 식사비가 12유로다. 이 정도면 괜찮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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