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일, 레온에서 산 마르틴 델 카미노까지

by 이흥재

2024년 6월23일(일)


어제와 그제 모두 2층에서 자는 사람이 너무 많이 뒤척거려서 잠을 방해했다. 건강한 청년이 올라가 있었는데, 한번 움직일 때마다 침대 전체가 들썩거렸다. 그래도 그럭저럭 자고 오늘도 어김없이 5시 반에 일어났다. 다른 순례자들은 아무도 일어나지 않아, 모든 짐을 챙겨 복도로 나와 배낭을 꾸렸다.


알베르게에서 순례길을 찾아가려면 먼저 산 마르코스 성당(Convento de San Marcos)까지 가야 해서 지도를 보면서 새벽의 레온시내를 걸어갔다. 그리고 20분쯤 걸어 성당 옆을 흐르는 베르네스가 강(Río Bernesga)을 가로지르는 다리(Puente romano de San Marcos)를 건넜다. 그런데 이른 시간인데도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무리가 왁자지껄 떠들면서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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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건너니 트로바호 델 카미노(Trobajo del Camino) 마을이 나오는데, 레온과 이어져 있는 곳이다. 가로등도 아주 밝게 켜져 있어서 시내를 걷는 것과 똑같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침 일찍 문을 연 바르에 들어가 크루아상과 커피로 아침을 먹었다. 이곳에서는 크루아상을 반으로 갈라서 굽고 딸기잼과 버터까지 줬지만, 딸기잼만 발라먹었다. 바르를 나오는 앞서 걷는 순례자들이 한둘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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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를 걷다 재미있는 광고를 봤다. ‘Learn English like me.’ 아 나라에도 영어학원이 있나 보다. 왠지 학교에서만 배울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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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도 순례길 표시는 아주 잘 돼있다. 가로등마다 노란 화살표를 그려 놓았고, 조가비를 새긴 표시적도 자주 눈에 띈다. 이 정도면 너무 많이 표시해놓은 것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누군가는 그리는 수고를 했을 텐데, 두세 개씩 건너서 해도 될 걸 너무 애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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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 보니 길 건너에 현대자동차 서비스센터가 보인다. 엊그제 유럽의 여러 자동차회사 서비스센터를 보면서 우리나라 것은 없나 유심히 살펴봤었는데, 오늘에서야 찾은 것 같다. 로그로뇨를 지나오면서 기아자동차 대리점을 본 후 다시 보는 우리나라 자동차회사 간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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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마을 라 비르헨 델 카미노(La Virgen del Camino)를 지나면서 사진으로 익숙하게 봤던 파사드를 보게 됐는데, 비르헨 델 카미노 성당(Basílica de la Virgen del Camino)이다. 수사 프란시스코 코에요(Francisco Coello)의 작품이라고 한다. 정면 상단에는 성모마리아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12제자의 청동으로 만든 조각상이 있는데, 호세 마리아 수비락(Josep Maria Subirachs)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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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앞에서 화살표를 따라 길을 건너니 순례길이 두갈래로 표시돼있다. 한쪽은 산 마르틴 델 카미노(Villar de Mazarife)로 가는 길이고, 다른 길은 비야르 데 마사리페(Villar de Mazarife)를 경유하는 루트다. 어느 길로 가든 내일은 아스토르가(Astorga)에서 만나도록 돼있지만, 당초 계획했던 대로 산 마르틴 델 카미노를 향해 간다.


자동차도로 옆을 걷다 숲길을 지나고 다시 자동차도로와 만난다. 그리고 발베르데 데 라 비르헨(Valverde de la Virgen) 마을에 이르렀지만 그냥 지나친다. 이곳은 레온과 가까운 곳이어서 그런지 이른 새벽인데도 자동차들이 많이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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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마을인 산 미겔 델 카미노(San Miguel del Camino) 초입에 바르가 있어서 들어갔더니 생맥주는 없고, 냉장고에 넣어둔 병맥주만 팔고 있어서 되돌아 나왔다. 그리고 5분쯤 걸어 다음 바르에 들어가 맥주를 한잔 주문하고 화장실에 다녀왔는데, 벽면 가득 낙서가 써있다. 물론, 한글도 많이 보인다. 주인여자가 나한테도 쓸 거냐고 묻길래 아니라고 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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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길은 다시 짧은 숲길로 이어지고 또 다시 자동차도로를 만났다. 앞서 걷던 순례자가 무언가 열매를 따먹고 있기에 나도 몇 개 따서 먹어봤더니 약간 씁쓸한 게 맛이 별로 없다. 그래도 그 순례자는 한참 동안 열매를 따서 열심히 먹었다. 그동안 나는 그 순례자를 지나쳐 계속 걸었다. 요즘은 따 먹을 만한 열매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열매는 자주 눈에 띄었지만 이름은 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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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45분, 비야당고스 델 파라모(Villadangos del Páramo) 마을 바르에 들러 맥주를 한잔 시켰더니 타파스를 하나 준다. 처음 받아보는 안주다. 타파스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오늘은 바게트에 하몽을 얹어놓은 것이다. 하몽이 약간 짭짤하기 때문에 안주로는 꽤 괜찮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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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야당고스 델 파라모를 지나 짧은 숲길을 거쳐 자동차도로로 나오니 멀리 오늘 목적지 산 마르틴 델 카미노가 보인다. 하지만 직선도로를 따라 한참 걸어가야 한다. 이 마을 알베르게는 모두 예약할 수 있어서 엊저녁에 그중 한 곳을 예약해놓긴 했지만, 다른 곳은 이메일로 예약할 수 있도록 한 것과는 달리 이곳은 booking.com을 통해 예약해야 해서 숙박비를 미리 계산해야 하는 것은 물론, 수수료까지 지불해야 했다. 그래서 수수료 0.9유로를 포함해 10.9유로를 카드로 계산해놓은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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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 보이는 곳부터 40분쯤 걸어 알베르게(Albergue Santa Ana)에 도착해보니 예약하지 않아도 침대를 구할 수 있었다. 이런 경우가 종종 있다. 어떤 때는 예약하지 않아 방을 구할 수 없는 경우도 더러 있지만, 예약하지 않아도 일찍 도착하면 얼마든지 침대를 배정받을 수 있다. 그래서 앞으로는 이메일로 예약할 수 있는 곳은 예약하겠지만, 수수료를 지불하면서까지 booking.com으로 예약하는 것은 하지 않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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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박비는 이미 지불했기 때문에 저녁식사비로 13유로, 세탁비로 5유로, 그리고 1.5리터 물과 점심으로 먹을 토르티야와 커피까지 합쳐 6유로를 추가로 계산했다. 저녁식사는 7시부터 가능하다고 한다.


마을구경을 하고 와서 저녁 때까지 동영상을 보고 있는데, 7시가 되자 알베르게 주인이 저녁 먹으로 오라고 했다. 식당으로 가보니 두 테이블에 모인 사람들이 10명쯤 됐다. 내가 앉은 테이블에는 모두 6명이 함께 했는데, 나를 빼곤 모두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이라고 했다. 영어를 할 줄 아느냐고 묻길래 못한다고 했다. 어설프게 했다가는 더 곤란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너무 소외시키는 것 같았는지 가끔 간단한 질문을 해왔다. 그렇지만 앉아있는 동안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나와 마주앉은 사람은 나이가 많아 보였는데, 수전증이 있는지 손을 계속 떨면서도 대화를 주도하고 있었다. 아니, 그들도 어른을 공경하는 마음이 있는 건지 모두가 들어주는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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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는 처음에 샐러드가 나왔는데, 양이 꽤 많았다. 메인은 파에야 같기도 하고 카레밥 같기도 했는데, 닭고기가 맛있었다. 양도 많았다. 후식은 요구르트와 아이스크림, 푸딩 중에서 고를 수 있었는데, 나는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다 먹고 나니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을 정도로 배가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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