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20일(목)
오늘은 5시 반도 되기 전에 일어났는데 준비하는 시간이 꽤 걸려서 20분 후에나 출발할 수 있었다. 일본인 2명은 이미 출발하고 없었다. 오늘도 날씨가 흐려서인지 밖이 어둡긴 해도 길을 찾긴 어렵지 않았다.
첫번째 도로표지석을 지나는데 391km다. 이젠 그러려니 한다. 어차피 거리보다는 날짜로 도착일을 계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까지 공식거리로 415km 걸었고, 최종목적이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Santiago de Compostela)까지는 16일 남았다.
출발한지 30여분 만에 첫 마을 모라티노스(Moratinos)에 도착했는데, 문 연 바르가 없다. 대신 길가에 몇몇 주전부리를 차려놓고 기부제로 운영하는 곳이 있었는데, 먹을 만한 것도 별로 없고 이런 곳에서 휴식하는 게 내키지 않아 사진만 찍고 그냥 지나쳤다.
비슷한 들판을 계속 걷지만 보는 풍경은 조금씩 다르다. 그래도 사진을 찍어놓고 보면 별다른 게 없어 보이긴 하다. 두번째 마을 산 니콜라스 델 레알 카미노(San Nicolás del Real Camino) 초입에 바르가 있고 출입문에는 ‘Abierto(= open)’라고 매달아놨지만, 문은 굳게 닫혀있다. 한 순례자가 입구에 앉아 7시쯤 문을 열 거라면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확실치 않아 그냥 지나쳤다. 마침 ‘두번째 바르(2nd Bar)’란 안내판이 있어 화살표를 따라가봤지만 역시 문은 닫혀있다.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다음 마을까지 걷기로 한다. 나중에 첫번째 바르에서 기다리던 순례자를 만났는데, 역시 7시가 되도 문을 열지 않아 그냥 오늘 거라고 했다.
자동차도로와 나란히 나있는 순례길을 걷다 보니 다음 마을인 사아군 (Sahagún)까지 6km, 레온(León)까지 73km란 이정표가 보인다. 물론 자동차를 위한 이정표지만 순례길과 자동차도로가 나란히 나있기 때문에 걷는 거리와 크게 다르진 않을 것 같다.
7시23분, 팔렌시아 주와 레온 주 경계에 도착했다. 전에도 그랬지만 주경계라고 해도 풍경이 달라지는 건 거의 없다. 그나마 순례길에 팔렌시아 주가 끝나는 경계표시는 돼있지만, 레온 주 경계표시는 자동차도로 한켠에 서있을 뿐이다. 그리고 조금 더 가니 멀리 사아군이 보인다.
30여분 걸어 이제 사아군에 거의 다 왔다고 생각될 무렵 순례길은 뜬금없이 오른쪽으로 이어진다. 예배당(Ermita de la Virgen del Puente)을 지나도록 꽤 멀리 우회하게끔 만들어놓은 거였다. 물론, 직선으로 곧장 갔다면 사아군에 조금 더 빨리 도착할 수 있겠지만 일부러 만들어놓은 순례길을 놓칠 순 없어 그대로 따라갔다.
자동차도로를 벗어나 5분쯤 걸어 아치가 2개 있는 조그만 돌다리를 건너니 예배당이 있다. 내부를 들여다보지 않고 지나가는데 이번에는 출입구 격인 두 기둥이 서있다. 그곳에는 알폰소 6세 국왕(Alfonso VI de León, el Bravo)과 베르나르도(Bernardo de Sédirac) 사아군 수도원장(Abad de Sahagún)의 입상이 조각돼있다.
그곳에서 30분쯤 걸어 투우장(Plaza de toros de Sahagún)을 지나고 5분여 만에 드디어 바르에 도착했다. 먼저 화장실부터 다녀온 다음 먹을 걸 주문하려는데, 마실 것밖에 없다. 조금 미안하긴 해도 어쩔 수 없이 맞은편 바르로 향했다. 그곳에도 별다른 건 없었지만 크루아상과 커피로 아침식사를 했다. 그동안은 빵을 먹으면서 오렌지주스를 마셨는데, 오늘은 커피를 마셨더니 너무 쓰다. 설탕을 넣지 않고는 마시지 못할 정도다.
사아군을 벗어나 오늘 목적지 베르시아노스 델 레알 카미노(Bercianos del Real Camino)로 향한다. 길가에 하얀 껍질 포플러나무들이 늘어서 있는데, 누군가 칼로 낙서를 많이 해놓았다. 나무가 자라는 데 큰 지장은 없겠지만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한심한 생각도 들었다.
비슷한 풍경의 자동차도로 옆 순례길을 1시간 반쯤 걸어 첫번째 알베르게 (Albergue La Perala)를 만났지만, 오늘 묵으려는 알베르게가 따로 있어서 그냥 지나쳤다. 그리고 5분쯤 더 걸어 드디어 오늘 묵을 알베르게(Albergue Bercianos 1900)에 도착했다. 식당을 겸하고 있는 곳이다.
주인이 접수를 받아놓고 청소가 덜 됐으니 기다리라 길래 우선 점심부터 먹기로 했다. 제대로 된 점심은 12시부터 가능하다고 해서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샌드위치와 맥주를 시켰는데, 생각했던 맛이 아니다. 바게트도 질긴데다 소시지조차 딱딱하고 질기다. 그래도 꾸역꾸역 다 먹었다.
이제 침대로 가려는데, 마침 일본인 2명이 도착해서 그들이 접수하는 동안 기다렸다가 함께 침실로 올라갔다. 그리고 아무거나 쓰라고 하길래 창가에 있는 침대를 쓰려고 짐을 정리해놨는데, 한참 후에 주인이 오더니 그곳은 예약된 곳이니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한다. 그동안 1층 침대는 다른 순례자들이 다 차지한 후라 어쩔 수없이 2층으로 올라가야만 했다. 이번 순례길을 걷는 동안 2층 침대를 쓰기는 처음이다. 오르내리기 조금 불편하긴 하겠지만, 제대로 불만을 표시하기가 어렵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도록 신중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막상 2층 침대를 쓰고 보니 오르내리는 것 말고는 불편한 게 없다. 더구나 이곳은 침대마다 콘센트가 있고 커튼을 달아 놓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될 게 전혀 없다.
저녁에는 1층 식당으로 내려가 ‘오늘의 메뉴’를 시켜서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