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9일(일)
엊저녁에는 숙소 바로 옆 공터에서 록밴드가 시끄럽게 공연하고 있는데도 9시쯤 침대에 누워 곧바로 잠이 들었다. 엄청 쿵쾅거리는 데도 자장가처럼 들렸으니 좀 신기하긴 하다.
오늘 아침에는 처음으로 알람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앞 침대 여자가 먼저 일어나긴 했지만 워낙 조용하게 움직여서 짐을 쌌는지도 몰랐다. 짐을 다 챙겨 들고 식당으로 가니 거기에 좀전 그 여자가 아침을 먹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어제, 오늘아침 식사를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로그로뇨까지 2시간 정도 걸어가서 먹어야 한다. 어제가 토요일이라 마트가 오후 2시에 문을 닫는다는 걸 모르고 너무 늦게 나갔다가 미처 아침준비를 하지 못했다.
결국 다른 날보다 20분 정도 일찍 출발하게 됐다. 어제 내리던 비가 그쳐있었지만 배낭커버를 씌우고 비옷도 꺼내기 쉬운 곳에 뒀다. 밖이 조금 어두워 방향잡기가 쉽지 않았지만, 눈을 부릅뜨고 사방을 살피며 걸었다.
비르헨 데 쿠에바스 예배당(Ermita de la Virgen de Cuevas)을 지나는데 어디선가 개 짖는 소기가 들린다. 벽화가 있길래 사진을 찍고 있으니 조명등이 자동으로 켜진다. 원색으로 그려진 그림인데, 의미는 잘 모르겠다.
1시간쯤 걸어 라 리오하 자치지방(Comunidad Autónoma de La Rioja) 경제에 다다랐을 무렵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숲속 나무 밑에서 비옷을 꺼내 입고 라 리오하 자치지방으로 접어들자 비가 더 많이 내린다. 그리고 여기부터는 순례길 표지석도 바뀌어 있지만 그 의미는 잘 모르겠다.
스페인에는 17개 자치지방(Comunidad Autónoma)이 있고, 50개 주(provincia)를 포함하고 있는데, 프랑스길은 그중에서 나바라와 라 리오하, 카스티야 이 레온과 갈리시아 등 4개 자치지방을 지난다. 그런데 지금 지나는 라 리오하 자치지방은 좀 애매한 위치에 있는 것 같다. 카탈루냐나 갈리시아 같은 지방색이 뚜렷한 자치지방을 제외하면, 나바라는 파이스 바스코(País Vasco)와 함께 바스크지방(Euskal Herria= Vasconia)에 속하고, 남부지방을 말고는 대부분 카스티야 지방에 속하는데, 라 리오하만 따로 노는 것 같다. 하긴 북쪽으로 가면 칸타브리아(Cantabria)와 아스투리아스(Asturias) 자치지방도 있긴 하다.
라 리오하 자치지방은 와인으로 유명한 곳이어서 그런지 초입부터 포도밭이 늘어서 있다. 나바라지방에서도 포도밭을 많이 지나오긴 했지만, 더 많아진 느낌이다. 라 리오하 지방에서 오래 전부터 포도를 재배해서 와인을 생산하고 있었지만,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것은 1850년대 이후부터라고 한다. 이 무렵 프랑스의 보르도를 포함한 많은 와인산지들이 곰팡이균의 피해를 입어 생산량이 급감하자, 새로운 대안으로 찾은 곳이 바로 이곳 라 리오하지방이라고 한다. 그때부터 고급와인을 생산하게 되고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비에 젖은 돌로 포장된 도로를 따라 구시가지를 걸어가는데, 온갖 깃발이 매달려 있다. 나중에 알아보니 중세축제가 있었다고 한다.
출발한지 2시간 반 만에 로그로뇨의 작은 바르에 들어가 아침으로 샌드위치와 오렌지주스를 먹었다. 화장실에 다녀온 후 맥주도 한잔 더 하려고 했더니 아직은 맥주 팔 시간이 아니라고 한다. 시간제한이 있었나? 오늘 처음 알게 됐다.
다시 비옷을 입고 오늘 목적지인 나바레테(Navarrete)로 걸어가는데, 로그로뇨를 벗어날 무렵 빨간색 벽면의 기아차 대리점이 보인다. 기아차 색깔이 빨간색이었나? 어제 빨간색 스포티지를 보긴 했지만, 기업색깔이 빨간색인줄은 미처 몰랐다. 아무튼, 이런 곳에서 기아차 대리점을 본다는 것도 마음 흐믓하다.
10시쯤, 하얀 수염에 역사 하얀 머리카락을 한 노인이 앉아 과일과 음료를 팔면서 도장을 찍어주고 있는 곳을 지났다. 나도 기념도장을 하나 찍으려고 배낭을 내려놓고 순례자여권을 꺼냈지만, 앞사람들의 대화가 너무 길어 도장 받는 걸 포기하고 배낭을 챙겨 계속 걸었다.
나바레테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언덕 위에 검은 황소입간판이 보인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스페인 주류회사 오스본(Osborne)이 베테르노(Veterno)란 브랜드를 광고하기 위해 1956년부터 고속도로 주변에 세운 광고입간판으로, ‘Toro de Osborne’으로 불린다고 한다. 이 입간판은 한때 철거될 뻔 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Osborne’ 글자를 지우고 고속도로에서 125m 이상 거리를 두는 조건으로 유지가 허용됐고, 지금은 스페인을 상징하는 심벌로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11시쯤 나바레테에 도착해 공립알베르게(Albergue de peregrinos de Navarrete)를 찾아갔는데, 내 앞에 걸어갔던 많은 순례자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다른 알베르게로 갔거나 다른 마을로 간 것 같다. 알베르게 입구에 오후 1시부터 문을 연다고 써있어서 시간도 보낼 겸 점심을 먹으로 거리로 나갔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순례자메뉴 간판을 보고 식당으로 들어갔더니 18유로란다. 그런데, 가격에 비해 음식이 별로다. 야채수프를 그런대로 맛이 괜찮았지만, 메인으로 시킨 닭고기는 삶은 뒷다리 하나와 튀김감자가 전부였다. 뒷다리 살도 너무 퍽퍽하고 튀김감자도 너무 목이 메어서 도저히 못 먹겠다. 디저트로 카스텔라를 줬는데, 그 또한 생소하다. 식당을 나와 알베르게로 돌아오는 길에 주위를 살펴보니 14유로짜리 순례자메뉴들이 더러 있다. 저녁에는 다른 곳을 찾아봐야겠다. 순례자메뉴는 구성이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비싸다고 좋은 건 아닌 것 같다.
알베르게 입구 나무벤치에 앉아 30분이나 남은 오픈시간까지 동영상을 보면서 있으려고 했는데, 문이 열리며 직원이 들어오라고 한다. 얼른 들어가서 접수를 끝내고 침대로 돌아가 샤워부터 하려는데 먼저 온 순례자들이 있다. 잠시 기다렸다가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을 보니 한국여자 둘이다. 오늘 처음 보는 사람들인데, 나보다 먼저 순례를 시작했지만 하루에 조금씩 걷기 때문에 오늘 여기까지 온 거라고 했다. 특히 오늘은 로그로뇨에서 10km 남짓 걸어서 이곳에 도착했다고 한다.
잠시 얘길 나누다가 저녁을 같이 해서 먹기로 하고 마트에 장을 보러 나갔다. 둘은 1984년생 동갑으로 며칠 전에 만나 함께 걷는 거라고 했다. 저녁에 같이 해서 먹을 것과 내일아침에 각자 먹을 걸 사서 알베르게로 돌아오다가 옆에 있는 바르에서 생맥주를 한잔씩 하면서 다시 얘기를 이어갔다.
한 친구는 1948년생 아버지(어머니는 10년전에 돌아가셨다고 한다)를 모시고 사는 유튜버(맛짱진세)로 미혼이고, 다른 친구는 결혼한지 이제 2주 밖에 되지 않은 새댁으로, 신혼여행을 겸해서 남편과 함께 여기까지 왔다가 남편은 일정 때문에 먼저 돌아가고 혼자 걷다가 새 친구를 만난 거라고 했다. 또한, 지금은 직장을 잠시 그만두고 이직을 준비 중이라고도 했다.
저녁은 맛짱진세가 마트에서 장을 봐다 해먹기로 했었는데, 마트에 마땅한 재료가 없어 오늘도 결국 즉석식품을 사다가 전자레인지에 데워먹었다. 그래도 다양한 과일도 있고 즉석식품도 여러 가지를 놓고 나눠 먹으니 다른 때와 비슷하면서도 더 풍성한 저녁식사를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