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일 나바레테에서 아소프라까지

by 이흥재

2024년 6월10일(월)


오늘은 나헤라(Nájera)까지 16.6km 걷기로 계획했던 날이다. 그런데 어제 만난 한국여자들이 오늘 아소프라(Azofra)까지 걸을 거라고 했다. 전날 로그로뇨에서 나바라테까지 12.4km 걸어왔다는 두 여자가 아소프라까지 가겠다는데, 내가 조금 밖에 안 걷는다면서 놀릴 정도였다. 게다가 부르고스에 입성하는 날 25km 이상 걸어야 해서 부담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어떡하지? 그래서 급하게 일정을 다시 조정하기로 했다. 관건은 머물려는 마을에 알베르게가 있느냐였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다행이 알베르게들이 있었다.


그렇게 조정한 행선지는 오늘 아소프라, 내일 그라뇽(Grañón), 모레 토산토스 (Tosantos), 그리고 다음날은 아헤스(Agés)나 아타푸에르카(Atapuerca)로 하면 부르고스까지 가는 날 20km 정도만 걸으면 될 것 같다. 아니, 지난번에는 아헤스에서 묵었으니 이번에는 아타푸에르카에 머무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 그 거리는 2.5km에 불과하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부담을 줄려 부르고스에 입성하는 것으로 해야겠다.


그렇게 일정을 조정해놓고 평상시와 같이 5시 반에 일어났는데, 두 여자는 벌써 출발하고 없었다. 짐을 싸들고 식당으로 내려가 배낭을 정리한 후 엊저녁 맛짱진세가 싸놓은 바게트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는데, 맛은 괜찮지만 바게트가 딱딱해서 많이 못 먹겠다. 속에 있는 것만이라도 꺼내 먹으려니까 그냥 먹기엔 너무 짜다. 결국 조금 먹다가 그만뒀다.


배낭을 메고 알베르게를 나와 서성거리고 있으니까 지나가던 마을주민이 성당 옆으로 가면 된다고 알려준다. 약간의 경사로를 올라 왼쪽으로 걸었다.아직은 해가 뜨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길이 안 보일 정도는 아니어서 노란 화살표를 따라 걸어갔다.


라 리오하 지방이 와인으로 유명해서 그런지 길 양옆으로 포도밭이 많다. 만약 가을에 왔다면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달린 풍경을 봤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여기 포도는 여느 포도보다 알맹이도 작고 덜 달 것 같지만, 심심풀이로 한알씩 먹을 정도는 된다. 그리고 가을이면 또 하나, 산딸기와 무화과를 꽤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요즘도 지나오면서 보면 길 옆에 무화과나무들이 아주 많은데, 아직은 열매조차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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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6시45분, 먼저 떠난 두 여자를 만났다. 일출구경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뒤돌아보니 마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우연히 만난 두 여자들은 서로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말로는 언제 다시 헤어질지 모른다고 했지만 꽤 오래 같이 걸을 것 같아 보인다. 그들도 오늘 아소프라까지 걷는다고 했으니, 숙소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먼저 그들을 지나쳐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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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토사(Ventosa) 마을로 들어가는데, 길가에 옷핀 같은 조각품을 여러 개 세워놓았다. 알 수 없는 사진도 몇 점 보인다. 나름대로 이벤트를 하는 것 같은데, 그 의미를 모르니 좀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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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7시40분쯤 벤토사의 바르에 들러 부족했던 아침식사를 먹고 바르를 막 나서려는데 두 여자가 바르로 들어왔다. 그러고 보면 꽤 빨리 걸어온 셈이다. 하지만 그 후로 지금까지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아소프라에 머물 거면 공립알베르게(Albergue de peregrinos de Azofra)로 올 것 같은데, 아직은 도착하지 않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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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나헤라 직전에서 담벼락에 써있는 시를 만났다. ‘Poema del Camin (순례길의 시)’이란 시로, 아소프라의 교구사제였으며 2018년 4월 86세로 숨진 에후헤니오 가리바이 바뇨스(Eugenio Garibay Baños) 신부가 썼다고 한다. 그는, 순례길의 상징인 노란 화살표를 고안해내고 순례길 연구와 정비에 힘썼던 엘리아스 발리냐 삼페드로(Elías Valiña Sampedro)의 든든한 후원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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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a del Camin 순례길의 시


Polvo, barro, sol y lluvia 먼지, 진흙, 태양과 비
es Camino de Santiago. 그것이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Millares de peregrinos 수많은 순례자,
y más de un millar de años. 수많은 세월의 길.


Peregrino ¿Quién te llama? 순례자여, 누가 그대를 부르는가?
¿Qué fuerza oculta te atrae? 그대를 이끄는 알 수 없는 힘은 무엇인가?
- Ni el campo de las Estrellas 별들의 들판 콤포스텔라,
ni las grandes catedrales. 위대한 대성당.
No es la bravura Navarra, 나바라의 용기,
ni el vino de los riojanos 리오하의 와인,
ni los mariscos gallegos, 갈리시아의 해산물,

ni los campos castellanos. 카스티야의 들녘도 아닐 진데.


Peregrino ¿Quién te llama? 순례자여, 누가 그대를 부르는가?
¿Qué fuerza oculta te atrae? 그대를 이끄는 알 수 없는 힘은 무엇인가?
- Ni las gentes del Camino 순례길의 사람들,
ni las costumbres rurales. 시골마을의 정취.
No es la historia y la cultura, 역사와 문화,
ni el gallo de la Calzada 칼사다의 수탉,
ni el palacio de Gaudí, 가우디의 궁전,
ni el castillo Ponferrada. 폰페라다의 성도 아닐 진데.


Todo lo veo al pasar, 걸으며 지나치는
y es un gozo verlo todo, 이 모두가 기쁨이라도
mas la voz que a mí me llama 나를 부르는 목소리는
la siento mucho más hondo. 더 깊은 곳에 있다네.
La fuerza que a mí me empuja 나를 밀어주는 힘,
la fuerza que a mí me atrae, 나를 이끄는 그 힘
no sé explicarla ni yo. 그것은 설명할 수 없는 것.
¡ Sólo El de arriba lo sabe ! 오직 그분만이 아시리!


나헤라 마을을 가로질러 10시쯤 마을 끝에 있는 바르에 들러 맥주를 한잔 마시고 밖으로 나왔는데, 길이 헷갈려 왔던 길을 다시 한바퀴 돌고 말았다. 걷는 길이 낯익어 무슨 일인가 했더니 지나갔던 길을 다시 걷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느라고 약간의 시간을 허비했지만 어쩔 수 없다.


나헤라에도 알베르게는 많지만, 오늘 목적지가 아소프라이니 다시 언덕을 넘기 시작한다. 앞서 걷던 순례자들을 하나 둘 따돌리고 아소프라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내가 가장 앞에 있었다. 마을 끝에 있는 공립알베르게를 찾아갔는데, 아직은 문이 닫혀있다. 입구에는 오후 1시에 문을 연다고 써있다. 대체로 공립(municipal) 알베르게는 사설(私設 privado)에 비해 문을 늦게 여는 편이다. 사설 알베르게는 오전 10시에도 문을 열기도 하는데, 공립은 오후 1~2시에 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도 공립이 숙박비가 더 싸고, 예약하는 불편함 없이 선착순으로 침대를 배정받을 수 있어서 자주 이용하게 된다.


문을 열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순 없어서 배낭을 입구에 내려놓고 가까운 식당으로 가서 순례자메뉴를 주문하려고 했지만, 오후 1시부터나 가능하고 지금은 파에야만 먹을 수 있다고 해서, 대신 오렌지주스와 계란 샌드위치를 먹었다. 그러면서 저녁에는 몇 시에 순례자메뉴를 먹을 수 있냐고 물었더니 오후 6시부터 가능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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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에서 나와 마트에 들러 물을 한병 사서 다시 알베르게도 돌아와 입구에 앉아있으니 12시 반쯤 직원이 나와서 문을 열어준다. 같이 앉아있던 여자순례자 먼저 접수하고 내가 두번째로 침대를 배정받았다. 그런데 이곳은 방구조가 독특하다. 한방에 단층침대가 2개 뿐이다. 요금이 15유로이긴 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이런 조건이면 20유로 이상일 거다. 전체 수용인원이 60명이라는데, 만약 순례자 숫자가 그보다 적으면 독방을 쓸 수도 있겠다.


샤워하고 빨래까지 마친 다음 마트로 가서 내일아침에 먹을 파에야와 음료수를 한병 사왔다. 이곳은 세탁비가 엄청 비싸다. 세탁기와 건조기가 각각 5유로씩이나 한다. 다른 곳에서는 2가지 합쳐야 5유로인 곳도 있는데. 시간도 이르고 날씨도 괜찮을 것 같아 손빨래를 해서 널었다. 저녁 때까지 안 마른다면 빨래건조대를 실내로 들여놔서 내일아침까지 말릴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저녁에는 다시 만난 한국여자 둘과 함께 7시쯤 식당으로 가서 나는 순례자메뉴(18유로)를 먹고, 그녀들은 파에야를 주문해서 먹었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맛짱진세는 내일 그라뇽 다음 마을인 레데시야 델 카미노 (Redecilla del Camino)까지 가겠다고 하고, 다른 여자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고 해도 가능하면 맛짱진세와 같은 곳까지 갈 수도 있겠다고 해서 오늘로써 작별하고 다음에 만날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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