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15일(토)
오늘도 5시 반에 일어나 대충 씻고 배낭을 챙겨 알베르게를 나오려는데, 출입문이 잠겨있다. 지금까지 이런 일은 처음이다. 그제서야 카운터 주위를 살펴보니 오전 6시 반부터 8시까지 오픈이라고 써있다. 내 뒤를 이어 나온 다른 순례자들도 황당하긴 마찬가지다. 그중 한 순례자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드디어 나갈 수 있는 문을 찾았다. 2층으로 올라가 테라스로 나간 다음 다시 계단을 내려가니 밖으로 나가는 문이 열려있다.
밖으로 나가자마자 새벽 일찍 문을 연 알베르게 앞 바르에서 크루아상과 오렌지주스로 아침식사를 한 다음 출발하기로 했다. 가격은 3.6유로.
바르를 나와 부르고스 대성당을 지날 때까지 순례길을 잘 찾아가나 싶었지만 이내 표시가 사라졌다. 그러나 사이 뒤에 따라오던 순례자들이 다른 방향으로 가길래 얼른 뒤돌아 따라가니 순례길 표시가 하나씩 나타났다. 그리고 부르고스 대학(Universidad de Burgos)을 지나면서 시내를 벗어났다. 오늘도 가끔 현대차와 기아차가 보인다. 그런데 빨강이나 파랑 등 원색이다. 다른 차들은 원색이 많지 않은데, 이 차들은 원색이 어울리나 보다. 하긴 원색이 아닌 색깔도 물론 있다.
조금 다가 보니 501km 표지석이 보여서 가다 보면 500km 표지석도 있으려니 생각했지만, 그런 건 없었다. 며칠 전에 누군가 500km를 기념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들었다면서 내게 확인한 적이 있었는데, 나는 전혀 알지 못한다고 했었다. 가다 보면 100km 표지석은 만날 수 있지만, 500km 표지석 같은 건 아예 없다. 만약 만들어놓는다면 꽤 기념될 것 같기는 한데. 100km 표지석을 보면 온갖 낙서가 돼있고 다들 기념사진 찍기 위해 기다리는 경우가 많았다.
먹구름과 흰구름이 차례로 보이고 그 사이로 파란 하늘도 조금씩 보인다. 다른 순례자들은 반팔에 반바지 차림도 많지만, 나는 긴바지에 점퍼까지 입었어도 으스스 춥다. 그렇다고 패딩까지 입고 걷기엔 땀이 너무 많이 날 것아 조금씩 참으면서 걷는 중이다. 어떨 때는 햇볕이 나도 덥질 않다. 엊그제 한국소식을 들으니 지금 30도가 넘는 무더위가 계속되고 있는데, 이곳도 더울 텐데 어떻게 견디고 있는지 물어온 적이 있지만, 더운 것도 견디기 쉽지 않겠지만 추운 것도 참기가 쉽지 않다.
8시 반쯤 첫 마을인 타르다호스(Tardajos)에 도착했는데, 바르간판은 보이지만 문을 연 바르는 아직 없다. 이럴 때면 실망이 크다. 2시간쯤 쉬지 않고 걸어왔으면 배낭을 내려놓고 맥주 한잔 마시는 즐거움을 누리고 싶은데, 그게 쉽지 않다.
다행히 가까운 곳에 있는 다음 마을 라베 데 라스 칼사다스(Rabé de las Calzadas)에 문을 연 바르가 있어 얼른 들어갔다. 화장실부터 가려고 복도를 지나는데 벽면에 각국 순례자들 낙서와 기념품을 붙여놓은 게시판이 보인다. 이곳에도 당연히 한국관련 내용들이 많다. 태극기는 물론 지폐까지 꽂혀있다. 1천원권은 그렇다 치더라도 누군가 1만원권 지폐도 꽂아놨다. 아무리 이곳에서 쓸모 없는 돈이라지만 한국에서는 얼마든지 쓸 수 있는 화폐를 이런 곳에 놔두고 가는 사람도 대단하다. 가짜는 나이겠지!
마을을 벗어나는데 외딴집 벽면에 산티아고까지 476km란 낙서가 보인다. 좀전에 분명히 501km 표지석을 지나왔는데, 2시간도 지나지 않아 25km를 걸어왔을 리는 없다. 그러니 둘 중 하나는 분명히 틀렸다. 나중에 오늘 목적지인 오르니요스 델 카미노(Hornillos del Camino) 가게에 가보니 469km라고 돼있다. 그럼 이 거리가 맞는 건가? 아무튼, 거리표시를 볼 때마다 헷갈린다.
라베 마을을 벗어나는 곳에 있는 건물 벽면에 다양한 그림이 보인다. 간디와 만델라·아인슈타인이 나란히 있는 그림도 있고, 성경구절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도 있다. 그 사이에 조그만 예배당이 있는데, 지난번 왔을 때는 문이 열려있었고, 한글로 적어놓은 기도문도 있었는데 오늘은 문이 굳게 닫혀있다. 몇 년 사이 사정이 달라진 게 꽤 있다.
오늘도 완만한 경사를 오르는데, 길바닥이 좋지 않다. 작은 자갈들이 뒹구는 너덜길이어서 자칫 헛디디면 미끄러져 넘어지기 딱 좋다. 그리고 오르막길이라 비가 오면서 흙이나 작은 모래들은 다 씻겨 내려갔는지 자갈들만 남아있어 걷기에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길 옆으로 양귀비꽃이 만발했다. 심지어 보리밭에도 빨갛게 피어있다. 어릴 때 논이나 밭에 가면 피가 많이 자라는 걸 본적 있는데 이곳은 양귀비가 지천이다. 저걸 가공하면 마약을 만드는 원료가 된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 어느 부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곳 사람들은 관심조차 없는 것 같다. 하긴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흔한 양귀비를 누군가 관리했겠지!
오르막길을 한참 올라 평지에 이르니 앞이 탁 트이면서 찬란한 풍경이 다가온다. 그리고 아! 탄성이 절로 나온다. 그렇지만 그 뿐이다. 다시 아픈 발로 목적지까지 걸어가야 한다.
10시20분쯤 언덕 아래로 멀리 오늘 목적지인 오르니요스 델 카미노 마을이 보인다. 그렇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멀다. 급경사 내리막을 걸어야 하고 다시 평지길도 꽤 길다. 그래도 한발씩 걷다 보면 어느 샌가 마을에 다다라 있다.
이 마을에는 규모에 비해 알베르게가 많다. 그렇지만 오늘 목적지는 공립알베르게(Albergue de peregrinos de Hornillos del Camino)인데, 마을 끝에 있다. 그렇게 몇 개 알베르게를 지나 계속 걸어 갔는데도 공립알베르게가 봉지 않아 문을 열고 내다보고 있는 주민한테 물어보니 너무 지나쳐왔단다. 교회 (Iglesia de San Román Mártir) 있는 곳까지 되돌아가면 나올 거라고 했다.
주민 말대로 발길을 되돌려 알베르게를 찾아갔는데, 아직은 문이 닫혀있다. 출입문에는 12시에 연다고 써있다. 우선 배낭을 내려놓고 점심을 먹으려고 바르를 찾아갔지만, 점심식사는 12시부터 가능하단다. 어쩌지! 배고 고프니 우선 맥주라도 한잔 마셔야지. 그리고 동영상을 보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15분전쯤 알베르게로 돌아가니 그 사이 순례자들이 두엇 더 와있다.
함께 기다리고 있으니 12시에 드디어 문이 열리고 내가 첫번째로 접수대에 앉았다. 그런데 여자주인이 너무 시간을 끈다. 접수준비를 하면서 옆 사람과 쉼 없이 수다 중이다. 급한 것 같진 않은데, 접수부터 받은 후에 얘기하면 안 되나? 더구나 그 사람은 내 다음에 접수하게 될 순례자다. 나원참!
아무튼, 접수를 끝내고 숙박비 13유로와 저녁식사비 12유로를 지불하고 침대를 배정받은 다음, 샤워를 마치고 빨래를 주인에게 맡기니 4유로라고 했다. 매일 세탁기를 돌릴 수는 없지만, 앞으로는 최소한의 손빨래만 하고 이틀에 한번 꼴로 세탁기를 이용해야 할 것 같다.
다시 좀전에 들렀던 바르로 가서 10유로짜리 점심식사를 한 후에 물을 사기 위해 가게로 갔다. 마을규모가 작아서 그런지 가게도 아주 작다. 그리고 대부분이 이곳 생필품들이라 내게 필요한 건 오로지 물 뿐이다. 하나 특이한 건 가게 벽면에 세계각국 시계가 걸려있는데, 태극기와 함께 서울시간도 있다. 아, 대한민국!
유튜브를 보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 7시가 되어 식사하기 위해 식당으로 내려갔는데, 아직은 준비가 좀 덜돼있어 잠시 기다렸다가 식사를 시작했다. 자리에 앉고 보니 저녁식사를 신청한 순례자는 모두 6명이었다. 전채는 야채샐러드. 그런데, 메인메뉴도 함께 갖다 놨다. 처음에 레드와인을 한잔씩 하면서 샐러드를 먹고 난 다음 같은 그릇에 메인메뉴를 떠서 먹었다. 국물이 많은 얼큰한 요리였는데,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오랜만에 뜨끈한 국물을 먹으니 맛이 좋다. 다만, 매운 맛이 후추라서 조금 아쉽긴 했다. 후식은 복숭아와 바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