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일, 로스 아르코스에서 비아나까지

by 이흥재

2024년 6월8일(토)


새벽에 옆 침대 순례자가 짐을 싸면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서 시계를 보니 아직 4시35분밖에 안됐다. 이 사람은 오늘 어디까지 가길래 이렇게 서두르나? 매일 이 시간에 출발하나?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짐 싸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결국 5시 반쯤 일어났을 때는 한 사람을 제외하곤 모두 떠나고 없었다. 그 시간이면 아직 어둠도 가시기 전인데!


아무튼, 평상시와 같은 시간에 일어나 화장실부터 다녀온 후 식당으로 가서 즉석식품을 데워먹었다. 식당에도 아침식사 하는 사람은 둘 밖에 없다. 참 부지런한 사람들이다.


다시 침대로 돌아와 마지막 짐정리를 하면서 감기약과 진통제를 연거푸 먹었다. 진통제는 양쪽 새끼발가락이 아파서 먹은 거고, 감기약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몸살기도 있는 것 같고 목도 칼칼해서였다. 어제보다 컨디션이 좀 낫긴 하지만 아직도 몸이 더 아파질 까봐 걱정이다. 다행히 오늘 걸을 거리는 다른 날에 비해 짧으니 푹 쉬면 나아지지 않을까, 위안해본다.


숙소를 나선 시각은 새벽 6시9분. 밖은 아직도 완전히 밝아진 건 아니지만 걷는 데는 지장이 없다. 앞서 걷는 순례자들이 몇 명 보인다. 그래도 나는 내 페이스대로 걷는다. 내가 따라잡기도 하고 나를 따라잡는 순례자들도 있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괜한 경쟁을 하면서 쓸데없이 에너지를 소비할 필요는 없다. 그들이 어디까지 가는 건지도 모르는데.


오늘도 들판과 숲길을 번갈아 걷는다. 어떤 커플은 쉼 없이 대화하면서 걷고 있는데, 그 열정이 대단하다. 걷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얘기까지 하다 보면 더 힘들지 않을까? 아직은 아침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대화내용을 알아들을 수는 없다.

20240608_062847.jpg

들판을 지나면서 매일 보는 것들은 올리브나무와 포도나무, 그리고 밀과 보리다. 그리고 밀과 보리는 이제 수확할 때가 거의 다 됐다. 아니, 벌써 수확한 곳들도 보인다. 그러면서, 어렸을 때 들었던 동요가 자꾸만 생각난다. “밀과 보리가 자란다, 밀과 보리가 자라는 것은 누구든지 알지요. 농부가 씨를 뿌려 흙으로 덮은 뒤에 발로 밟고 손뼉치고 사방을 둘러보지요.” 인터넷을 찾아보니 이 노래는 작자미상의 외국곡으로 원제는 ‘Oat Peas Beans and Barley Grow(귀리·콩과 보리가 자란다)’라고 한다.

20240608_065354.jpg

아침 7시가 가까워지면서 등뒤에서 해가 떠오른다. 산티아고 순례길 중에서도 프랑스길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걷기 때문에 해가 항상 등 뒤에 있어서 내 긴 그림자를 밟으면서 걷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오전에만 걷기 때문에 그림자가 내 뒤로 가는 경우는 드물다.


아스팔트 길을 따라 걸어가는데, 저 멀리 언덕 위에 있는 마을 산솔(Sansol)이 보인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도 바르 하나 보이지 않는다. 가게도 간판만 있고 문은 굳게 닫혀있다. 하지만 다행히 가까운 곳에 있는 또 다른 마을 토레스 델 리오(Torres del Río)가 있어 바르에 들러 맥주를 한잔 마실 수 있었다.


들판을 걷다 보니 타이완에서 온 야자들이 검은 우산을 쓰고 가고 있다. 좀전에 역시 타이완에서 온 모녀를 지나쳐 왔는데, 이번에는 한국사람은 물론이고, 타이와 사람들도 자주 만난다. 모녀는 출발지인 생장피에드포르에서부터 눈인사 한 사이고, 여자 둘은 배낭커버에 ‘TAIWAN’이라고 쓰여 있어서 멀리서 봐도 타이와 사람인 걸 금방 알아볼 수 있다.

20240608_084018.jpg

한참 걷다 보니 언덕 아래서 누군가 기타를 치고 있고, 사람들이 여럿 모여 쉬고 있다. 가까이 가보니, 기타 치는 사람은 쉬고 있는 사람들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 혼자 있었다. 쉬는 사람들 들으라고 치는 건지, 자기가 흥겨워서 치는 건지 모르겠다. 이왕이면 사람들과 마주보며 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나는 쉬지 않고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언덕을 올라갔다.

20240608_093204.jpg

들판을 향해 계속 걷다 보니 오른쪽에도 마을이 보인다. 가까이 가 보니 그 마을이 오늘 목적지인 비아나(Viana)였다. 더 멀리 보이는 마을은 내일 지나갈 로그로뇨(Logroño)인 것 같고. 지쳐있어서 저기까지 언제 가나 걱정이 많았는데, 가까운 곳에 목적지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비아나 시내에 들어서니 거리에 사람들이 아주 많다. 마을주민들도 있지만, 어디선가 노인네들이 단체로 구경 온 듯, 명찰까지 목에 건 사람들이 골목마다 누비고 다닌다. 오늘은 교회(Iglesia de Santa María)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Albergue parroquial Santa María)에서 묵으려고 성당으로 들어가 직원에게 물어보니, 공립알베르게(Albergue de peregrinos Andrés Muñoz)로 가라고 한다. 지금은 교회 알베르게를 운영하지 않나 보다.

20240608_104656.jpg

마을 끝에 있는 공립알베르게에 도착했는데, 오픈시간이 1시간이나 남아있다. 알베르게 입구에 낮 12시에 오픈이라고 써있어서 배낭만 입구에 내려놓고 필요한 짐만 챙겨 점심을 먹으러 갔다. 그런데 바르는 많지만 식사할 만한 곳은 없다. 이리저리 기웃거리다가 중국사람들이 운영하는 것 같은 식당에 들어가 오렌지주스와 베이컨 샌드위치를 주문했는데, 맛도 별로고 입맛도 없어서 조금 먹다가 나와버렸다.

20240608_105509.jpg

마트에 들러 물 한병을 사고 알베르게로 돌아와 오픈시간까지 기다렸더니 12시 조금 전에 직원이 와서, 오늘은 첫번째로 침대를 배정받았다. 샤워를 한 후 오늘도 세탁기를 돌리고(3유로), 건조까지(2유로) 마쳤다. 알베르게 구조상 빨래를 실내에서 말려야 해서 언제 말릴 수 있을지 염려가 된 데다 건조기 사용료가 비교적 저렴해서다.

20240608_115848.jpg

알베르게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5시 반이 지나 저녁거리를 준비하러 밖으로 나갔는데 비가 내린다. 우산을 갖고 갈 정도는 아닌 것 같아 이리저리 돌아다녔지만 먹을 만한 게 마땅치 않다. 낮에 봤던 훈제통닭 파는 마트는 토요일이라 오후 2시에 이미 문을 닫은 상태였고, 그나마 문이 열려있는 조그만 가게들은 빵과 과자 위주로 팔고 있었다. 이러다가 저녁을 굶을 것 같아 문이 열려 있는 바르에 들어가 돼지고기 튀김과 토르티야로 저녁을 먹었다. 그래도 내일아침 식사는 구하지 못했기 때문에 로그로뇨까지 10km쯤 걸어가서 아침을 먹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일기예보를 보니 내일 오전까지 비가 온다고 하니 꽤 귀찮게 됐다.

20240608_175931.jp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제6일, 에스테야에서 로스 아르코스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