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24일(월)
오늘도 알베르게에서 제일 먼저 준비하고 나오니 새벽 5시45분이다. 여느 때와 거의 같은 시각이다. 전에는 알베르게에서 아침을 먹고 나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요즘은 대부분 첫 휴식하는 바르에서 아침을 해결하기 때문에 일어나서 대충 씻고 바로 출발한다.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자동차도로를 벗어나 오른쪽으로 향한다. 가로등도 없고 흐린 날이지만 걸을 만한 밝기다. 그리고, 25분쯤 걸은 다음 다시 자동차도로 옆으로 나왔다. 이제는 어느 정도 밝아지기도 했고, 자동차 불빛도 있어서 걷기에 한결 편해졌다.
다시 자동차도로를 벗어나면서 7시쯤 첫 마을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 (Hospital de Órbigo)를 지났다. 이곳은 전형적인 농촌마을인 것 같다. 마을을 벗어나기 전 오르비고 다리(Puente de Órbigo Paso Honroso) 바로 전에 있는 바르에 들러 아침식사를 했다. 오늘도 크루아상과 커피를 주문했는데, 이상하게 입맛이 없다. 그래서 크루아상은 조금 남겼지만 커피는 다 마셨다. 요즘 무슨 일인지 매일 배가 조금씩 불편하다. 항상 속이 부글부글 하는 것 같아 화장실에 가보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다.
바르를 나와 다리를 건넌다. 6년전 왔을 때는 비를 맞으며 주위를 둘러볼 겨를도 없이 건넜기 때문에 아무런 기억이 없다. 오늘도 구름이 많고 비가 올 듯해서 일단 배당커버를 씌웠다. 이 다리는 명예의 통로(Paso Honroso)라고도 하는데, 15세기 돈 수에로(Don Suero de Quiñones)란 기사가 연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 다리 위에서 여러 명의 기사들과 결투를 벌인 곳이라고 한다. 지금도 이곳에서는 매년 이 전투를 기리는 축제가 열리는데, 도시를 중세식으로 꾸며놓고 중세시장을 열며, 중세복장으로 축제를 즐긴다고 한다.
다리를 건너니 이곳에도 알베르게가 여럿 있지만 순례자들은 보이지 않는다. 아직은 출발하지 않은 것 같다. 오늘도 이 마을에서 현대자동차를 봤다. 그런데 지금까지와는 달리 승용차가 아니라 스타리아(Staria)란 MPV (multi-purpose vehicle)다. 앞에는 TAXI라고 쓰여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스타트랙 후속모델이라는데, 처음 보는 차였다.
이제부터는 자동차도로와는 무관하게 마을을 이어주는 농로를 따라 순례길을 계속 간다. 밭에는 일하는 주민들이 가끔 보인다. 지금까지 걸으면서 일하는 주민들을 본적 없었는데, 오늘 처음 본 셈이다. 너무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농사철이 아니어서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릴 때 기억으로는, 농촌에서 겨울 말고는 농사철 아닌 때가 없었는데 지금은 다른가 보다.
비야레스 데 오르비고(Villares de Órbigo) 마을을 지나는데, 창고 같은 곳에 탁자를 놓고 앉아있던 나이든 주민이 스탬프를 찍고 가라고 불러 세웠다. 호기심이 생겨 안으로 들어가니 벽면에 각국 지폐는 물론 온갖 잡동사니를 붙여놓았다. 우리나라 태극기도 보이고 심지어 누군가 해병대와 국민대학교 티셔츠도 벗어놓고 갔는지 벽면에 걸어놓았다.
오전 8시40분쯤, 산티바녜스 데 발데이글레시아스(Santibáñez de Valdeiglesias) 마을을 지나는데, 이때쯤 맥주 한잔 마실 타이밍이지만, 아쉽게도 이 마을에는 바르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마을을 지나는데 곧바로 오르막으로 이어진다. 아침도 제대로 먹지 않고 걷는 중이라 배가 고파오지만 달리 방법이 없으니 부지런히 걷는 수밖에 없다.
한동안 걸어 언덕꼭대기까지 갔더니 누군가 허수아비처럼 생긴 조형물을 만들어 놓았다. 그 옆에는 십자가도 있다. 하긴 이곳에서 십자가는 꽤 흔하게 볼 수 있다. 재료도 각양각색이다. 돌이나 나무, 철이나 콘크리트로 만든 등 다양하다. 이제 내리막길이 시작됐다.
그렇게 오르내리기를 반복하고, 앞서 가던 순례자들을 따돌리며 가다 보니 자전거 순례자 둘이 지나간다. 그중 한명은 나이가 어린 것 같은데도 잘 따라간다. 그러다가 얼마 후 자전거에 이상이 생겼는지 둘이 낑낑거리며 손보고 있었다. 내가 앞서갔지만, 이내 자전거를 고쳐 타고 오는 그들에게 다시 추월 당했다. 당연한 일이다.
오전 9시44분, 과일과 음료수를 팔고 있는 간이매점을 지났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걷는 동안 보지 못했던 순례자들이 여럿 앉아 쉬고 있다. 더러는 먹고 마시기도 한다. 하지만 둘러보니 내가 원하는 시원한 생맥주는 없어 사진 몇 장만 찍고 그들을 남겨둔 채 계속 걸었다.
그리고, 지평선을 향해 15분쯤 걸었더니 드디어 산토 토르비고 십자가 (Crucero de Santo Toribio)을 만났다. 십자가가 언덕 위에 있어서 오르막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평지를 걸어온 끝에 있었다. 그리고, 거기부터 내리막길이다. 길바닥은 자갈로 포장해놓았다.
5분쯤 내려가니 물을 마시고 있는 순례자 조형물(La Calabaza del Peregrino)이 있다. 사진으로 봤을 때는 물 마시는 시늉한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호리병에서 물이 입으로 계속 흘러 들어가고 있다. 어떻게 연결해놓은 건지 신기하다. 그 옆에 있는 수도에서도 물줄기가 계속 흘러내리고 있어 허리를 숙여 물을 몇 모금 마셨다. 여기부터는 산 후스토 데 라 베가(San Justo de la Vega) 마을이다.
다시 5분쯤 걸어 드디어 바르를 만났다. 우선 시원한 맥주부터 마신 다음 화장실까지 다녀오고 나서 바르를 나섰다. 자동차도로를 따라가나 싶었지만, 15분쯤 걷고 나니 순례길 표시가 오른쪽으로 나있다. 그리고 거기부터 아스토르가까지는 자동차도로를 만나지 않았다.
멀리 아스토르가 대성당(Catedral de Santa María en Astorga)이 보이는 곳에 철로를 건너는 육교가 설치돼있는데, 계단 없이 경사로만 있어서 오르내리는 거리가 꽤 길다. 이곳에는 계단이 많지 않다. 가끔 계단이 설치된 것도 있지만 되도록이면 경사로를 만드는 편인 것 같다. 그래서 구조물이 더 커길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아스토르가 마을안내판이 세워져 있는 곳에서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니 드디어 오늘 묵을 알베르게(Albergue de peregrinos Siervas de María)가 있었다. 앞서 도착한 순례자가 먼저 접수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내 차례가 됐다. 그런데, 이곳에는 1층 침대에 시니어, 2층 침대에는 주니어라고 표시돼있다. 나이에 따라 분배하는 것 같다. 나도 당연히 1층 침대를 배정받았는데, 공간도 꽤 넓다. 오랜만에 침대에 앉아도 머리 위에 여유가 있을 정도로 높은 침대였다.
씻고 수건을 빨아 널은 다음 점심을 먹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흐린 날은 언제 비가 올지 몰라 노심초사 하지만, 맑은 날은 또 너무 뜨겁다. 기온을 보면 아직은 30도도 안되는 것 같은데, 햇볕을 오래 받고 있으며 화상을 입을까 걱정될 정도다. 그래도 그늘로 가면 바로 시원해진다. 아마도 습도가 낮아서 그런 것 같다. 예전에 에티오피아에 있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었다.
한참 돌아다니다가 어느 식당 앞에 ‘오늘의 메뉴’ 간판이 눈에 띄어 직원에게 물어보니 오후 1시 반부터 먹을 수 있단다. 아직은 1시간 이상 남았다. 어쩔 수 없이 바로 옆에 있는 슈퍼마켓(Gadis Astoria)으로 들어가 저녁에 먹을 음식과 물, 그리고 치약을 사서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밖에서 시간 보내는 게 쉽지 않아서였다.
잠시 기간을 보내다가 식당에서 알려준 점심시감이 되어 다시 식당으로 갔다. 메뉴판을 갖다 주는데, 그림이 없으니 무슨 말인지 몰라 번역기로 찾아가면서 먹을 만한 것을 주문했다. 에피타이저는 샐러드인데, 나온 것을 보니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다. 지금까지 샐러드는 야채샐러드만 먹었는데, 오늘은 감자 위에 문어가 꽤 많이 올려져 있다. 처음 먹어보는 음식이다. 메인은 소고기. 흔한 음식이긴 해도 양이 꽤 많다. 그래도 남기지 않고 배불리 다 먹었다. 후식은 아이스크림을 선택했는데, 너무 딱딱해서 처음엔 먹기 불편했지만, 조금씩 녹이면서 먹으니 괜찮았다. 가격은 15유로, 가성비가 괜찮다.
오늘은 한국인 순례자들을 여럿 만났다. 자주 만나는 순례자도 있지만 대부분 얼굴만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다. 그들끼리는 좀더 친해 보이는 경우도 있었지만, 내 성격과 맞지 않으니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
저녁 7시쯤 식사하기 위해 식당으로 내려갔는데, 먼저 식사하고 있던 유럽 순례자가 볶음밥을 내밀면서 먹으라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저녁에는 점심 때 받아놓은 빵을 먹으려고 했던 건데, 밥을 먹게 됐다. 마트에서 사온 즉석식품을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밥을 비벼 먹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먹었으니 볶음밥을 담았던 그릇은 내가 설거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