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일, 푸엔테 라 레이나에서 에스테야까지

by 이흥재

2024년 6월6일(목)


오늘도 같은 시간대에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을 뒤척이다 5시 반에 일어났지만, 화장실을 들락거리느라고 다른 날보다 30분쯤 늦게 출발했다. 그래도 오늘은 어제보다 좀 짧게 걷기 때문에 괜찮을 것 같다. 조금 늦은 기간이라서 그런지 앞서 걷는 사람들이 꽤 있었지만, 이내 그들을 지나쳐 한적한 푸엔테 라 레이나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당연한 거지만 어제 저녁을 먹었던 식당은 문이 굳게 닫혀있다.


자동차도로(NA-1110)에 있는 다리를 건너며 여왕의 다리 사진을 찍었지만, 역시 낮에 찍는 만큼 선명하지 않다. 그래도 어제 여러 장 찍어놨으니 아쉬울 건 없다. 순례길은 자동차도로를 건너 왼쪽으로 이어진다. 날도 적당히 밝은데다 순례길 표시도 잘 돼있어서 길 잃을 염려는 없겠다. 푸엔테 라 레이나를 벗어날 무렵, 에스테야(Estella, en euskera: Lizarra)까지 19.7km란 안내판이 보인다.


이제 걷기 시작한데다 아침에 진통제까지 먹고 와서 아직은 걸을 만하다. 다른 사람들은 무릎이 아플 까봐 걱정하는데, 나는 걸을 때마다 발가락에 물집에 생겨 고생한다. 이번에도 새끼발가락에 물집이 생겨, 바늘로 따고 물을 빼낸 다음 연고까지 발랐지만 쉽게 낫질 않는다. 어제는 오른쪽 발가락만 그랬는데, 오늘 보니 왼쪽 발가락에도 물집이 생겼다. 더구나 왼쪽 발가락은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터져있다.


오늘도 역시 오르막길이 있다. 다들 걷느라고 힘들겠지만, 나만 유독 더 힘든 것 같은 느낌이다. 매일 한번씩 산을 오르는 기분이다. 집에 있을 때는 1주일에 한번 정도만 산엘 가지만 여기서는 매일 가는 셈이라서 더 피곤한 건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때이른 폭염이 더 힘들게 한다. 6월이면 아직은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며 순례길을 시작한 건데, 한낮 기온이 30도 가까운 한여름 날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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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마을 마녜루(Mañeru)를 지나는데, 자주 만나는 한국여자가 길건너 벤치에 앉아 쉬고 있지만, 몇 발자국 거리라도 다가가기 귀찮아서 그냥 지나친다. 그 여자는 늘 나보가 먼저 출발하는 것 같은데, 언제나 뒤쳐져 도착한다. 나이를 물어보진 않았지만 많아야 40대 정도일 텐데 좀더 힘을 내야 할 것 같다. 그러면서 내가 빨리 걷는다고 감탄하지만, 나는 죽을 힘을 다해 극기훈련 하듯 걷는 중이다. 조금이라도 일찍 걷기를 끝마치기 위해서.


마녜루를 지나치고 언덕 위에 있는 시라우키(Cirauqui, en euskera Zirauki) 마을에 접어들었는데, 간이바르에서 커피와 주스 등만 판다. 지금은 맥주를 한잔 마시고 싶은 시간이지만 어쩔 수 없이 오렌지주스를 한잔 마셨다. 그곳은 와이파이도 되지 않아 곧바로 일어섰다.


예정대로라면 시라우키에서 맥주 한잔 한 다음 오늘의 목적지인 에스테야 바로 전 마을 비야투에르타(Villatuerta, Bilatorta en euskera)에서 쉬어갈 예정이었는데, 그전 마을인 로르카(Lorca, en euskera Lorka)에서 한국여자가 운영하고 있는 알베르게 겸 바르에 들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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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전에, 어제 옆 침대에서 자기도 했고 그동안 자주 만났던 커플을 만났지만, 만났지만, 그냥 지나쳤다. 남자는 건장하지만 여자는 왜소해 보이는데도 그럭저럭 둘이 잘 걸었다. 그래도 여자가 좀더 힘들어 보인다. 로르카에 도착하기 전 숲속에 있는 무인판매대를 만났다. 물과 빵 등을 팔고 있었는데, 가격표 없이 기부금을 받는 것 같았다. 판매대에 잠시 머무는 사이 앞서 지나쳤던 커플을 다시 만났지만, 난 얼른 로르카로 가서 맥주를 마시고 싶어 먼저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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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르카 시내를 지나는데, 칠판에 ‘아이스커피’라고 크게 써놨다. 그리고 조금 가다 보니 한국여자가 바르 문밖에 나와서 인사를 한다. 알베르게를 겸한 바르를 20년 전부터 운영 중이라고 했다. 반가운 마음에 사진을 한장 찍으려고 하니 한사코 사양했다. 맥주와 토르티야를 주문했는데, 그 사이 남편이 왔다. 얼굴을 보니 6년전 한국말로 아는 체하던 그 사람이 맞다. 그때도 여자주인이 있었을 테지만, 그땐 이 바르에 들르지 않고 그냥 지나쳤기 때문에 몰랐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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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에 생장피에드포르에서 만났던 젊은 친구가 지나가길래 바르로 불러들였다. 순례길 걷는 동안 몇 번 만났지만 나보다 훨씬 빨리 갈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오늘도 만났으니 멀리 가진 못했다. 하긴 오늘도 목적지가 에스테야는 아니라고 했으니 얼마나 갈 건지는 모르겠다. 자기 말로는 하루 25km 이상 걷는 게 목표라는데, 내가 걷는 거리가 20km 이니 큰 차이는 없다. 하긴 여러 날 누적되면 많이 차이가 나겠지만.


그러는 사이 여자주인 카톡아이디를 물어봤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 비상사태가 생기면 연락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카톡 이름이 ‘봄날의 곰같이’다. 그리고 프로필도 너무 시적이다. “어느 밤은 갠지스에 손발을 씻고 물이 있어 다행이라며 깨고, 다른 밤은 침대 밑 완두콩이 등에 배긴다며 깬다” 사적인 얘기를 하진 않았지만, 사연이 많은 여자인 것 같다. 게다가 스페인의 크고 작은 도시 중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 말고는 아는 이가 거의 없는 조그만 마을에 정착해 사는 게 예사롭지 않다. 그런데 여자주인은 이곳이 팜플로나와도 가까워서 아쉬울 게 하나도 없다고 했다. 나도 다시 만날 수 없는 인연인 것은 알지만, 그냥 헤어지는 게 아쉬워 고마운 사람을 만나면 기념품으로 주려고 가져갔던 동전지갑과 한복이 디자인된 카드를 하나씩 줬더니 너무 좋아한다.


바르를 나와 다시 걷기 시작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또 갈증이 난다. 그래서 비야투에르타의 바르에 들러 오렌지주스를 한잔 마시기 위해 마을 끝에 있는 바르에 들어갔더니, 오렌지를 갈아주는 게 아니라 기성품을 팔고 있어서 여기서도 맥주 한잔만 마시고 나왔다.


비야투에르타를 벗어나니 에스테야까지 2.4km란 이정표가 보이는데, 한낮의 햇볕이 너무 뜨거워서 그런지 마냥 멀게만 느껴진다. 숲길을 굽이굽이 돌아 에스테야 초입에 도착했는데, 새로 생긴 듯한 공장이 보인다. 여기서 에스테야 시내까지는 꽤 더 가야 한다.


11시55분, 드디어 오늘 목적지인 에스테야의 공립알베르게(Albergue de peregrinos de Estella)에 도착했다. 낮 12시에 오픈이란 안내문은 있지만, 벌써 접수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앞서 온 순례자들이 서너 명 뿐이라서 금방 내 차례가 됐다. 침대를 배정받으며 꼭 요청하는 것은 Bottom Bed (Cama Inferior)다. 아무래도 Top Bed는 오르내리기 힘들어서다. 물론, Top Bed를 쓰면 머리 위 공간이 여유가 많아서 편리하긴 하지만, 오르내리는데 힘든 걸 생각하면 그 정도는 감내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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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시간을 알아보기 위해 알베르게 앞에 있는 식당엘 갔는데, 순례자메뉴는 오후 4시까지만 먹을 수 있다고 했다. 좀 애매한 시간이다. 본래 계획은 저녁에 순례자메뉴를 먹고 점심에는 간단하게 먹으려고 했기 때문에 마트도 찾을 겸 마을 안쪽으로 가봤지만 식당이 보이질 않는다. 그래서 순서를 바꿔 점심에 순례자메뉴를 먹고 저녁에는 마트에서 사다가 간단히 먹기로 했다.


그리고 마을주민들에게 물어가며 마트를 찾아갔지만 맘에 드는 먹을거리를 못 찾겠다. 몇 군데 들러 적당한 걸 사들고 다시 식당(Casa Carmen)으로 가서 순례자메뉴를 주문했다. 이곳에도 한글메뉴판이 있다. 순례자메뉴는 물론이고, 일반식사 메뉴 한 권이 모두 한글이다. 순례자메뉴는 손으로 썼으니까 그렇다 해도 인쇄된 메뉴 한 권이 모두 한글로만 돼있는 게 감탄할 만하다. 그래도 나는 일반식사를 주문할 정도는 아니다.


순례자메뉴는 전식(Primero Plato)·메인(Segundo Plato)·후식(Postre) 등 3코스로 돼있는데, 각각 몇 가지 중에서 고를 수 있다. 전에는 전식으로 대부분 수프를 먹었었는데, 엊저녁 먹었던 수프가 맛이 별로여서 오늘은 샐러드를 주문했더니 너무 짜다. 요즘 날씨가 더워 땀이 많이 나니 적당히 짜게 먹어야 한다고는 했지만, 이건 너무 짠 것 같다. 이어서 나온 돼지고기 튀김과 튀김감자도 역시 짜다. 그리고 어제는 비프스테이크를 남김없이 먹을 수 있었는데, 오늘은 비계도 많고 양도 많아 다 먹질 못했다. 그러는 사이 물과 커피를 마실 거냐고 물어보길래 달라고 했더니, 나중에 계산서에 전부 포함돼있었다. 커피는 그렇다고 쳐도 순례자메뉴에는 보통 물이나 와인이 포함돼 나오는데, 추가요금을 낸 건 처음이다. 게다가 알베르게의 자판기에서는 0.6유로인 물이 2.7유로나 됐다. 바가지를 쓴 기분이다. 순례자메뉴가 14.5유로라고 해서 주문했던 건데, 어제의 15유로보다 못한 순례자메뉴를 더 비싸게 먹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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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를 쓰는 동안에도 콧물이 계속 난다. 몸도 으스스한 것 같다. 아무래도 정상이 아닌 것 같기는 한데, 정확상 이유는 모르겠다. 그래서 내일은 차를 타고 갈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리 먼 거리도 아니다. 일정을 보니 13일째인 산 후안 데 오르테가(San Juan de Ortega)부터 부르고스(Burgos)까지 25km가 넘으니 하루쯤 차를 타고 거야 할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 그 전까지는 어떻게든 버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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