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25일(화)
요즘은 새벽 5시 반에 알람을 맞춰놓고 자는데, 오늘은 순례자들이 그보다 더 일찍 일어나서 부스럭거려 잠을 더 잘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10분 일찍 일어나 간단하게 씻고 바로 출발했다. 그런데 먼저 일어난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출발이 늦다. 아침식사를 하고 가려는 건가?
화살표를 따라 10분쯤 걸어가니 아스토르가 대성과 가우디의 작품으로 유명한 주교관 건물(Palacio Episcopal de Astorga)이 보인다. 전에는 대성당 근처 알베르게(Albergue San Javier)에서 묵었기 때문에 대성당 구경을 했었지만, 어제는 어딘지 몰라 가보지 않았었다. 그리고, 30분쯤 걸어 아스토르가를 벗어났다.
이어서 발데비에하스(Valdeviejas) 마을 안내판이 보이지만 마을은 보이지 않는다. 잠시 후 길가에 있는 에쎄 오모 예배당(Ermita del Ecce Homo)을 지나는데, 여러 나라 말과 함께 한글로도 ‘신앙은 건강의 샘’이라고 써있다. 물론, 새벽이라 예배당 문은 닫혀있었다.
고속도로(A-6, Autovía del Noroeste)를 건너는 고가도로를 지나는데 왼쪽에 달이 떠있다. 보름이 며칠 전에 지나 조금 이지러지긴 했지만, 꽤 밝았다. 그리고 그 달은 해가 뜨고 한참 지난 후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며칠 전에 지고 있는 보름달을 보긴 했지만, 이렇게 오래도록 떠있는 달을 보는 건 처음이다.
거리표지석에 누군가 신발을 올려놓은 모습을 자주 본다. 올려놓기 위해 일부러 갖고 오진 않았을 텐데, 여기에 올려놓고 뭘 신고 갔지? 가까운 마을주민들이 올려놓지는 않았을 텐데, 알 수 없는 일이다.
6시40분쯤 무리아스 데 레치발도(Murias de Rechivaldo) 마을을 지나는데, 바르 문은 굳게 닫혀있다. 조금 이른 시간이긴 해도 이 시간에 문을 열어놓는 바르도 있긴 하다. 방금 전에 바르 벽면에 산티아고까지 245km라고 써있었는데, 조금 있다 만난 거리표지석에는 258.7km라고 돼있다. 이 정도면 차라리 거리를 표시해놓지 않는 게 나을 듯하다. 하긴 거리표시에 대한 의문이 여기서 처음 든 건 아니다. 한국에서도 산에 다니다 보면 들쭉날쭉한 거리표시를 보게 된다. 어떤 기준으로 어디를 기점으로 측정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특히 산길 거리는 어떻게 측정하는지 더 궁금하다. 평지에서야 미터기로 잴 수 있을 것 같은데, 계단까지 있는 돌길을 어떻게 정확하게 잴 수 있을까?
오전 7시 가까이 되어 뒤돌아보니 지평선에서 해가 떠오른다. 해 뜨는 시간이 조금씩 빨라진다고 생각했었는데, 오늘은 조금 늦은 것 같다. 하긴 하지(6월21일) 지났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왼쪽에는 아직도 달이 떠있다. 물론, 해가 뜨면서 그 밝기는 옅어졌다. 아니, 달의 밝기가 변한 건 아닌 것 같은데, 그 존재를 조금씩 잃어가고 있다.
숲길도 들길도 아닌 자동차도로 옆 잡풀이 우거진 순례길을 따라 가다 7시 반쯤 산타 카탈리나 데 소모사(Santa Catalina de Somoza) 마을 입구에 도착하고, 다시 4분쯤 더 걸어 출입구 옆에 태극기를 걸어놓은 오늘의 첫번째 바르에 들어가 토르티야와 커피로 아침식사를 했다. 그동안 한국인 순례자들이 하나 둘 들어온다.
바르를 나와 비슷한 풍경을 보면서 걸어간다. 앞서 가는 순례자를 따라잡고 조금 더 가다 보니 마을주민인 듯한 아니든 사람이 기념품을 팔기 위해 진열하고 있다. 다짜고짜 사진을 찍으니 좀 멋쩍어한다.
계속 가다 보니 이번에는 수염이 덥수룩한 젊은이가 다양한 도장을 갖다 놓고 찍고 가라고 한다. 하지만, 배낭을 풀러 순례자여권을 꺼내는 게 번거로워 사진만 찍고 그냥 간다. 그래도 젊은이는 활짝 웃으며 포즈를 취해준다. 하긴 순례자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나와있을 테니 그럴 만도 하겠다.
1시간쯤 더 걸어 다음 마을인 엘 간소(El Ganso) 바르에 또 들렀다. 2개 바르기 나란히 있는 곳인데, 왼쪽의 알베르게를 겸한 바르입구에는 태극기가 게양돼있지만,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오른쪽 바르로 들어가 맥주를 한잔 마시고 나왔다. 이제 목적지 라바날 델 카미노(Rabanal del Camino)까지는 쉴 곳이 없다.
라바날 델 카미노까지 2km(같은 곳에 있는 다른 표지판에는 3km라고 돼있다) 남겨둔 지점을 지나는데, 이번에는 젊은 여자가 기념품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다. 나 같으면 길을 걷다가 이런 곳에서 기념품을 살 것 같진 않은데, 그래도 장사가 되니 펼쳐놓고 있는 거겠지?
여기서 순례길은 나무가 우거진 숲길로 이어진다. 오늘은 맑은 날씨라 햇볕이 아주 뜨거웠는데, 그늘로 들어서니 시원하고 좋다. 그렇다고 땀이 마르진 않는다. 계속 걷고 있으니 땀이 날 수밖에 없다. 길 오른쪽엔 성긴 철조망이 쳐져 있고, 그 사이에 나무를 끼워 십자가를 만들어놓았다. 누군가 처음 시작했겠지만, 그 후로도 십자가 만들기가 계속 이어져 공간을 다 채운 것 같다. 조그만 나무기둥에 한글로 ‘힘내세요 파이팅’이라고 쓴 글도 보인다.
들판에 소들이 몇 마리 누워있다. 풀 뜯는 시간이 지난 건지, 아직은 쉬는 시간인지 조금은 게을러 보인다. 그리고 이내 라바날 델 카미노 마을입구에 도착했다. 화살표는 오른쪽을 가리키고 있지만, 오늘 묵을 알베르게(Albergue Nuestra Señora del Pilar)로 가려면 포장도로를 따라 왼쪽으로 가야 한다.
그리고 5분여 걸어서 10시17분, 드디어 알베르게에 도착했는데 청소가 한창이다. 그러면서 직원이 오픈시간은 11시라고 한다. 그래도 마당 한 켠에 있는 탁자에 앉아 기다릴 수 있게 해줬다. 땀을 많이 흘려 물을 한변 사서 시원하게 마시면서 시간을 보냈다.
11시 조금 전에 직원들이 티타임을 가지더니 11시10분이 지나서야 끝났다. 그리고 그때부터 접수하고 침대를 배정받았다. 방으로 들어가보니 1층 침대 높이가 너무 낮다. 어제는 앉아있어도 머리가 닿지 않았는데, 여기는 머리를 들기는커녕 목을 완전히 젖혀야 앉을 수 있는 정도다. 샤워부터 한 후에 세탁을 맡겼다.
점심 때가 됐으니 마을을 둘러보며 먹을 만한 게 있는지 찾아봤지만, 알베르게에서 먹는 게 나을 것 같다. 한글로 쓴 ‘필라르바르메뉴’를 벽면에 붙여놓았는데, 라면이 5.5유로 돼지고기 요리는 10유로였다. 밖에서는 이 정도 가격에 먹기가 쉽지 않다. 김치도 3.5유로에 따로 팔고 밥도 3.5유로였다.
점심에 처음으로 라면을 먹으려고 주문하려니까 기다리라고 하더니 1시간이 지나서야 주문을 받았다. 잠시 후 나온 라면을 먹어보니 국물이 엄청 맵다. 무슨 라면이지? 후추를 많이 넣어서 그런가? 애당초 김치를 주문할 생각이 없긴 했지만, 이 정도면 김치가 필요 없겠다. 면발도 파스타처럼 꼬들꼬들하게 삶았다. 그래도 맥주를 마시면서 먹으니 꽤 맛있다.
저녁에는 김치를 곁들인 돼지고기를 주문했더니 계란후라이도 2개나 줬다. 돼지고기는 김치와 먹고, 계란 노른자에 빵을 찍어먹으니 정말 맛있다. 김치도 누가 담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알맞게 익어서 새콤한 맛이 좋았다. 너무 감격해서 냅킨에 “김치가 알맞게 익어서 너무 맛있다”고 한글과 스페인어로 번역한 내용을 적어줬더니, 고마워한다. 오늘은 색다른 경험을 했다. 라면도 처음 먹어보고, 김치도 먹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