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일, 카카벨로스에서 트라바델로까지

by 이흥재

2024년 6월28일(금)


엊저녁에는 너무 더워서 침낭도 덮지 않고 잤더니 밤중에 추워서 깼다. 깬 김에 화장실에 다녀온 후 침낭 속으로 들어가서 남은 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났는데도 계속 추웠지만 옷을 다 입고 출발하니 견딜 만하다. 아니, 조금 걷다 보니 바로 더워졌다.


얼마 전까지는 마을들이 떨어져 있어서 경계구분이 명확했는데, 여기는 경계가 애매하다. 즉, 카카벨로스 마을이 끝났다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는데도 집들이 계속 있고, 거기에는 다른 마을표시가 없으니 이 집들은 어느 마을에 속한 건가?


그리고 조금 가다 피에로스(Pieros) 마을을 지나는데 큰 길 옆에는 집들이 별로 없고, 당연히 바르도 없다. 아니, 큰길 가에 바르가 있긴 한데 문이 닫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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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가다 삼거리를 만났는데, 화살표가 오른쪽으로 나있어 따라가다 보니 아무래도 방향이 이상하다. 6년전에도 이 길로 갔다가 길을 잃고 헤맸던 곳인 것 같아 되돌아 나와 큰길을 따라 걷기로 했다. 그렇게 한참 걷다 보니 오른쪽으로 표지석이 있어서 그 길로 따라갔다. 그런데 정면에 보이는 마을이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라고 생각했는데, 순례길은 계속 오른쪽으로만 가는 것 보니 잘못 생각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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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막을 오르면서 포도밭을 지나고 또 내려가면서도 온통 포도밭이다. 그리고 와인양조장도 있었다. 이곳도 와인을 꽤 많이 생산하나 보다. 밭 가장자리에 있는 포도나무를 보니 포도송이가 탐스럽게 열려있다. 아직은 알맹이가 아주 작지만 여름을 지나면서 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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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순례자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의 산티아고 성당(Iglesia de Santiago en Villafranca del Bierzo)을 지나고 첫번째 바르에 도착해 크루아상으로 아침을 먹었다. 지나오면서 보니 문을 연 바르들이 여럿 있었지만, 그 사정을 알 수 없으니 처음 보이는 바르에 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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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는 지난 2019년 3월, <스페인하숙>이란 프로그램으로 한국인들에게 유명해진 마을이고, 차승원과 유해진이 운영하던 알베르게를 호기심으로 찾아가는 한국인들도 있을 테지만, 나는 일정상 이 마을에서 묵을 수 없어 그 알베르게가 어디 있는지조차 모른다.


이 마을을 지나면서 재미있는 모습을 봤다. 아직 문을 열지 않는 가게 안에 소주와 라면, 심지어 쌀떡박스까지 일렬로 쌓아놨다. 보아하니 둘 곳이 없어서가 아니라 홍보하기 위해 쌓아놓은 게 분명해 보인다. 요즘은 한국인들 말고도 한국음식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다. 그래서 보여주기 위해 이렇게 쌓아놓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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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벗어나는 곳에 ‘187 Villafranca del Bierzo’란 표지석이 보인다. 산티아고까지 187km 남았다는 표시일 거다. 하지만 좀전에 지나온 바르 옆에는 184km로 써있었고, 길가에 있는 다른 표지판에는 200km로 돼있으니 정확하게 남은 거리를 알 순 없다. 그리고 얼마 안가 카스티야 이 레온 자치지방에서 185.8km란 표지석을 설치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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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6 고속도를 지나면서 순례길은 3차선 포장도로 한켠을 막아놓은 형태로 바뀌었다. 포장도로 옆을 지나는 순례길은 많았지만 이렇게 도로 한쪽을 막아서 순례길로 쓰는 경우는 처음이다. 오른쪽으로 차들이 쌩쌩 달리지만 콘크리트로 튼튼하게 경계를 막아놓아 염려할 게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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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깎아 만든 도로나, 바위가 깨져 떨어지지 않도록 비탈에 쳐놓은 철망 등을 보면 한국지형과 닮은 데가 많다. 얼마 전까지는 끝없는 지평선을 따라 걸었었는데, 여기는 아기자기한 산 사이로 난 길을 지나고 조그만 산을 넘기도 하면서 산과 많이 가까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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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쯤 페레헤(Pereje) 마을을 지나는데, 바르는 보이지 않고 마사지 광고지가 붙어있다. 전에 라바날 델 카미노에서도 본적 있다. 아무래도 걷는 게 피곤하기 때문에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나 보다. 마을을 벗어나는 곳에 오늘 목적지 트라바델로(Trabadelo)까지 4km 남았다는 표지판이 보인다. 1시간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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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풍경의 순례길을 걸어 9시40분쯤 트라바델로 마을초입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다른 마을들과 마찬가지로 마을을 알리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산티아고까지 179km 남았다는 표지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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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우거진 숲길을 15분쯤 걸어 이번에도 첫번째 바르에 들어가 맥주를 한잔 마셨다. 그런데 아직 10시도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작정 더 걸어갈 수도 없다. 다음 마을에 대한 알베르게 정보도 없고, 무엇보다 앞으로의 일정이 꼬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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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를 나와 알베르게로 가보기로 한다. 오늘 묵으려는 알베르게(Albergue parroquial Trabadelo)는 6년전에도 묵었던 곳이다. 10시25분, 알베르게에 도착해보니 입구에 ‘call the bell’이라고 써있는데 벨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딸각거리는 손잡이를 몇 번 두드렸더니 안에서 직원이 나와서 바로 접수를 받아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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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알베르게에서는 주방을 이용할 수 없으니 밖에서 사먹어야 한다면서 노바 루타(Nova Ruta)란 레스토랑을 소개해줬다. 그곳에서 순례자메뉴를 판다고 했다. 우선 씻고 수건을 빨아 널은 다음 식당을 찾아나섰다. 처음엔 언덕을 내려가 오른쪽으로 가다 지도를 찾아보니 반대방향이다. 뜨거운 햇볕을 맞으며 식당엘 갔더니 ‘오늘의 메뉴’는 오후 1시부터 먹을 수 있다고 했다. 2시간 가까이 기다려야 하는데, 너무 배가 고프다. 어쩔 수 없이 오늘도 토르티야와 맥주로 점심을 먹었다. 그런데 오늘 먹은 토르티야는 계란이 많이 들어가서 그런지 다른 곳에서 먹은 것보다 부드럽고 맛이 좋다. 저녁식사는 7시 반부터 가능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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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시간에 맞춰 식당으로 가서 ‘오늘의 메뉴’를 주문했다. 에피타이저는 콩과 오징어를 넣은 수프, 메인은 돼지갈비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디저트를 고르라는데, 따로 가격이 쓰여있다. 추가요금을 내라는 건가? 의사소통이 원활치 않아 직원과 약간 실랑이를 벌이다가 어쩔 수 없이 가격이 제일 싼 신선과일을 택했다. 전에도 잘못 주문하는 바람에 디저트에 대한 추가요금을 낸 적이 있어서 조심스러웠다. 그래도 과일은 2.5유로이니 큰 부담은 아니었다. 물론 다른 디저트들도 4유로 이하였으니, 비싸다고 할 순 없어도 추가로 지불하긴 좀 아까웠다.


콩과 오징어를 넣은 수프는 뜨거워도 먹을 만했다. 콩을 씹는 식감이 좋진 않아도 못 먹을 정도는 아니다. 갈비로 생각보다 양이 적긴 했지만, 감자튀김이 아닌 샐러드와 구운 파르리카를 곁들여 먹으니 아주 편하게 먹을 수 있었다. 디저트로 나온 과일은 체리와 닮았는데, 맛은 달랐지만 꽤 괜찮은 맛이었다. 식사를 끝내고 계산하러 갔더니 디저트 요금을 따로 받지 않고 14유로였다. 그래도 과일 맛이 괜찮았으니 다른 디저트를 못 먹은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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