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19일(수)
새벽 4시에 화장실에 다녀와서 다시 잠을 자려는데, 옆 침대 순례자가 계속 부스럭거리고 기침도 하면서 코까지 풀어대는 바람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 뒤척이다 잠을 자는둥 마는둥 5시15분 알람소리를 듣고 일어났다. 오늘은 다른 날에 비해 1시간 반쯤 더 걸어야 하는 날이라 조금 일찍 일어났다.
그런데, 그 시간에 거의 다 일어나 있다. 먼저 출발했는지 빈 침대도 보인다. 다른 때 같으면 짐을 싸들고 밖으로 나가 배낭을 꾸렸겠지만 오늘은 그럴 필요가 없다. 그래도 최대한 조심하면서 배낭을 싸서 밖으로 나왔다.
다른 날보다 조금 이른 시간인데다 안개가 자욱해서 더 어둡다. 그래도 시내엔 가로등이 있으니 길 잃을 염려는 없다. 그런데도 길을 잃어버렸다. 한동안 화살표를 찾지 못하고 짐작대로 걸어가다 표지판을 만난 후 갈림길에서 다시 표지판을 놓치고 말아 엄한 일로 한동안 가다가 아무래도 이상해서 되돌아왔다.
좀전에 지나친 갈림길까지 다시 와서 자동차도로 건너편을 보니 그곳에 순례길 표지판이 보인다. 낮이면 충분히 찾았겠지만, 오늘처럼 어두워 주위를 분간하기 어려우면 가끔 이런 실수를 하게 된다. 쭉 뻗은 자동차도로 옆길을 따라 따라 걸어갔다. 오늘은 첫 마을이 거의 4시간 거리라 긴장이 됐다. 새벽에 출발해서 아침식사도 하지 못하고 오래 걷는 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안개 낀 순례길을 따라 걸어가는데, 자동차도로와 분리돼있기도 하고 차량통행도 많지 않아 안전하게 걸을 수 있었다. 오늘도 도로는 직선으로 뻗어있다. 그런데 7시20분쯤 푸드트럭을 만났다. 화장실이나 와이파이를 이용할 수 없는 게 아쉽긴 했지만, 크루아상과 오렌지주스로 아침식사를 하면 쉴 수 있었다.
잠시 후 앞서 가던 순례자들을 따돌리고 앞서 걸어갔다. 남녀 순례자였는데, 커플인지는 잘 모르겠다. 둘 이상이 함께 걷다 보면 아무래도 속도를 줄일 수밖에 없다. 둘 중 누구라도 천천히 가거나 멈출 일이 생기면 기다려줘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걷는 속도가 달라도 보조를 맞출 수 밖에 없어 서로가 힘들 수도 있다. 누구나 자기 바이오리듬을 따라 걸으면 좀더 편한데, 상대방에게 맞추려면 다른 사람은 조금이라고 희생해야만 한다.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핸드폰에 저장된 노래를 들으며 걸었다. 주위에 안개가 끼어 풍경을 제대로 볼 수 없으니, 그것도 지루함을 보태는 것 같다. 한참 걷다가 8시20분쯤 400km 표지석을 만났지만, 정확한 거리인지는 알 수 없다. 이곳저곳에 거리표시 한 것이 많긴 해도 제멋대로인 경우가 많아서다.
비슷한 풍경의 농로(農路)를 겸한 직선으로 난 순례길을 쉬지 않고 걸어 9시10분쯤 첫번째 마을 칼사디야 데 라 쿠에사(Calzadilla de la Cueza)에 도착해 초입에 있는 알베르게에 들어가 화장실부터 다녀온 후 맥주를 한잔 마셨다. 쉬었다 가면 어깨가 조금 덜 아파서 많은 도움이 된다.
다시 화살표를 따라 다음 마을인 레디고스(Ledigos)로 간다. 첫 마을에 비하면 금방 도착할 수 있는 거리지만, 순례길 이정표에는 5.7km, 도로이정표에는 7km로 표시돼있디. 같은 도로이정표에, 아침에 떠나온 카리온 데 라스 콘데스까지는 18km로 돼있다. 다시 자동차도로와 나란히 나있는 순례길을 따라 하염없이 걸어간다.
길가에 나무가 많아 그늘지긴 했지만, 오늘은 10시가 다 되도록 안개가 걷히지 않아 그늘이 필요하진 않다. 약간의 오래된 아스팔트 길을 따라가는데, 누군가 돌로 화살표를 여러 개 만들어 놓았다. 이 정도면 길 잃을 염려는 없겠다. 아니, 너무 과하다. 돌로 만든 하트도 있다.
10시45분쯤 레디고스의 바르를 겸한 알베르게에 들어가 오랜만에 커피를 한잔 마셨다. 그런데 서비스로 조그만 머핀을 하나 준다. 가끔 그런 경우가 있긴 해도 정말 오랜만에 받아보는 서비스다. 카페 아메리카노(café americano)를 주문했는데, 그냥 마시기엔 너무 쓴 것 같아 설탕을 조금 넣어서 마셨다.
바르를 나와 큰길로 접어드는 곳에 있는 이정표를 보니 오늘 목적지 테라디요스 데 로스 템플라리오스(Terradillos de los Templarios)까지 4km 남았다. 그런데 도로바닥에 그려놓은 노란 화살표 방향이 좀 이상하다. 목적지는 분명 오른쪽인데, 화살표는 왼쪽을 가리키고 있다. 주위를 살펴보니 역시 오른쪽으로 화살표가 보인다. 누군가 장난친 건가? 하마터면 헛걸음 할 뻔 했다. 걷는 동안 자전거 순례자들을 자주 만났다. 자전거 순례자들은 빨리 갈 수 있어 좋을 것 같으면서도 짐을 싣고 가는 게 안쓰럽기도 하다. 하긴 짐을 많이 싣고 다니는 순례자들이 많진 않다. 짐은 배달로 보낸 건가?
걷다 보니 11시36분쯤, 테라디요스 데 로스 템플라리오스 마을 초입에 알베르게(Albergue Los Templarios)가 보인다. 하지만 내가 오늘 묵으려는 곳은 아니다.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처럼 외따로 떨어져있는 숙소를 선호하지 않는다. 숙소에서 많은 곳을 돌아다니진 않아도 선택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서다.
다시 10분쯤 더 걸어 11시44분, 드디어 오늘 묵을 알베르게(Albergue Jacques de Molay)에 도착했다. 아직 12시도 되지 않았는데, 식당을 겸하고 있어서 그런지 접수를 받아줬다. 침대를 선택하는데 15유로, 2층은 12유로였다. 이렇게 달리 받는 경우는 처음이다. 그래도 큰 차이가 없어 1층으로 달라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 2층도 괜찮은 것 같았지만 이왕 선택했으니 바꿀 필요는 없다.
샤워한 다음 세탁물을 맡기고(4유로) 점심을 먹었다. 선택할 게 별로 없어서 샌드위치와 맥주를 시켰더니 올리브를 서비스로 준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 먹었던 것보다 맛이 괜찮다. 파뿌리와 조그만 오이 절인 것도 함께 줬는데, 좀 짜긴 해도 새로운 맛이었다. 내일아침까지 마실 물도 한병(1.5유로) 샀다. 이 마을엔 다른 가게가 없어서 모든 걸 여기서 해결해야 할 것 같다. 점심은 간단하게 먹었으니 저녁은 좀 더 제대로 먹어야겠다. 주인한테 물어보니 6시 반부터 식사가 가능하다고 했다.
유튜브를 보다가 마을구경을 나갔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야채와 과일을 파는 트럭을 만났다. 그렇지 않아도 마을에 가게가 있는지 알아보려고 했었는데, 이런 트럭이 오는 걸 보면 가게가 없는 게 분명하다. 트럭을 구경하다가 체리에 관심을 보이니 한 개 주면서 먹어보라고 한다. 게다가 앵두도 두오 개 줘서 먹었더니 둘 다 맛있다. 그래서 체리 10개만 달라고 했더니 그 2배는 되게 담아주면서 1유로라고 한다. 정확한 값은 잘 모르겠지만 한국보다 훨씬 저렴한 듯하다.
6시 반에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내려갔는데, 주인이 다른 사람과 합석하라고 한다. 일본인 2명도 따로 자리잡고 있었는데, 같이 앉으란 거였다. 어쩔 수 없이 합석했지만, 제대로 대화할 수 없어 나는 유튜브만 보면서 저녁을 먹었다. 음식은 맛있었지만, 먹는 내내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