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21일(금)
어제 처음으로 2층 침대에서 잤지만 오르내리는 불편함 말고는 안락하고 좋았다. 숙박비(18유로)가 조금 비싸서 그런지 침대마다 커튼을 달아놓아 독립공간이 확보되고 머리맡에 콘센트가 설치돼있어서 사용하기도 편리했다.
새벽 5시 반에 알람소리를 듣고 일어났는데, 한두 명 빼곤 다들 일어나 있었다. 그래도 짐을 챙겨 알베르게 밖으로 나온건 내가 첫번째였는데, 오늘도 길을 헤맸다. 아니, 제대로 가긴 한 건데, 확실한지 몰라 확인하는 시간이 걸린 셈이다.
카스티야 이 레온 자치지방에서 주가 바뀔 때 별로 달라진 게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오늘 걸으면서 보니 조금씩 차이가 나긴 했다. 순례길 규모도 다르고, 밭에 심어놓은 곡물도 차이가 난다. 예를 들어, 부르고스 주의 순례길은 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고 곡물도 보리나 밀이 대부분인데, 지금 걷고 있는 레온 주는 2차선 자동차도로 옆으로 정말 샛길처럼 만들어놓았고 보리와 밀도 있긴 하지만 옥수수나 해바라기를 많이 심어놓은 것 같다. 또 하나 특이한 건 밭에 물을 주기 위한 거대한 기계가 있는데 작동하는 걸 보지 않아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잘 모르겠다.
오늘은 자동차도로 옆 샛길처럼 생긴 순례길을 걷는 게 불편해서 자동차도로를 따라 걸었다. 가끔 자동차가 오면 피해가기 때문에 크게 위험하진 않았다. 순례길은 모래와 잔자갈이 깔려있는데, 걷는 내내 자갈 밟는 소리가 나고, 신발 속으로 자꾸만 모래가 들어가 걷기 불편하기도 하다.
6시50분이 되자 해가 떠오른다. 해 뜨는 시간이 조금씩 빨라지는 것 같다. 매일 해 뜨기 전에 걷곤 하지만 날씨 때문에 해 뜨는 광경을 보기는 쉽지 않다. 엊저녁에도 비가 내려서 오늘 날씨가 좋지 않을 까봐 걱정했는데, 아침부터 맑아 기분이 좋았다. 비가 오지 않더라도 해 뜨는 동쪽하늘에 구름이 많이 끼어있으면 역시 해 뜨는 모습을 볼 수 없긴 마찬가지다.
1시간 반쯤 걸어 첫번째 마을 엘 부르고 라네로(El Burgo Ranero)에 있는 조그만 가게를 지나는데, 한글로 “우리는 라면을 팔고 있습니다”라고 써놨다. 호기심에 안으로 들어가보니 정말 신라면 컵라면과 몇 가지 라면을 진열해놓았다. 다른 건 가격을 확인해보지 않았지만 컵라면 가격이 3.75유로다. 5천원쯤 되는 거니 한국보다 3배 정도 비싼 가격이다. 하긴 가격보다도 이걸 지금 사서 숙소까지 갖고 가는 게 번거로워 가게를 그냥 나왔다.
그리고, 바로 옆 바르로 들어갔더니 이곳에서 신라면을 끓여서 판다. 가격은 5.5유로. 이 또한 비싼 것 같아 토르티야와 커피를 주문했는데, 5.8유로나 된다. 그러니 라면만 비싼 게 아니다. 바르에도 게시판 하단에 “신라면 5.5유로, 햇반 4.5유로. 젓가락도 있어요”라고 예쁜 글씨로 써놨다. 글씨체로 보아 아무래도 한국인 여자순례자에게 부탁해서 써놓은 것 같다.
마을을 벗어나 다시 비슷한 순례길을 따라 걷는다. 그런데 오늘은 어제와 달리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는 순례자들이 꽤 많다. 며칠째 만나는 일본인 순례자 둘과도 자주 만났다 헤어지길 반복한다. 그들은 아무래도 둘이 걷다 보니 서로 보조를 맞추느라고 혼자 걷는 나보다는 느리게 걸을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둘 이상이 걸으면서 나보다 빨리 걷는 순례자들은 별로 없다.
걷는 동안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 도로와 밭뿐인 평지지만 지평선 끝에는 산이 보이고 그곳엔 구름이 걸려있다.
마을간 거리가 멀기로는 프랑스길에서도 손꼽히는 곳이 엘 부르고 라네로와 렐리에고스(Reliegos) 마을 사이다. 공식거리가 13km이니 3시간 이상 걸어가야 한다. 이 정도 거리면 중간에 간이바르 하나는 있을 법한데 이곳엔 아무것도 없다. 그저 똑같은 풍경을 보면서 한 발씩 걸어가야 할 뿐이다.
그렇게 3시간쯤 걸어 렐리에고스의 바르에서 화장실에 다녀온 후 맥주를 한잔 마셨다. 이곳에서 변비가 생기진 않았지만 화장실 가는 시간이 일정치 않아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항상 노심초사다. 6년전 프랑스길을 걸을 때나 2년전 북쪽길을 걸을 때 한번씩 걷는 동안 급한 신호가 와서 고생한 적이 있다. 특히, 북쪽길에서는 비까지 내리는 날 들판에서 일이 생겨 더 힘들었던 적이 있었다.
렐리에고스를 벗어나 2012년 세워놓은 순례자상 사진을 한장 찍고 오늘의 막바지 순례길을 이어간다. 그리고 드디어 11시45분,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의 알베르게(Albergue Gaia en Mansilla de las Mulas)에 도착했는데, 출입문 옆에 오후 1시 문을 연다고 써있다. 아래 ‘completo, no vacancy’란 글씨도 보인다. 하지만 다행히 어제 예약을 해놓았기 때문에 문제없다. 이곳은 6년전에도 묵었던 알베르게인데, 당시 동키서비스 에러로 내 배당이 배달되지 않아 알베르게 주인이 내가 전날 묵었던 알베르게까지 가서 직접 배낭을 날라다 준 인상 깊은 곳이기도 하다.
오픈시간까지 기다릴 수 없어 배낭에서 에코백만 꺼내고 배낭은 알베르게 옆에 둔 채 길 건너에 있는 알베르게를 겸한 식당으로 갔다. 몇 시부터 식사할 수 있냐고 했더니, 처음엔 오후 1시부터 가능하다고 하다가 잠시 후에 지금도 메뉴를 먹을 수 있다고 했다. 무슨 말인지 헷갈렸지만 자리잡고 앉아 샐러드와 돼지등심, 그리고 요구르트를 주문했다. 바게트도 몇 조각 줬는데, 저녁에 먹기 위해 따로 챙겼다. 오늘은 와인 대신 물을 마셨다. 나중에 계산서를 보니 17유로 가까이 됐다. 그리고 저녁에는 식사할 수 없다고 한다. 이런, 어쩌지! 그건 다음에 생각해보자.
오후 1시가 거의 되어 알베르게로 돌아왔더니 벌써 순례자들이 여럿 와있다. 차례를 기다렸다가 침대를 배정받았는데, 다행히 1층 침대다. 하긴 조금만 늦었어도 2층으로 배정받을 뻔했다. 조금 힘들더라도 부지런히 걸어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는 게 좋다. 아니, 빨리 걷는다고 힘든 게 아니다. 배낭이 무거우니 차라리 빨리 걸어서 일찍 도착하는 게 여러모로 좋다.
배낭을 정리하고 씻으러 가려는데, 비누가 없다. 엊그제는 비옷커버를 잃어버렸는데, 조금만 방심하면 뭔가 하나씩 없어진다. 어쩔 수 없이 비누부터 사기 위해 마트위치를 물어가며 찾아갔지만 비누는 없다. 그래도 차근차근 둘러보다 비누와 샴푸를 겸할 수 있는 젤을 찾아서 사왔다. 3유로가 조금 안되는 가격인데 무게가 꽤 나간다. 이래저래 짐이 자꾸만 늘어난다. 마트에 간 김에 저녁거리도 찾아봤지만 마땅한 게 없다. 하는 수 없이 점심 때 챙겨온 바게트와. 요구르트와 납작복숭아, 그리고 슬라이스 된 소시지를 사서 함께 먹기로 했다.
오늘도 가끔 만나는 한국여자를 또 만났다. 같은 방에 묵고는 있지만 대화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스몰토크만 하고 관심을 갖지 않기로 했다. 이곳에서의 대화내용을 비슷하기 때문에 별로 개의치 않는다.
낮에 마트에 다녀오긴 했지만, 오후에 시간이 많이 남고 마을구경도 할 겸 성당 쪽으로 가봤더니 그곳이 이 마을의 메인거리였다. 바르들도 많고 마트도 낮에 갔던 곳보다 더 컸다. 하지만 저녁거리를 찾는 게 쉽지 않다. 마트를 샅샅이 뒤진 끝에 구석에서 파에야를 찾아냈다. 그리고 오이까지 하나 사서 알베르게로 돌아와 낮에 사온 것들과 함께 냉장고에 넣어뒀다.
오후 6시 반쯤 저녁을 먹기 위해 알베르게 식당으로 갔는데, 좁은 식탁을 몇 명이 다 차지하고 음식을 만들고 있어서 양해를 구하고 식탁 귀퉁이를 차지한 후 파에야를 전자레인지에 데우고 오이도 깎았다. 그리고 낮에 사온 납작복숭아와 요구르트, 전에 먹다 남은 체리까지 차려놓고 보니 그런대로 한끼 식사론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