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일, 팜플로나에서 푸엔테 라 레이나까지

by 이흥재

2024년 6월5일(수)


오늘도 부지런한 사람이 꼭두새벽에 일어나 부스럭거리는 바람에 일어났더니 새벽 4시 반밖에 안됐다. 화장실에 다녀와서 1시간 누워있는 동안에도 뭘 하는지 계속 부스럭거렸다. 참, 매너 없다. 그 정도 시간이 걸릴 거면 짐을 들고 밖으로 나가서 배낭을 꾸리면 좋을 텐데.


잠을 자는둥 마는둥 누워있다가 5시20분에 일어나 세수부터 하고, 주방으로 가서 어제 사다 놓은 즉석식품을 데워 요구르트와 함께 아침식사를 했다. 오늘도 디저트는 납작복숭아다. 그리고, 특별히 할 일도 없으니 곧장 출발한다.


알베르게 문을 열고 거리로 나섰더니 나보다 먼저 출발한 순례자들이 있다. 길바닥에 설치해놓은 순례길 표시를 따라 시청(Ayuntamiento de Pamplona)을 지나고 오른쪽으로 계속 걸어갔다. 그런데 앞서 걷던 두 사람은 왼쪽으로 갔다. 무슨 일이지? 길을 잘 모르나? 어디 달리 들를 데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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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순례길 표시를 놓치거나 없으면 마을주민들에게 물어가면서 계속 걸어간다. 나바라 대학교(Universidad Navarra) 교정을 지나는 것 같은데, 캠퍼스 규모를 가늠할 수가 없다. 그저 순례길 표시가 있는 대로 캠퍼스 주변을 지나갈 뿐이다. 그렇게 1시간쯤 걸어서 팜플로나를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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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마을인 시수르 메노르(Zizur Mayor, en euskera Zizur Nagusia)를 지나고 페르돈 고개(Alto del Perdón)를 향해 가는데 저 멀리 산등성이를 타고 풍력발전기들이 줄지어 서있다. 한참 걷다가 이정표를 만났는데, 페르돈 고개까지 4.3km나 남아있다. 빤히 보이는데도 그렇게 멀다니! 오늘 목적지인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 en euskera Gares)까지는 14.6km다. 새벽부터 2시간 남짓 걸어서 10km쯤 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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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처음 보는 한국사람들을 만났다. 그러고 보니 한국사람들이 참 많이 온 것 같다. 걷기 좋은 길이라고 소문이라도 났나 보다. 하긴 요즘이 걷기 좋은 계절이긴 하다. 그런데, 가족과 함께 온 듯한 젊은 아가씨가 나혼자 다니니 사진 찍기도 어려울 것 같다면서 내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한다. 정말 고맙다. 내가 사진을 찍는 동안 웃는 표정을 짓도록 농담도 건넨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감사표시도 변변하게 못한 것 같다. 그저 고맙다는 말만 하고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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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터덜터덜 걸어 사리키에기(Zariquiegui, Zarikiegi en euskera) 마을을 지났다. 그런데 생각을 잘못했다. 지난번 왔을 때는 페르돈 고개를 지나서 쉬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때 사리키에기에서 쉬었던 거였다. 어쩐지 페르돈 고개 정상으로 향하는 낸 아주 많이 피곤하다.


그렇게 지친 몸을 이끌고 9시24분, 페르돈 고개 정상에 섰다. 숙소를 떠난 지 3시간 24분만이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휴식도 한번 못했다. 잠시 앉아있으니 어제 같은 숙소에 묵었던 한국사람들이 올라왔다. “다른 사람들은 쉽게 걷는 것 같은데, 왜 나만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다”고 했더니 제일 빨리 걸으면서 무슨 소리냐고 한다. 그들은 나보다 10분쯤 먼저 출발했는데, 내가 앞서 와있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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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해서 인증사진도 남기고 그들보다 먼저 페르돈 고개를 내려갔다. 그런데 그 길이 만만치 않다. 가파른 내리막길인데다 바닥은 동글동글한 자갈이 한가득이어서 자칫 넘어질 수도 있겠다. 그리고 내리막길을 내려가기만 하면 바로 우테르가(Uterga) 마을이 있을 거란 예상과 달리 3.6km나 더 가야 했다. 평상시엔 먼 거리가 아니지만 간식 때를 놓쳐 허기지고 목마른 상태로 걷자니 힘이 2배는 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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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페르돈 고개를 출발한지 1시간쯤 지나 우테르가 마을 끝에 있는, 알베르게를 겸한 바르에 도착했다. 급한 대로 화장실부터 들렀다가 맥주를 한잔 마시면서 어제 사놓은 안주도 계속 먹었다. 마시는 동안은 시원하지만 이내 갈증이 계속된다. 하지만 계속 마시고 있을 수는 없으니, 배낭을 메고 바르를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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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푸엔테 라 레이나 바로 전 마을인 오비노스 (Obanos)에서 점심을 먹기로 한다. 그런데 바로 전 마을인 무루사발 (Muruzábal)은 물론, 오바노스도 빤히 보이는데 거리는 4.5km나 됐다. 무루사발을 지나고 언덕을 올라 오바노스 초입까지 갔는데, 순례길은 계속 이리저리 꼬불꼬불 안내한다.


갑자기 순례길 표시를 놓쳐서 마을주민에게 바르가 어디 있는지 물었더니 방향을 가리키는데, 이 마을의 유명한 성당(Iglesia de San Juan Bautista)이 보인다. 그러고 보니 이 길을 지났던 기억이 난다. 다시 터벅터벅 걸어 바르에 들어가 토르티야와 맥주를 시켰다. 그런데 음식을 다 먹고 나서도 허기진 것 같다. 배 고픈 게 아니라 더위를 먹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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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노스에서 푸엔테 라 레이나까지는 2.6km밖에 안된다. 그래도 극도로 지친 상태라 꽤 힘들다. 하지만 마을초입에 있는, 전에 묵었던 알베르게 (Albergue Jakue)는 그냥 지나치고 공립알베르게(Albergue de los Padres Reparadores)로 갔더니 한창 접수 받고 있는 중이었다. 전에 묵었던 알베르게는 시설에 비해 요금이 비싼데다, 함께 운영하고 있는 호텔 뷔페음식도 전보다 꽤 인상된 것 같아서였다.


공립알베르게 요금은 9유로로 지금까지 묵었던 알베르게 중에서 가장 싸다. 침대도 그런대 맘에 든다. 옆 침대와의 간격이 어느 정도 떨어져 있어야 편히 지낼 수 있는데, 여긴 꽤 넓다. 한가지 아쉬운 건 샤워시설이 별로 없다는 거였다. 결국 한참 기다렸다가 샤워하고 빨래까지 마쳤다. 세탁기를 쓰면 3유로지만, 오늘은 날씨가 좋으니 대충 빨아 널어도 잘 마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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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는 순례자메뉴를 먹기 위해 알베르게 직원에게 물어봤더니 7시부터 먹을 수 있는 식당(Torreta)을 알려줬다. 잠시 후 시내구경도 할겸 밖으로 나갔다가 저녁을 먹고 들어와야겠다. 나간 김에 마트에 들러 내일 아침에 먹을 것도 좀 사고.


푸엔테 라 레이나에는 성당 등 볼거리들이 많이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마을이름과 같은 여왕의 다리(Puente románico de Puente la Reina)다. 내일아침 출발할 때는 잘 볼 수 없을 것 같아 구경하러 갔었는데, 햇볕이 너무 뜨겁다. 나중에 들어보니 팜플로나에서는 일사병 때문에 응급실로 실려간 사람도 있다고 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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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구경하고 마트에 들어 내일 먹을 아침식사를 사려는데 마땅한 게 없다. 겨우 엠파나다(empanada)를 조금 사고 납작복숭아 2개와 팩에 든 요구르트를 1개 샀다. 다른 용기에 든 요구르트는 낱개가 아닌 4개 세트로만 팔기 때문에 살 수가 없다. 지금은 2개만 필요한데, 사서 들고 다닐 수도 없다. 무겁기도 하지만 언제 상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숙소로 돌아가기 전에 알베르게 직원이 알려준 식당에 갔더니 오후 6시부터 순례자메뉴를 먹을 수 있다고 해서 잠시 기다렸다가 저녁식사를 하고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멀건 고기국물 뿐인 수프는 냄새도 좀 나고 맛도 별로 없었지만, 메인인 비프스테이크는 아주 맛있었다. 후식은 푸딩을 줬는데, 그럭저럭 먹을 만한 맛이었다. 역시 순례자메뉴가 가성비로는 괜찮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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