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16일(일)
엊저녁 식사시간이 끝나고 상그리아를 만들어 먹는다면서 레드와인에 복숭아를 넣어 꽤 많이 마신 순례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하필 내 침대 바로 옆에 자면서 코를 심하게 골았다. 피곤한 탓인지, 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옆에서 한동안 잠을 잘 수 없을 정도였다.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화장실엘 가려니까 또 그 사람이 먼저 들어가는 바람에 기다려야만 했다. 다행히 오래 걸리진 않았다.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는데, 그 사람은 아직 준비가 덜 된 것 같아 내가 먼저 알베르게를 나왔다. 요즘은 아침 6시 전이라고 길을 찾을 수 있을 만큼은 밝아, 걷는데 무리가 없다.
순례길 분위기는 매일 비슷하다. 나바라지방부터 라 리오하를 지나 카스티야 이 레온 지방에 이르도록 비슷한 풍경이 이어진다. 물론, 라 리오하 지방에 포도밭이 많긴 해도 주위에 보이는 나무들이나 보리나 밀이 자라는 모습은 같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런데, 같은 지역에서도 곡식이 자란 정도가 다른 건 왜 그런지 모르겠다. 어느 곳은 아직 초록색인데, 그 옆 밭에는 누런 보리가 자라고 있다. 게다가 어떤 곳은 이미 수확을 마친 곳도 있었다.
오늘은 오랜만에 해가 떠오르는 광경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었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걷기 때문에 매번 뒤돌아봐야 하지만, 그동안은 날씨가 흐리거나 숲속을 지나느라고 해 뜨는 광경을 거의 보지 못했는데, 오늘은 운 좋게도 출발부터 들판을 걸어오면서 수시로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나중에 확인해보니 기대했던 만큼 사진이 잘 나오진 않았다.
산볼 알베르게(Albergue de peregrinos de San Bol) 근처를 지나는데, 순례길과 조금 떨어져 있어서 가볼까 망설이다 그냥 지나쳤다. 건물이 특이하고 외따로 떨어져 있어서 흥미롭긴 하지만 머물고 싶진 않았다. 사진을 붙여놓은 안내문을 보니 공동식사를 하는 것 같다. 주위에 다른 먹을거리가 없으니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오늘 처음 만난 거리표지석은 477.7km라고 써있다. 이미 지나온 오르니요스 델 카미노에서 469km라고 했고, 나중에 온타나스(Hontanas)를 지나면서 본 벽화에는 457km라고 적어놓았다. 도대체 어떻게 거리를 쟀는지 알 수가 없다.
걷는 동안 주위에 풍력발전기가 많이 보인다. 그런데, 대부분 서있는 것 같다. 일부는 아주 천천히 돌아가고. 2년전 북쪽길을 걸을 때는 어두운 밤에도 시끄럽게 돌아가는 풍력발전기 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하긴 요즘 바람이 거의 불지 않은 건 같긴 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바람이 있는 지역에 풍력발전기를 설치했을 텐데, 저 정도라면 발전할 수 있을지 의문이 간다.
오전 8시쯤 온타나스 마을 초입에 있는 알베르게를 겸한 바르에 들어가 크루아상과 오렌지주스로 아침을 먹었다. 바게트 샌드위치는 하몽이나 치즈가 들어있어서 먹기가 망설여지는데, 크루아상은 꽤 맛있었다. 바르 게시판을 보니 카스트로헤리스(Castrojeriz)와 프로미스타(Frómista)로 가는 버스시간표가 붙어있다. 아직은 괜찮지만 언젠가 버스를 타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르겠다.
온타나스를 지나 양귀비꽃이 만발한 들길을 걷는다. 그리고 계속 가다 보니 앞서 가전 순례자들도 지나치게 됐다. 아침마다 만약을 위해 진통제를 한알씩 먹고 출발하니까, 웬만한 통증은 참을 수 있어 걷는데도 많은 도움이 된다. 지금 왼쪽 발바닥과 발가락 하나가 온전치 않은데도 달리 치료할 수도 없는 처지라 아프긴 하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매일 상태를 보면서 관리해야 할 것 같다.
9시 반쯤 산 안톤 수도원 유적(Ruinas del convento de San Antón)에 도착했는데, 어디서 왔는지 순례자들이 여럿 있다. 수도원 안에 알베르게가 있긴 해도 모두 떠났어야 할 시간이다. 대부분 알베르게는 아침 8시면 모두 체크아웃 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수도원은 대부분 폐허로 남아있지만 규모가 너무 커서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니 실제로 운영됐을 당시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거주했을 것 같다.
다시 포장도로와 나란히 나있는 들길을 따라 카스트로헤리스로 향한다. 지난번 왔을 때는 포장도로를 걸었었는데, 언젠가 순례길을 추가로 조성했나 보다.
카스트로헤리스 마을 초입에 있는 성당(Colegiata de Santa María del Manzano de Castrojeriz= Iglesia de Nuestra Señora del Manzano)을 지나고 완만한 경사길을 따라 카스트로헤리스로 향한다. 중간에 오리온 알베르게(Albergue Orión) 안내판이 보이는데, 한국인이 운영해서 그런지 비빔밥·된장국·라면· 고추장은 물론 소주도 판다고 적어놓았다. 하지만 오늘 묵기로 작정한 알베르게가 따로 있어서 그냥 지나친다.
10시 반쯤 오늘 묵으려는 산 에스테반 공립알베르게(Albergue de peregrinos San Esteban)에 도착했는데, 낮 12시 반에 오픈한다고 써있다. 아직 2시간이나 남았다. 배낭을 알베르게 입구에 내려놓고 점심 먹을 곳을 찾아 나섰다. 그런데 식당에 가보니 점심식사는 오후 1시부터 가능하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토르티야와 맥주로 허기를 달래고 다시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그동안 순례자들이 몇 명 와있다. 잠시 동영상을 보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12시 반 문이 열리자마자 제일 먼저 접수를 마치고 맘에 드는 침대를 골랐다. 오늘은 샤워를 마친 다음 수건만 빨아 널었다. 나머지는 내일 알베르게에서 세탁기를 돌릴 예정이다. 특이하게 이곳엔 세탁기는 없고 짤순이만 있었다. 그것도 무료로 사용할 수 있긴 하지만, 탈수보다는 세탁이 문제다.
오후 6시쯤 저녁을 먹으려고 낮에 갔던 식당에 다시 갔더니 순례자와 마을주민들로 시끌벅적하다.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아 등심을 주문했더니 고기와 샐러드, 그리고 튀김감자를 주는데 양기 꽤 많다(사진). 추가로 준 바게트 한조각까지 다 먹고 나니 배가 너무 부르다. 최근 들어 오랜만에 배가 부르도록 먹은 것 같다.
밤 9시쯤 우연히 밖엘 나가보니 아직도 해가 지지 않았다. 너무 신기해서 얼른 사진을 한장 찍었다. 그리고 오른쪽을 보니 넘어가는 해가 보이는데 곧 사라질 것 같지 않았다. 그러니 9시 반이 돼도 밖이 훤할 수밖에 없다. 오늘은 유독 알베르게에 한국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늦게까지 시끄러운 대화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