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14일(금)
어제 36명 정원의 알베르게에서 달랑 3명만 잤다. 그러니 침대 이곳저곳에 한명씩 자게 되어 잠자리에 방해되는 건 없었다. 다만, 한 남자가 화장실 가까운 침대를 정했기 때문에 화장실 다녀올 때마다 수면을 방해하는 것 같아 조금 미안했을 뿐이다.
오늘 아침에도 5시 반에 일어나 채비하고 밖으로 나왔는데, 어제만큼 춥지 않아 다행이다. 한국에서 가져온 마지막 진통제를 한알 먹고 힘차게 알베르게 문을 열고 나왔다. 아헤스는 작은 마을이라 순례길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알베르게에서 몇 걸음만 걸으면 곧바로 순례길로 이어진다.
첫 마을 아타푸에르타를 지나는데, 길 옆에 세워놓은 원시인 그림이 인상적이다. 지난번에도 아헤스에 묵었었고 새벽에 출발하면서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시간에 아타푸에르타를 지났기 때문에 그림을 선명하게 볼 수 없었는데, 오늘은 아쉬운 대로 선명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이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인류의 유적을 포함하는 고고학 유적지(Sitio arqueológico de Atapuerca)가 있다. 이곳에서는 19세기 철도노선을 건설하면서 유골이 발견됐으며,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순례길은 아타푸에르타가 끝나는 곳에서 왼쪽 산으로 올라간다. 지금까지 걸어오는 동안 평지만 걸은 날은 없다. 언제나 크고 작은 산이나 고개를 넘느라 숨차고 다리도 아팠다. 오늘도 산을 힘겹게 오르다가, 산중턱에서 일출을 보고 있는 희경이를 또 만났다. 언제나 새벽 일찍 출발하지만 아주 천천히 걷기 때문에 이제서야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그나마 맛짱진세는 아직 출발하기 전이란다. 하긴 맛짱진세가 더 빨리 걷기 때문에 알베르게에는 거의 비슷한 시간에 도착한다고 했다. 아무튼, 숙소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나는 땀을 흘리며 산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산정상에는 나무십자가가 서있다. 그리고 멀리 부르고스의 불빛이 보이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은 멀다. 앞으로 한 마을씩 지나야 한다. 산을 내려가서 걷다 보니, 정면에 마을이 보이는데 순례길은 왼쪽으로 가도록 나있다. 그 길로 따라가니 비얄발(Villalval) 마을이 나오는데, 집 몇 채가 전부인 아주 작은 마을이다. 당연히 바르 같은 건 없다.
비얄발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돌아나오니 아스팔트 도로가 시작됐다. 들길을 따라 조금 걷다 보니 왼쪽에 알베르게(Albergue Via Minera)를 홍보하는 버스가 한대 서있는데, 여러 국기들과 함께 태극기가 한가운데 그려져 있다. 딱 해가 정면에 있어서 사진 찍기가 쉽지 않았지만, 이곳저곳 옮겨 다니면서 몇 장 찍었다.
그리고 정말 얼마 가지 않아 카르데뉴엘라 리오피고(Cardeñuela Riopico) 마을 초입에 그 알베르게가 있었다. 아니, 알베르게라기보다는 바르에 가깝다. 즉, 바르를 겸한 알베르게였는데, 그곳에서 커다란 바게트 샌드위치와 오렌지주스로 아침을 먹었다. 이곳에서 파는 샌드위치는 하몽을 넣은 경우가 많은데, 오늘 먹은 샌드위치는 돼지고기가 들어있었다. 그런데 다른 음식들에 비해 너무 싱거워서 소금을 더 넣을까 하다 그냥 먹었다.
바르를 나와 포장도로를 따라 계속 걷는다. 어느 길이든 오래 걸으면 힘들고 발바닥이 아프지만, 포장도로는 노면이 평평하기 때문에 좋을 때도 있다. 산티아고까지 519km 남았다는 표지석을 지났다. 아마도 내일쯤 500km 표지석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포장도로를 한참 동안 걸어 비야프리아(Villafría)에 들어서는데 도시분위기가 물씬 난다. 하지만 호텔만 몇 개 보일 뿐 온통 공장지대라 그런지 내가 원하는 바르는 보이지 않는다. 호텔에라도 들어갔어야 하나 생각하면서 부지런히 걷다 보니 10시쯤 부르고스 초입에 있는 맥도널드까지 왔다. 그 옆에 버거킹도 있었는데, 길가에 세워놓은 버거킹 안내판을 본지 한참 지난 후였다. 안내판에는 분명 ‘2분’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자동차로 2분 거리란 거겠지? 그 거리는 얼마나 될까?
하지만 아쉽게도 맥도널드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오픈시간이 11시라서 아직 1시간이나 남아 있어서다. 버거킹으로 가보니 그곳은 한참 후인 12시 반에 오픈한다고 써있다. 이곳 음식점들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은데, 글로벌 프랜차이즈마저 이곳 시간을 맞추고 있으니 이용하기가 쉽지 않다. 아쉬운 마음에 길 건너에 있는 바르에서 맥주를 한잔 마셨다.
바르를 나와 다시 걷기 시작하는데, 발바닥이 아파온다. 느낌으로는 왼쪽 발가락에도 물집이 생긴 것 같다. 지난번 부르고스를 지날 때도 굉장히 아팠었는데, 이곳에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아픈 발을 이끌고 한발짝씩 걸어 알베르게를 찾아간다.
한참 걷다가 이 근처쯤에 알베르게가 있겠지 생각하면서, 배낭을 내려놓고 지도를 찾아보니 아직도 1km 정도 더 가야 했다. 다시 터덜터덜 걸어 알베르게 근처까지 갔다. 인터넷을 보면, 11시에 오픈하는 알베르게가 있어서 위치를 찾아봐도 어딘지 알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이 12시에 오픈하는 공립알베르게(Albergue de peregrinos Casa del Cubo y de los Lerma)를 찾아갔다.
사람들에게 물어가며 공립알베르게까지 갔는데, 아직은 11시 반이라 문이 닫혀있다. 알베르게 바로 앞에 있는 바르로 가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배낭을 알베르게 정문 옆에 둔 다음 물이라도 사려고 마트를 찾아 나섰는데, 조그만 물 1병에 1유로나 받는다. 너무 비싸다. 나중에 알베르게에 있는 자판기를 보니 0.6유로다. 진작 알아봤어야 했겠지만, 그땐 알베르게 문을 열기 전이라 어쩔 수 없었다.
알베르게 앞에서 조금 기다렸다가 낮 12시가 조금 지나면서 알베르게 문이 열리자마자 첫번째로 들어가 접수하고 침대를 배정받았다. 요금은 10유로. 샤워를 마친 오늘은 속옷과 수건만 빨고, 바지와 점퍼는 하루 더 입기로 했다. 손빨래 하기가 번거로워서다. 세탁기를 쓰면 4유로인데 매일 쓰기엔 조금 부담스럽다. 그래도 내일은 세탁기를 돌려야 할 것 같다.
빨래를 널어놓고 부르고스 대성당(Catedral Basílica Metropolitana de Santa María) 구경도 할 겸 밖으로 나갔다. 대성당 사진을 찍어봐야 제대로 나오지 않기 때문에 대성당 앞에 있는 순례자상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는데, 그 가까이에 테이블을 놓고 중년여자들이 식사하고 있어서 사진 찍기가 꽤 어렵다. 그래도 대충 몇 장 찍고 다리를 옮겼다가 다시 와서 다른 사람한테 부탁해서 인증사진도 한장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