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일. 아소프라에서 그라뇽까지

by 이흥재

2024년 6월11일(화)


아침에 일어나서 출발준비를 하는데, 희경이도 준비하고 있었다. 그동안은 나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서 먼저 출발하곤 했었는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게다가 나보다 한 마을 더 가겠다고 했었는데. 그나마 맛짱진세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다. 알아서들 하겠지.


어제 사다 놓은 파에야를 먹으려는데 맛이 없다. 그동안 사 먹은 파에야와는 맛이 다르다. 용기가 다른 걸 사긴 했어도 이렇게 맛이 없을 줄은 몰랐다. 결국 조금 먹다가, 어제 사온 납작복숭아 중 맛짱진세와 희경이한테 1개씩 주고, 1개는 내가 먹는 걸로 아침을 대신했다.


짐을 챙겨 제일 먼저 알베르게 밖으로 나온 시간이 6시6분. 주위를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만 밝아있다. 노란 화살표를 찾느라 약간 신경 쓰였지만 큰 문제 없이 들판으로 접어들었다. 여기는 산도 거의 없고 들판만 이어져 있어서 걷기엔 수월하지만 조금 지루하긴 하다. 하긴 완벽한 게 어디 있을까. 이 길도 오래 걸으면 힘들긴 마찬가지다.


포도밭도 지나고 밀밭과 보리밭 등 다양한 들판을 지난다. 첫 마을인 시루에냐(Cirueña)에서 아침식사를 보충하려고 했는데, 2시간쯤 걸어 마을에 도착했지만 문을 연 바르가 없다. 알베르게 간판도 여럿 보이고 바르도 있긴 하지만, 사람이 살지 않는 마을처럼 너무 조용하다.


결국 쉬지도 못하고 다음 마을인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Santo Domingo de la Calzada)까지 5.8km 더 가야 한다. 언덕을 넘은 8시30분부터 저 멀리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가 보이긴 하지만 아직은 한참 동안 더 가야 한다.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에 도착했을 무렵 또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급하게 배낭을 내려놓고 배낭커버를 씌웠다. 비옷까지 입을 정도는 아니어서 그냥 걷기로 했다. 그리고 마을입구에 있는 바르에 도착한 시각이 9시20분이니 보이는 곳에서부터 50분이나 걸어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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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배낭을 메고 바르를 나서는데 비는 계속 내린다. 그래도 쏟아지도록 내리는 것은 아니어서 시원하게 맞을 만하다. 닭의 전설을 있는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 대성당(Catedral de Santo Domingo de la Calzada)을 지나 작은 돌로 포장된 도로를 따라 마을을 벗어난다. 1917년 지어졌다는 예배당(Ermita del Puente)을 지나 다리를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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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릭스티누스 서책(Codex Calixtinus )> 제2권 기적(Libro de los milagros)의 다섯번째 이야기에 이런 내용이 있다. “한 독일청년이 부모님을 모시고 순례하던 중 이곳 여관에 머물게 됐다. 이 여관집 딸이 잘생긴 청년을 유혹했지만, 청년은 그 유혹을 거절했다. 그러자 그녀는 앙심을 품고, 교회의 은잔을 청년의 가방에 숨겼다. 다음날 체포된 청년의 가방에서 은잔이 나왔고, 청년은 교수형을 당해 효시(梟示)됐다. 그들의 부모는 계속 산티아고로 갔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이곳에 들르게 됐는데, 아들은 효시된 채로 살아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산토 도밍고가 어깨로 그를 떠받쳤다고 한다. 청년의 부모는 영주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렸다. 그때 마침 구운 닭으로 식사하려던 영주는 ‘만일 당신의 아들이 살아있다면 이 식탁의 구운 닭도 살아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닭이 꼬꼬댁 하며 날아서 도망갔다.” 지금도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 대성당 안에는 이 전설에 등장하는 닭의 후손이 살고 있는 닭장이 있으며, 청년의 고향으로 알려진 독일의 빈넨덴과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는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고 한다.


다시 들판으로 이어지는 길. 그러다가 언덕을 넘는데 씩씩한 여자순례자 셋이 나를 지나쳐간다. 힘들 텐데도 발걸음이 아주 가벼워 보인다. 나도 남들이 보기엔 그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엄청 힘들게 한발씩 옮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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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그라뇽 마을이 보인지 10분만에 마을입구에 도착했다. 간이매점이 있었지만, 마땅히 먹을 만한 게 없어서 그냥 지나쳐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우선 알베르게에 들러 짐을 맡겨놓고 나오려고 찾고 있는데, 마을여자가 나를 성당으로 안내해줬다. 인터넷에는 오후 1시에 문을 여는 곳(Albergue parroquial San Juan Bautista)이라고 해서 공립알베르게(Albergue La Casa de las Sonrisas, 낮12시에 문을 연다고 돼있다)로 가려고 했었는데, 얼떨결에 얼떨결에 성당으로 따라 들어가니 바로 접수해줬다. 침대 없이 매트만 깔아놓아 조금 허접하긴 해도 일단 샤워부터 마친 다음 빨래까지 해서 널었다. 이런 곳까지 순례자들이 올까 생각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매트가 꽉 찼다. 저녁에 조금 시끄럽지 않을까 염려는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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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가 조금 지나 점심을 먹기 위해 밖으로 나간 길에 먼저 약국부터 들렀다. 진통제를 하나 사니 5유로가 넘었다. 한국보다 비싸긴 해도 괜찮은 가격 같았다. 식당으로 가서 진열돼있는 음식 중에 돼지고기와 닭고기를 하나씩 주문하고, 오렌지주스도 한잔 시켰다. 시원한 물도 한잔 마시고 싶었지만 달라고 해봐야 수돗물이나 줄 것 같아서 그만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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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에 가려다가 비가 와서 곧바로 알베르게로 돌아왔는데, 순례자들이 계속 들어온다. 그중에 희경이도 있다. 다음 마을까지 간다고 했고, 이곳 시설이 너무 열악해서 가기 싫다고 했었는데, 웬일이야!


좁은 숙소에 순례자들로 가득 찼다. 낮에 접수하면서 직원이 보여준 쪽지에 따르면, 오후 5시 반부터 다함께 저녁식사 준비를 하고 7시에 예배를 본 후에 8시부터 저녁식사를 한다고 돼있었다. 그리고 그때는 그저 그런가 보다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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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부터 마트가 다시 문을 연다고 했고, 와이파이도 쓸 겸 바르로 나갔다. 그런데, 와이파이 연결이 안된다. 무료와이파이가 있긴 한데 사용시간이 30분으로 제한돼있었다. 그 시간은 좀전에 점심 먹으며 다 썼기 때문에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처음 접하는 시스템이다. 되면 되고 안되면 안되는 거지, 시간제한은 또 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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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에 저장된 동영상을 보다가 5시 반쯤 마트를 찾으러 거리로 나갔는데, 어디가 마트인지 모르겠다. 마침 길에 나온 마을주민한테 물어보니 바로 앞에 있는데, 문이 여전히 닫혀있다. 가게 앞에 붙여놓은 안내문에는 평일 오후 5시에 문을 연다고 돼있는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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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알베르게로 돌아갔더니 순례자들이 모여서 저녁에 먹을 음식재료를 손질하고 있었다. 그 광경이 재미있어 사진을 찍고 있으니까 맛짱진세가 같이 참여하지 않는다며 장난을 걸어왔다. 옥신각신하다 결국 칼을 잡긴 했지만, 그 사이 재료손질은 끝이 났다. 어쩔 수 없이 휴지로 테이블을 닦는 걸로 봉사활동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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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모든 순례자가 예배 보러 갔지만 나는 따라가지 않았다. 직원이 싫다고 했더니, 그러라고 해서다. 동영상을 보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예배 보러 갔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고 저녁식사가 시작됐다. 처음엔 수프라도 있나 기대했지만, 좀전에 손질했던 감자와 당근을 오븐에 굽고 양상추를 비롯한 토마토를 섞은 샐러드와 바게트가 식사의 전부였다. 그래도 다들 열심히 잘 먹었다.


그런데 무슨 말들이 그렇게 많은지 식사가 끝나질 않는다. 이번에도 도중에 양치한 후에 숙소로 올라갔는데,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다시 기도하러 간다고 했지만, 숙소에 그냥 앉아있었다. 기도를 마치고 온 후에도 설거지 한다고 또 시끌벅적이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시끄러운 소리를 한참 동안 듣다가 잠이 들었다. 잠자다 말고 추워서 일어나 화장실에 다녀온 후 패딩을 입고서야 편안하게 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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