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일, 그라뇽에서 토산토스까지

by 이흥재

2024년 6월12일(수)


오늘 아침에는 알베르게에서 식사를 준비한다고 해서 대부분의 순례자가 7시 이후 출발한다고 했지만, 나는 5시 반에 일어나 출발준비를 했다. 그런데 늦게 출발할 거라던 희경이는 벌써 일어나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했더니, 그냥 눈이 떠져서 일어나 있는 거라고 했다. 기다렸다가 아침을 먹고 출발할 거라고 해서 나혼자 6시 조금 전에 알베르게를 나왔다.


언제나처럼 길이 보일 정도의 밝이여서 걷는 데는 지장이 없다. 하지만 작은 마을을 빠져 나오는 동안 마을주민은 하나도 만날 수 없었다. 하긴 당연하긴 하다. 이른 시간에 돌아다닐 사람이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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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빠져 나오자마자 순례길은 들판으로 이어진다. 뒤돌아보니 산중턱에 붉은 빛은 보이지만 구름이 많아서 오늘은 해가 떠오르는 걸 보기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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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한지 30분만에 라 리오하와 카스티야 이 레온 자치지방(Comunidad Autónoma de Castilla y León) 경계에 도착했다. 그런데 경계표시가 있긴 해도 자연이 달라진 건 거의 없다. 포도밭이 없는 것 말고는 밀과 보리가 자라는 들판은 똑같다. 우리나라는 주로 강이나 산으로 지역경계를 정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곳은 임의로 땅을 잘라서 경계표시 해놓은 게 전부인 것 같다. 그렇게 오늘부터는 카스티야 이 레온 자치지방의 부르고스 주(Provincia de Burgos)를 걷게 됐다. 카스티야 이 레온 자치지방에는 9개 주가 있는데, 프랑스길은 그중 부르고스 주와 팔렌시아 주(Provincia de Palencia), 그리고 레온 주(Provincia de León)를 차례로 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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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부르고스 주에서 처음 만나는 레데시야 델 카미노 마을이 저 멀리 보인다. 하지만 걸어가야 할 거리는 꽤 멀다. 그렇게 들판을 오르내리며 걷다가 새로 건설하고 있는 다리까지 왔는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빗방울인지도 모르게 조금씩 내리다가 이내 좀더 굵어진다. 옷은 조금 젖어도 상관없지만, 배낭이 젖으면 관리하기 어려우니 얼른 배낭커버를 씌우고 다시 걷는다.


출발한지 2시간이 채 안돼 레데시야 델 카미노에 도착했지만, 너무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문을 연 바르는 보이지 않는다. 드문드문 알베르게 창문을 통해 순례자들의 아침식사 하는 모습이 보일 뿐이다. 하지만 다음 마을까지는 가까우니 실망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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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데시야 델 카미노를 지나면서 순례길은 자동차도로와 나란히 이어지기 때문에 양쪽으로 달리는 화물차 소리가 매우 시끄럽다. 순례길과 자동차도로가 떨어져 있고 그 사이에 가드레일도 설치돼있지만 차가 지나갈 때마다 신경이 쓰인다.


다시 언덕을 올라 오전 7시쯤 두번째 마을인 카스틸델가도(Castildelgado)에 도착했는데, 100m 떨어진 곳에 바르가 있다는 화살표가 보인다. 다른 때 같으면 그냥 그냥 지나쳤겠지만, 오늘은 아침식사를 해야 하니 바르까지 걸어가서 크루아상 2개와 오렌지주스를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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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순례길을 계속 걸어 빌로리아 데 리오하(Viloria de Rioja)와 비야마요르 델 리오(Villamayor del Río) 마을을 차례로 지나 9시30분쯤 벨라라도(Belorado) 마을 초입에 다다랐는데, 알베르게(Albergue A Santiago) 입구에 다른 나라 국기들과 함께 태극기도 힘차게 펄럭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시내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벨로라도에서 묵는다고 해도 이곳을 선택하긴 어렵겠다. 더구나 오늘은 벨로라도를 지나 토산토스에서 묵기로 계획했기 때문에 아쉬움 없이 지나간다.


10여분 남짓 더 걸어 벨로라도 시내에 있는 바르에 들어가 두번째 휴식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 이전 마을에서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비얌비스타 마을이 알베르게(Albergue de peregrinos San Roque en Villambistia)에 대한 정보를 찾아봤는데, 임시휴업(Cerrado temporalmente)이라고 한다. 가 보면 사정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모험할 수는 없으니 오늘은 토산토스에서 묵는 것으로 결정했다.


토산토스로 가는 길에 세워진 표지석을 보니 산티아고까지 554.6km라고 돼있다. 하지만 매일 정해진 거리를 걷고 있기 때문에 산티아고 도착은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다. 또한 거리표시가 정확하다고도 할 수 없으니 그저 그렇겠지 하면서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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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던 검은 구름이 없어지고 파란하늘과 함께 하얀 구름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조금씩 뜨거워진다. 요즘 날씨는 종잡을 수가 없다. 흐리거나 비가 오면 겨울날씨처럼 춥다가도 햇볕이 나면 한여름처럼 바로 뜨거워진다. 이러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큰 낭패이니 조심해야겠다.


11시11분, 토산토스 마을 초입에 있는 성당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Albergue parroquial San Francisco de Asís)에 들어갔더니 직원이 접수하면서 이런저런 안내를 해준다. 상황을 보니 어제 묵었던 성당과 아주 비슷한 시스템이었다. 잠자리가 매트인 것도 똑같다, 한참 설명을 듣다가 궁금한 게 있어 물어보니 가장 시급한 세탁기가 없고, 와이파이도 안되는 것 같았다. 어제 손빨래를 하다 보니 빨래도 제대로 안됐거니와 널었는데도 마르질 않아 비닐봉지에 담아왔기 때문에 오늘은 필히 세탁기를 돌려야만 했다.


양해를 구하고 성당 알베르게를 나와 다른 알베르게(Albergue Los Arancones)를 찾아갔는데, 문이 닫혀있다. 인터넷 정보로는 이 시간에 열려있어야 하는데 무슨 일이지? 근처에 있는 바르로 찾아가 사정을 얘기했더니 자기도 잘 모르겠단다. 어쩔 수 없이 알베르게로 돌아가긴 했지만, 점심시간도 되어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모르겠다. 다시 바르로 가서 얘기했더니 조금 전에 알베르게 주인이 장을 봐서 갔으니 따라가보라고 했다.


그렇게 다시 알베르게로 돌아갔더니 문이 열려있다. 주인여자를 만났는데, 접수도 하기 전에 침대배정부터 해줬다. 처음엔 구석진 곳에 있는 침대를 쓰려고 했는데, 가운데 침대에만 콘센트가 있어 급하게 그곳으로 자리를 바꿨다. 알베르게에 일찍 도착하면 이런 점이 좋다. 내가 제일 좋은 조건의 침대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것. 샤워한 후에 빨래를 주인에게 줬더니 세탁기를 돌려서 널어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점심을 주문했다. 이 알베르게는 식당을 겸하고 있어서 모든 식사가 가능한 곳이었다. 그런데 주문해놓고 보니 순례자메뉴 코스와 같다. 전채로 누들수프, 메인은 샐러드와 닭고기가 함께 나오고, 후식은 멜론을 그릇에 가득 담아줬다. 푸짐한 식사다. 요금은 15유로. 숙박비도 같다. 저녁에도 같은 음식을 먹을 예정이어서 오늘은 꽤 많은 지출이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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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은 후에 산중턱에 있는 예배당(Ermita de la Virgen de la Peña)엘 올라갔다. 하지만 문이 닫혀있어서 안을 볼 수 없었다. 출입문에 구멍이 있어서 들여다보니 그 안에 또 문이 있어서 안쪽 사정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어, 그냥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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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서는 와이파이가 되질 않아 식당에 앉아 동영상과 유튜브를 보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오후 7시쯤 저녁식사를 주문해서 먹었다. 점심 때와 비슷한 메뉴였지만 이번에는 수프 없이 와인과 줄을 주고, 한 접시에 샐러드와 돼지고기가 함께 나왔는데, 이전에 먹었던 음식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맛있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번 먹고 싶을 정도다. 어쩌면 지금까지 먹었던 음식 중에서도 최고였다. 점심 때도 맛있게 먹었는데, 그보다 더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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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되니 너무 춥다. 침낭만으로는 못 견딜 것 같아서 패딩을 입고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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