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일, 라바날 델 카미노에서 몰리나세카까지

by 이흥재

2024년 6월26일(수)


넓은 알베르게에 화장실이 하나 뿐이라 알람소리도 나기 전에 일찌감치 일어나 화장실부터 다녀온 후에 다시 누워있다가 알람소리와 함께 일어나 짐을 꾸려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어두운 곳에서 짐을 챙기다 보니 이것저것 두고 나온 게 있어 몇 번이나 침실을 들락거렸다. 처음엔 침대 머리맡에 두고 잔 안경이 보이지 않아 바닥을 손으로 훑으며 간신히 찾았는데, 몇 걸음 가다 모자를 두고 온 게 생각나 또 다시 침실엘 다녀와야 했다.


오늘은 나보다 먼저 출발한 순례자들이 꽤 있었다. 어제 단체로 왔던 고등학생인 듯한 애들도 앞에 무리 지어 가고 있다. 하지만 첫 마을인 폰세바돈(Foncebadón)에서 그들을 따라잡았다. 아침을 먹기 위해 바르에 들렀다 나와보니 그들도 밖에서 쉬고 있었다. 사진을 찍으니 포즈를 취해주는 애들도 있고, 찍기 싫다는 애도 있어서 두어 장 찍고 그들을 앞질러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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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세바돈(해발1,430m)까지도 꽤 높이 올라왔는데, 철십자가(Cruz de Ferro)가 있는 폰세바돈 고개(Puerto de Foncebadón)는 프랑스길에서 가장 높은 곳(1,504m)이라 아직도 계속 올라가야 한다. 그래도 폰세바돈에서 철십자가까지는 2km가 채 안되기 때문에 오래 걸리진 않았다.


오전 7시40분, 철십자가에 도착했는데, 어느새 많은 순례자들이 와있다. 언제나 비슷하지만 순례길을 걷는 동안에는 별로 보이지 않던 순례자들이 이런 스팟에는 많이 몰려있다.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순례길을 떠나올 때 손자한테 받아온 소원카드를 돌 틈에 놓고 사진을 찍었다. 전에는 십자가 기둥에 매달아놓았었는데, 지금은 기둥주위로 돌을 쌓아서 기둥에는 손이 닿질 않았다. 철십자가 주변에는 돌에다 직접 메모한 것들도 있고 사진도 여러 장 있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보지이 않는 존재에게 내 삶을 맡기는 건 비슷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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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도로 옆으로 난 순례길을 따라 다음 마을로 내려간다. 숲길을 지나기도 하고 산능선을 따라 걷기도 한다. 이곳은 갈리시아 지방과 가까워서 그런지 산들이 많아진다. 지금까지는 지평선 끝에 산들이 있었다면 지금은, 걷고 있는 곳도 산이고 주위가 겹겹이 모두 산이다. 그리고 한동안 보이지 않던 풍력발전기들이 많이 보인다. 가까이 있는 건 아니고 아주 멀리 구름보다 높은 곳에 설치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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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하린(Manjarín)에 도착하니 간이바르가 있다. 음료수와 커피 등을 파는데, 아침을 먹은지 얼마 안돼 그냥 간다. 그리고 이내 입구에 태극기가 걸린 허름한 집이 보인다. 호기심에 안으로 들어가보니 하얀 수염을 한 남자가 커피를 마시겠냐고 물었다. 대답은 “No!” 그런데 먼저 와서 커피를 마신 순례자가 얼마냐고 물으니 기부제(donativo)라고 한다. 그가 얼마를 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사진만 찍고 되돌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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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하린을 벗어나면서 보니 산비탈 초지에 소들이 풀을 뜯고 있다. 지난번 북쪽길을 걸을 때는 방목하는 소들을 많이 봤었는데, 이번에는 처음 보는 풍경이다. 그런데 경사가 너무 가팔라 위험해 보질 정도다. 저러다 미끄러져 넘어지는 건 아닐까, 괜한 생각까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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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구름에 가려지는 풍력발전기를 보면서 산능선을 따라 1시간 반쯤 걸어 아세보(El Acebo de San Miguel) 마을에 들러 맥주를 한잔 마셨다. 그런데 그동안 많이 올라간 만큼 급경사 내리막을 내려오는데, 길바닥은 온통 바위나 자갈로 가득해 긴장을 늦출 구가 없다. 맥주는 다른 곳보다 조금 비싼 2.5유로였다. 대신 안주를 많이 줬다. 0.5유로는 안주 값인가? 먹는 남은 마른 안주는 모두 싸왔다. 이정표를 보니 오늘 목적지 몰리나세카 (Molinaseca)까지 11km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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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보 마을을 벗어나 다시 산길을 따라 걸어 가까운 곳에 있는 리에고 데 암브로스(Riego de Ambrós) 마을에 도착했는데, 조그만 애들이 간이매점을 차려놓고 놀고 있다. 그중 큰애가 커피를 마시겠냐고 물었지만 대답은 역시 “No.” 그래도 큰애는 어떻게든 뭐라도 팔아보려고 하는 것 같은데, 막내인 듯한 여자애는 자꾸만 장난을 걸어온다. 나중엔 빵 한조각을 주면서 호객행위를 멈추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미안하다고 하면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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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도 가파른 내리막길은 계속된다. 그런데 신기한 건 누군가 이렇게라도 순례길을 만들어놨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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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리나세카를 3km쯤 남겨둔 지점에서 자동차도로를 벗어나 숲길로 접어들었는데, 마을주민이 체리를 차에 싣고 와서 팔고 있다. 한봉지에 2유로. 며칠 전에는 가게에서 사먹었는데, 길거리에서 또 샀다. 맛은 지난번보다 좀 새콤했지만, 물이 많아서 먹을 만했다. 그러나 양이 너무 많은 것 같아 걸으면서 만나는 순례자들에게 조금씩 나눠줬다. 그래도 내가 먹을 양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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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을 한참 동안 걸어가다 보니 저멀리 폰페라다(Ponferrada) 인 듯한 도시가 보이고 그 앞에 몰리나세카가 있다. 그렇지만 아직은 한참 더 내려가야 한다. 마을초입에는 산타아고까지 219.3km 남았다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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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서 처음 반겨주는 예배당(Ermita de Nuestra Señora de las Angustias)을 지나 왼쪽으로 다리(Puente Romano de Molinaseca)를 건너야 하는데, 입구를 막아놓고 공사 중이어서 조금 더 내려가 그곳에서 다리를 건너 마을로 들어갔다. 그리고 처음 만나는 주민한테 오늘 묵을 알베르게(Albergue Compostela) 위치를 물으니 조금 더 가라고 한다. 그렇게 조금 더 가니 쉽게 알베르게를 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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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시48분 알베르게에 도착했는데, 한창 청소 중이었다.그러면서 12시 반에 오픈이니 짐을 두고 나갔다 오라고 한다. 배낭을 안으로 들여놓고 점심을 먹기 위해 마을로 들어갔다. 이곳저곳 기웃거리다가 문을 연 바르에 들어가 돼지고기를 넣은 바게트 샌드위치와 맥주로 점심을 먹었다. 그런데 바게트가 너무 딱딱해서 다 먹지 못하고 싸들고 알베르게로 와서 접수를 마친 후에 마저 먹었다. 여기서는 바게트가 참 흔하다. 오늘처럼 샌드위치도 대부분 바게트로 만들고, 식사할 때도 서비스로 바게트를 몇 조각 준다. 이곳 사람들도 그런 것에 익숙해서 바게트를 소스에 찍어먹기도 하고 올리브오일을 뿌려먹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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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때 마신 맥주 때문인지 오늘따라 너무 졸려서 침대에 한동안 누웠다가 마을구경을 하기 위해 다시 나갔다. 마을 끝까지 가니 일본사람들이 2009년 새운 카미노 우교기념비(Camino 友交記念碑)가 있다. 순례자복장을 한 야고보가 고개를 치켜들고 있는 모습이다. 우리나라도 제주 올레길 1코스에 순례길 표지석을, 산티아고 순례길 몬테 도 고소(Monte do Gozo)에 간세와 돌하르방을 각각 세워놓았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너무 유명하다 보니 뭔가 인연을 맺으려는 활동을 많이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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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한바퀴 돈 후에 드디어 순례자메뉴 파는 곳을 알아놨는데, 시간이 표시돼있지 않아 몇 시부터 식사가 가능한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6시 반쯤 다시 가보고, 팔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또 대안을 찾아야 한다. 인터넷을 보면 오늘 묵는 알베르게에서도 저녁식사를 할 수 있다고 했지만, 주인에게 물어보니 마을로 나가서 사 먹으라고 한다.


느지막이 일기를 쓰다가 6시 반쯤 저녁을 먹기 위해 낮에 봐놨던 식당으로 갔다. 강(Río Meruelo) 바로 옆에 있는 식당이었는데, 단체로 걷고 있는 학생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수영복을 입고 물에서 놀기도 하고 잔디밭에 앉아 얘기도 하고 있었다. 그 속에는 마을주민들도 나와 애들을 구경하면서 앉아있었다. 어린 애들의 비키니 입은 모습이 조금 민망해 보이긴 했지만 재미있는 장면이어서 멀리서나마 사진을 찍었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식당으로 들어가 순례자메뉴를 주문해 먹었다. 가격은 13.5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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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는 독방에서 잠을 잤다. 한방에 2층 침대 2개가 있어 4인용 방이었는데, 찾는 순례자들이 많지 않아서였다. 덕분에 잠을 아주 잘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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