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22일(토)
오늘은 다른 날보다 비교적 짧게 걷지만 평소와 같이 일어나서 일찍 출발했다. 알베르게에서 6시부터 아침식사를 할 수 있다고 했지만, 매일 첫번째 휴식하는 마일에서 아침식사를 해결했었기 때문에 굳이 먹고 나올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커피와 비스킷 정도인 아침이 부실하기도 했다. 다들 아침을 먹고 가기 위해서인지, 오늘은 나 말고 일찍 일어난 순례자는 없었다.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Mansilla de las Mulas)는 마을을 벗어날 때까지 순례길 표시가 잘 돼있어서 다른 마을들처럼 헤매지 않고 걸을 수 있었다. 에슬라 강(Río Esla)을 건너 마을을 벗어나는데, 왼쪽 지평선에 보름달이 걸려있다. 걷는 동안 처음 보는 풍경이다. 사진을 찍고 보니 해처럼 밝게 빛나고 있다. 보름달이어서 늦게 지는 건가? 해가 뜨지 않아 잘 보이는 거겠지.
오늘도 자동차도로와 나란히 나있는 순례길을 따라 걷다가 30분쯤 지나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해, 도로 갓길로 올라가 배낭커버를 씌우고 비옷도 뒤집어썼다. 다른 때 같으면 배낭커버만 씌우고 걸었겠지만, 오늘은 바람도 막을 겸 비옷까지 입게 됐다.
첫번째 마을 비야모로스(Villamoros de Mansilla)에 도착했는데, 바르는 보이지 않고 왼쪽으로 300m 가면 바르가 있다는 표시만 보이지만 문을 열었는지도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마을을 벗어났다. 그리고 잠시 후, 400m 앞에 바르가 있다는 안내문이 보인다. 열심히 걸어가봤지만 역시 아직은 문을 열지 않았다. 전에는 오늘보다 더 늦게 이곳을 지났기 때문에 문이 열려있었지만, 오늘은 너무 이른 시간이라 아직 열지 않은 것 같다.
짧은 숲길을 지나 다리 아래로 이어진 순례길을 따라가니 두번째 마을 푸엔테 비야렌테(Puente Villarente)다. 처음 만나는 바르에 들어가 오늘도 크루아상과 커피로 아침식사를 해결했다. 마을을 벗어나면서 이정표를 보니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까지 6km, 레온까지는 9km로 돼있다. 그럼 오늘 걷는 거리가 15km밖에 안된다고? 지금까지 2시간 걸어왔으니 최소 8km는 돼야 한다. 그리고 인터넷에는 오늘 걷는 거리가 18.5km로 나와있다. 아무튼, 오늘 목적지 레온(León)까지 9km 정도 남은 건 맞는 것 같다.
푸엔테 비야렌테를 벗어나면서 순례길은 자동차도로에서 멀어진다. 어제까진 길 상태에 따라 순례길과 자동차도로를 왔다 갔다 하면서 걸었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게 됐다. 그렇다고 순례길이 걷기에 마냥 불편한 것만은 아니어서 큰 상관은 없다.
온갖 낙서가 돼있는 다리 밑을 지나니 오랜만에 마시멜로들이 들판에 널려있다. 지금까지는 포장되지 않은 것들이었는데, 이곳은 무슨 사정이 있어서 저렇게 꽁꽁 동여매놓았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어제와 오늘은 같은 주인데.
세번째 마을 아르카우에하(Arcahueja)를 지날 즈음 비가 그친 것 같아 비옷을 벗었더니 안에 입은 점퍼가 다 젖었다. 땀이 나서 그런 것 같다. 비가 오면 이래저래 옷이 젖는 건 마찬가지다. 그래도 땀에 젖는 게 조금 덜 추운 것 같아 입고 있긴 해도 축축해지니 불편하다.
순례길을 따라 똑바로 걷고 있는데, 화살표가 갑자기 왼쪽으로 꺾어지면서 발델라푸엔테(Valdelafuente) 마을을 지나도록 나있다. 마을을 벗어나 조금 가니 파란색으로 칠해진 철제육교가 보여서 다리를 건너가나보다 했는데, 순례길은 산 밑으로 연결돼있다. 그리고 이제 레온 시내가 한눈에 보인다. 그런데 그곳에 푸엔테 카스트로(Puente Castro)란 마을이 있었다. 아직은 레온에 도착한 것이 아니었다.
마을을 지나고 순례자안내소(Información Peregrino) 앞에 있는 다리를 건너니 드디어 레온이다. 전에 왔을 때는 순례자안내소에 경찰이 근무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역시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근무자가 아무도 없고 문도 당연히 닫혀있다. 오늘이 토요일이라 문을 안 여는 건가?
멀리 버거킹 광고판이 보이고, 조금 가다 보니 KFC도 있지만 아직은 문을 열지 않았다. 노란 화살표를 따라 레온 중심가까지 들어가 오늘 묵을 알베르게(Albergue del convento de las Carbajalas)를 찾는데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지나는 사람한테 물어봐도 모르겠단다. 어쩌지! 그리고 얼른 인터넷을 검색해서 다른 알베르게(Albergue-Residencia San Francisco de Asís)을 찾았다.
지도를 보면서 알베르게를 찾아가니 외관이 호텔처럼 생겼다. 접수대 앞에 갔더니 기다리고 있는 순례자들이 여럿 있다. 내 차례가 되어 여권을 내밀었더니 예약했느냐고 묻는다. “노!” 그래도 접수는 받아줬다. 그런데, 아래 칸 침대를 달라니까 예약도 안했으면서 그러냐고 핀잔을 주긴 했지만 결국 1층 침대를 배정해줬다.
샤워한 후 수건을 빨기 위해 직원에게 세탁할 수 있는 곳을 물어보니, 접수대에 갖다 주란다. 오늘은 수건만 빨면 되니까 세면대에서 대충 빨아 침대에 걸쳐놓았다. 내일아침까지 마르지 않으면 걷는 동안 배낭에 매달아놓고 말려야 할 것 같다.
대성당(Catedral de Santa María de Regla de León)을 구경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골목에 벼룩시장이 열렸다. 그런데 그 물건들을 보니 쓸만한 건 별로 없다. 어떤 건 고철이나 쓰레기처럼 생긴 것들도 있는데, 그래도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것저것 관심을 보인다. 아무리 그래도 책이야 그런대로 볼 수 있다고 하지만, 다 망가진 물건들은 무엇에 써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
대성당에 거의 다가갔는데, 골목에서 밴드소리가 들린다. 그것도 한두 팀이 아니다. 오늘 무슨 축제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연습인지 공연인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구경하는 건 신나고 재미있었다. 지나던 사람들도 서서 지켜보고 있다. 대성당을 잠시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더 많은 밴드들이 보인다. 그리고 모두 한 방향으로 행진해 가길래 따라가보니 다들 어느 광장에 모였다. 거기서도 행사하는 것 같지는 않고 각자 웃고 떠들면서 밴드를 연주했다. 나는 인근 바르에서 커피를 한잔 주문해 마시면서 한동안 그들을 구경했다.
오늘 저녁은 알베르게에서 8시 반부터 식사가 가능하다고 했기 때문에 간식을 사기 위해 알베르게로 돌아가기 전에 거를 쭉 내려가봤다. 그런데 어느 가게 앞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있다. 무슨 일이지? 그 가게 앞에 먹음직스러운 체리(ceraza)가 많이 있었지만,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 다른 곳을 찾아갔지만 별다른 가게가 없었다. 어쩔 수없이 알베르게로 돌아오다가 결국 그 가게 앞에서 기다렸다가 체리를 600g 정도 샀다. 가격은 3유로가 조금 안됐다. 사놓고 보니 양이 꽤 많은데, 부지런히 먹어야겠다.
마땅히 돌아다닐 곳도 없어 침대에서 동영상을 보다가 8시 반이 되어 식당으로 갔더니 식사하기 위해 내려온 순례자들이 몇 명 있다. 그런데 계산부터 하고 식사해야 하는 건지, 먹고 나서 계산하는 건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고 있는데, 접수 받던 직원이 먼저 식사하고 있으면서 먹은 후에 계산하면 된다고 해서 식판을 들고 줄을 섰다.
수프와 메인요리, 그리고 토마토와 요구르트까지 한꺼번에 주긴 했지만 평상시에 먹던 ‘오늘의 메뉴’와 거의 같은 구성이다. 와인 대신 물만 주긴 했다. 물이나 토마토는 물론 바게트도 맘껏 먹을 수 있도록 해서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친 다음 계산하러 갔더니 9유로라고 한다. 이 정도면 가성비 최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