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27일(목)
넓은 방에서 혼자 잠을 잤더니 아침에 일어나서도 불을 켜고 출발준비 할 수 있어 너무 편하고 빨리 할 수 있었다. 물론, 방에 출입문이 따로 없어 너무 시끄럽게 하면 옆방에 방해될 수 있어서 조심하면서 배낭을 꾸리긴 했다.
15분쯤 걸어 산타 마리나 알베르게( ) Albergue Santa Marina 를 지나는데, 캄포 (Campo) 3km, 폰페라다(Ponferrada) 7km란 이정표가 보인다. 그리고 맞은편에 ‘MOLINASECA’ 이름사인에 불을 밝혀놓고 있었다. 좀전에 마을을 벗어나면서 분명히 몰리나세카 마을이 끝난다는 표지판을 봤는데, 여기 이름사인을 세워놓은 이유가 뭔가? 그 경계를 모르겠다.
오늘도 달이 중천에 떠있다. 조금씩 이지러지고 있어 곧 반달이 될 모양새다. 어떤 마을을 지나는데 마을이름이 써있지 않아 어딘지 모르겠다. 지도상 첫 마을은 캄포였는데, 그곳까지는 4.4km여서 아직은 한참 더 가야 한다. 그리고 폰페라다로 순례길이 이어지는가 했는데, 길은 정면에 보이는 폰페라다가 아닌 왼쪽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래도 달리 방법이 없어 화살표를 따라 걷다 보니 순례길은 폰페라다 외곽으로 이어졌다. 캄포에서 바르를 만나지 못하고 폰페라다에서도 외곽으로 돌면 바르를 만나지 못해 아침을 굶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폰페라다 성(Castillo de los Templarios= Castillo de Ponferrada)을 지나니 바르가 나왔다. 얼른 들어가 토르티야와 커피로 아침식사를 하고 나오니 요즘 자주 만나는 단체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온다. 그중에는 몇 번 봤다고 아는 체하는 애들도 있다. 그런데 무리에 섞이면 빨리 걸을 수 없을 것 같아 얼른 앞서 걸었다.
다른 코스에서도 6년전 걸었던 기억이 많이 나지 않았지만, 오늘 코스는 6년전에 출발 전부터 비가 내린다는 핑계로 몰리나세카에서 폰페라다까지 택시를 타고 간 후 폰페라다에서 카카벨로스(Cacabelos)까지 버스로 이동했던 곳이라 처음 걷는 구간이다.
오늘 구간은 약간의 오르막 말고는 걷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표지판도 잘 설치돼있어 길 잃을 염려도 없다. 한적한 자동차도로를 따라 가기도 하고 마을길도 지난다. 걷다 보니 콜룸브리아노스(Columbrianos) 마을표시가 있는데, 별다른 시설이 없어 그냥 지나친다.
정면 파사드에 산티아고 그림이 인상적인 산 브라스 이 산 로케 예배당 (Ermita de San Blas y San Roque)을 지나 푸엔테누에바스(Fuentesnuevas) 마을 바르에서 두번째 휴식하면서 맥주 한잔을 곁들였다. 언제나처럼 땀흘려 걸은 다음 마시는 맥주 맛은 정말 좋다. 이러니 한국에서는 거의 마시지 않는 맥주를 이곳에선 매일 마시게 된다.
마을을 벗어나려는데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해 처마 밑에서 배낭커버를 씌웠다. 아직은 비옷까지 입을 정도가 아니라 그냥 걸었다. 비옷을 입으면 땀이 나서 옷이 젖는데, 비에 젖으면 비가 그치면서 옷이 바로 마르지만 비옷을 입고 있으면 그렇지 않아서다. 그런데 걸을수록 비가 점점 많이 내려 어쩔 수 없이 나무 아래서 비옷을 꺼내 입었다. 하지만 결국 옷이 다 젖었다. 그러면서도 비옷을 입어야 하는 이유는 배낭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젖은 옷은 세탁만 하면 되지만, 배낭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다.
오랜만에 비를 맞고 있는 넓은 포도밭을 지난다. 라 리오하를 지난 이후 이렇게 넓은 포도밭은 처음이다. 줄기를 살펴보니 포도송이가 조그맣게 매달려 있다. 이 열매는 뜨거운 여름을 견디면서 와인 만들기에 적당한 포도로 익어갈 것이다.
오늘도 길가에서 기념품 파는 남자를 만났다. 지금까지는 여자나 나이 많은 남자가 팔고 있었는데, 오늘은 비교적 젊은 남자다. 하지만 맑은 날도 팔기 힘들 텐데, 오늘처럼 비까지 내리니 누가 여기서 배낭을 열 수 있을까? 하긴 주머니에 돈을 넣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을 테니, 기다려볼 수도 있겠다.
이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는 200km가 채 남지 않았다. 하지만 200km가 남았다는 표시는 어느 바르 입구에서만 봤고, 표지석은 그냥 건너뛰어 198.5km만 있다. 백km 단위로 표시해놓으면 괜찮을 것 같은데. 하긴 북쪽길에서는 100km 표지석도 없었다. 그래도 프랑스길에서는 100km 표지석은 있다.
비를 맞으며 걷다 보니 카카벨로스 마을표지판이 보인다. 하지만 마을까지는 조금 더 가야 한다. 추적추적 비를 맞으며 순례자메뉴를 팔고 있는 식당으로 들어가 지금 먹을 수 있냐고 했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한 다음 확인해보고 자리에 앉으라고 한다.
메뉴판을 보고 에피타이저로 가스파초를 시켰는데, 말만 들어봤을 뿐 먹어보긴 처음이다. 약간 새콤하고 차가운 음식인데, 사진으로 봤을 때는 건더기도 있었지만 이 가스파초는 완전 국물 뿐이다. 그래도 맛은 좋고 함께 나온 바게트를 찍어먹으니 그 또한 괜찮다. 메인은 돼지고기를 주문했는데, 양이 너무 적다. 고기크기도 함께 나온 감자튀김만 하고 양을 그보다 적다. 다행히 바게트를 몇 개 먹었더니 배가 고플 정도는 아니다. 후식으로 요구르트까지 먹고 계산을 끝내고 나니 비가 그쳤다. 그래서 비옷을 한손에 걸쳐 들고 킨타 앙구스티아 성당(Santuario de Quinta Angustia)에 있는 알베르게 (Albergue de peregrinos de Cacabelos)로 향했다.
낮 12시에 문을 여는 알베르게에 도착한 시각은 그보다 좀 전이었는데, 직원이 나와보고 잠시 기다리라고 해서 결국 12시에 알베르게로 들어가 첫번째로 접수를 마쳤다. 이곳은 방 한칸에 1층 침대 2개가 나란히 있는 구조다. 그런데 지금은 나혼자만 들어와있다. 어쩌면 오늘도 독방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제시하고 있는 구간대로 걷는 경우가 많다 보니 이곳에 들르는 순례자들이 많지 않은 것 같다. 즉, 어제는 폰세바돈에서 폰페라다까지 걷고, 오늘은 폰페라다에서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Villafranca del Bierzo)까지 걷는 식이다. 하지만 나는 무리하지 않게 하루 걷는 거리를 나눴기 때문에 이곳에서 묵게 된 것이다.
이 알베르게가 마을과 조금 떨어져있긴 해도 쉬엄쉬엄 마을까지 걸어가서 저녁을 먹어도 되지만, 점심 때 순례자메뉴를 먹었기 때문에 저녁은 낮에 슈퍼마켓에서 사온 즉석식품으로 대신할 것이다. 처음으로 복숭아 통조림도 하나 샀고, 납작복숭아와 오이도 있으니 그럭저럭 한끼는 될 것 같다. 게다가 점심 먹을 때 받아둔 조그만 빵도 하나 있으니 이거면 충분하다.
6시 반쯤 되어 먹을 걸 가지고 전자레인지가 있는 곳으로 갔다. 이 알베르게에는 주방은 물론 냉장고도 없고, 커피포트와 전자레인지가 전부다. 그래도 그릇은 몇 개 있길래 파에야를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그리고 숟가락과 칼을 찾아보니 없다! 뭐, 이런 일이 다 있나? 접시 등은 있는데 숟가락이 없다니!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그런데 숟가락 없이는 밥을 먹을 수 없으니 숟가락부터 구해야 한다.
먹을 걸 전부 방에다 다시 갖다 놓고 숟가락을 구하기 위해 시내로 나갔다. 낮에 들렀던 마트에 가면 있을 것을 생각돼 가고 있는데, 더 가까운 곳에 온갖 물건을 팔고 있는 중국상점이 있어서 들어갔다. 그리고 중국인으로 보이는 주인한테 스푼 있냐고 물었더니 없단다. 진열해놓은 물건들을 보니 분명히 스푼도 있을 것 같은데 없다니! 그래도 안으로 들어가서 찾아보니 역시 스푼이 있다. 주인은 아마도 ‘수프’로 알아들었나? 아무튼, 스푼을 찾았으니 다행이다. 오이를 깎아먹으려면 칼도 필요하지만 한번만 쓸 것 같아 오이는 씻어서 껍질째 먹기로 하고 칼은 사지 않았다.
다시 알베르게로 돌아와 먹을 걸 들고 야외식탁으로 가서 맛있는 저녁식사를 했다. 대단한 건 아니지만 다양하게 차려놓고 먹으니 나름대로 그럴 듯했다.
방으로 돌아왔는데, 실내에 있어도 너무 덥다. 옷을 벗고 있어도 감당이 안되고, 문을 열어놓아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동안은 덥다가도 그늘로 들어가면 괜찮았는데, 왜 이렇게 더운지 모르겠다. 결국 침낭을 덮지도 않고 잠을 잤다. 순례자가 더 이상 오지 않아 오늘도 결국 독방을 차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