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일, 에스테야에서 로스 아르코스까지

by 이흥재

2024년 6월7일(금)


오늘도 파에야를 전자레인지에 데워서 아침식사로 먹고 진통제까지 먹은 후 6시 조금 전에 알베르게를 나섰다. 아직 채 밝지 않은 에스테야 거리를 지나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넓은 마을인 것 같다. 한참 걸어서 에스테야를 벗어나는 곳에 있는 빨간색 기아 스포티지를 보니 반갑다. 그리고 조금 가다 보니 이번엔 하얀색도 있다. 스포티지가 스페인에서 인기 있는 차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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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는 순례자들이 몇 명 있다. 나도 그렇지만 아침패턴이 비슷하기 때문에 일찍 출발하는 사람들은 늘 같은 시간에 순례를 시작한다. 걸은 지 30분쯤 지나니 와인의 샘(Fuente del Vino) 표지판이 보인다. 그리고 조금 더 가니 ‘도장’이라고 한글로 써놓은 기념품가게가 있었지만, 아무것도 사지 않고 도장만 받기가 미안해서 그냥 지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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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6시36분, 드디어 와인의 샘에 도착한다. 이라체 와이너리(Bodegas Irache)에서 운영하는 유명한 장소다. 그런데 오늘은 와인꼭지에서 와인이 나오지 않는다. 지난번에는 재미를 겸해 와인 한잔을 마시고 걸었던 기억이 있다. 옆에 있는 수도꼭지에서 물을 한잔 마시고 떠나려는데, 조금 늦게 도착한 순례자 커플이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한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사진을 남길 수 있으니 아쉬움이 덜한 것 같다.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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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의 샘을 지나 조금 가니 갈림길이 나온다. 오른쪽으로 가면 아스케타 (Ázqueta)와 비야마요르 데 몬하르딘(Villamayor de Monjardín)을 지나 로스 아르코스(Los Arcos)까지 17.9km고, 왼쪽길로 가면 루킨(Luquin)을 지나는데, 오른쪽길보다 조금 짧은 16.8km다. 특별한 사정이 없으니 조금이라도 짧은 길로 가는 게 낫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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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을 지나고 들판을 걸어 오전 8시19분에 루킨 마을에 도착했는데, 기대했던 바르가 없다. 건물 담벼락에 ‘BAR’ 표시를 해놨지만, 정작 그 바르는 문을 닫았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가? 대부분 이 시간이면 문을 여는데! 바르가 없으니 쉴 수도 없어 그냥 걷는다. 그리고 로스 아르코스에 도착할 때까지 마을을 만나지 못해 오늘은 한번도 쉬지 못하고 목적지인 로스 아르코스까지 가야만 했다.


다시 이리저리 숲길과 들길을 걷는데, 주변경치가 좋긴 하지만 피곤하니 풍경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앞서 걷던 순례자들이 휴식하고 있는 동안에도 계속 걸었다. 순례길을 걷는 동안 쉬는 목적은 단 하나, 시원한 맥주 한잔을 마시기 위해서다. 아무래도 쉬었다가 다시 걸으면 땀이 나서 윤활작용을 할 때까지 발이 아프기 때문에 어깨가 조금 무겁더라도 참고 걷는 편이다.


쉬지 않고 걸어서 11시쯤 로스 아르코스에 도착해 성당(Iglesia de Santa María de Los Arcos) 맞은편에 있는 바르에서 드디어 오늘 첫 맥주를 한잔 마시고 잠시 앉아있다가 알베르게(Albergue de peregrinos Isaac Santiago)에 도착했는데, 오픈시간이 12시라 아직은 시간이 많이 남았다. 그래도 먼저 와있는 순례자들 위에 배낭을 벗어놓고 쉬고 있는데, 속이 별로 좋지 않다. 오늘따라 졸음도 몰려온다. 휴대폰으로 동영상을 보다가 졸았는데, 깨어보니 침대배정을 하고 있어서 네번째로 접수를 마쳤다.


그런데, 침대에 앉아있는데도 속이 계속 울렁거린다. 이유를 모르겠다. 체한 건지 더위 때문인지,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계속 누워만 있었다. 짐정리를 하고 점심을 먹으러 나가야겠는데 지금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어 낮잠을 자면서 한참 동안 침대에 누워있었다.


오후 3시쯤 되어 침대에서 일어나니 속이 좀 진정된 듯해서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밖으로 나갔지만, 마땅히 먹을 만한 게 없다. 결국 마트에 들러 점심은 물론 저녁과 내일아침 식사까지 준비해서 알베르게도 돌아왔다. 마트에서 큼지막한 훈제 닭도 파는데, 어떻게 먹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아 사오진 않았다.


점심에 먹을 간단한 빵과 요구르트, 체리 5알을 들고 식당에 가서 먹으려고 하는데, 한국에서 온 모녀가 점심식사를 준비하다가 함께 먹겠느냐고 했다. 고맙다! 해물을 넣은 볶음밥과 야채샐러드까지 곁들여 맛있게 먹었다. 그런데 그 모녀도 함께 걷는 게 정말 대단한 것 같다. 매일 조금씩은 의견충돌이 있겠지만, 큰 갈등 없이 무사히 순례를 마쳤으면 좋겠다. 나도 그렇고.


저녁은 마트에서 사온 즉석식품을 데워먹었다. 근데 항상 좀 짜다. 날씨가 더워서 땀을 많이 흘리니 짜게 먹어야 한다고는 하지만, 매일 이렇게 짜게 먹는 것도 부담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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