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18일(화)
오늘아침에도 평상시처럼 일어나서 준비를 마치고 알베르게 밖으로 나왔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잘 모르겠다. 우선 대충 방향을 잡고 가고 있는데, 새벽녘에 차를 몰고 나왔던 마을주민이 창문을 열고 순례길 방향을 알려줬다. 그런데, 그 방향이 아니다. 마을주민도 뭔가 내 행동이 이상했던지 차를 돌려오더니 경적을 작게 울리면서 따라오라고 했다. 그제서야 방향을 잡고 걸어가긴 하는데, 마을을 벗어나도록 순례길 표시가 없다. 그래도 마을주민이 가르쳐줬으니 계속 걸어가다 마을을 벗어날 무렵 드디어 순례길 표시를 만났다.
순례길은 자동차도로와 나란히 나있었는데, 이정표를 보니 오늘 목적지인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Carrion de los Condes)까지 18km라고 돼있다. 그리고 순례길은 다음 마을까지 쭉 뻗은 직선도로다. 그런데 그곳에 카미노 표지석이 너무 많다. 하긴 농로와 연결된 곳마다 설치한 것으로 봐서 차량진입 금지표시 같기도 하다.
직선도로를 20분쯤 걸어 첫번째 마을 포블라시온 데 캄포스(Población de Campos) 초입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시 5분쯤 더 갔더니 문을 연 바르가 보여서 얼른 들어갔다. 그런데 평소처럼 화장실부터 가려고 했더니 주문부터 하고 가란다. 그래서 샌드위치와 오렌지주스를 시켰더니 그제서야 주인이 화장실 열쇠를 건네줬다. 스페인에 와서 많은 바르를 들락거렸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화장실만 이용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긴 하겠지만, 다른 곳에서는 화장실 하는 걸 제지하는 경우가 없었다. 더구나, 그 바르는 와이파이도 되질 않아 SNS를 할 수도 없었다.
바르를 나오니 하늘에 검은 구름이 가득하다. 언제 비가 내릴지 몰라 배낭커버를 씌우고 마을을 벗어나니 또 다시 직선도로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똑같이 높낮이도 거는 평평한 도로다. 그렇게 30분쯤 걸어 두번째 마을인 레벵가 데 캄포스(Revenga de Campos)에 도착했는데, 너무 조금 걸은 것 같아 바르를 찾지 않고 계속 갔다. 다음 마을쯤에서 맥주라도 한잔 마시기 위해서였다.
비슷한 도로를 20분쯤 걸어 세번째 마을인 비야르멘테로 데 캄포스 (Villarmentero de Campos)에 도착했는데, 이 마을엔 바르가 안 보인다. 그래, 아직은 쉬지 않아도 괜찮아! 다시 다음 마을로 걷기 시작한다. 그런데, 걸어오면서 한가지 특이한 걸 발견했다. 자동차도로가 왕복 2차선인데도 제한속도가 90km나 된다. 우리나라는 60~70km쯤 되지 않나? 앞이 탁 트인 도로라서 그런가? 마을에 진입하는 속도도 50km다. 이 또한 우리나라는 30km정도 될 거다.
비야르멘테로 데 캄포스 마을을 벗어나 쉬지도 못하고 또 걷는다. 이번에는 약간 오르막이 있는 직선도로를 따라 비얄카사르 데 시르가(Villalcázar de Sirga) 마을을 지나는데, 길가에 바르표시가 보인다. 하지만 바르를 찾아갔더니 문이 닫혀있다. 이제는 맥주 한잔 마실 시간이지만, 어쩔 수 없다. 마을을 벗어나면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처음엔 조금 맞으면서 걸었지만 빗방울이 점점 굵어져 배낭을 내려놓고 비옷을 꺼내 입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은, 이 마을에 들르지 않고 직선도로를 따라 계속 걸어갔기 때문에 산타마리아 라 블랑카 성당(Iglesia de Santa María La Blanca) 앞에 있는 포토스팟인 순례자상(Monumento al Peregrino)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걷는 내내 어느 마을에서 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는데, 6년전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니 그 마을이 바로 비얄카사르 데 시르가였다. 한번 본 모습이긴 하지만, 다시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비는 계속 오락가락 한다. 비옷을 입어도 옷이 젖긴 마찬가지지만 배낭을 보호해야 하니 비가 오지 않아도 비옷을 계속 입고 걸었다. 이정표를 보니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Carrión de los Condes)까지 6km 남았다. 먼 거리는 아니지만, 아침을 먹고 난 후에 한번도 쉬지 않고 걸어온 터라 어깨도 아프다. 하지만 비옷을 입고 있어서 배낭을 추스르기도 쉽지 않다.
오늘은 18km의 직선도로를 따라, 아침을 먹기 위해 한번 쉰 것 말고는 계속 걸어서 10시쯤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의 바르에 들어가 드디어 맥주를 한잔 마셨다. 점심을 먹기에 좀 이른 시간이다. 오늘 묵으려는 알베르게(Albergue Espíritu Santo)은 오픈시간이 11시 반이라 아직 시간도 많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맥주를 마시면서 오래 앉아있기도 애매해서 알베르게를 찾아 나섰다. 오늘 알베르게를 택한 기준은 제일 빨리 오픈하는 거였다. 지난번 묵었던 알베르게(Albergue parroquial Santa María)와도 다른 곳이다. 지도에서 알베르게를 찾아 돌아다니다 보니 가까운 곳에 있는 걸 찾지 못하고 한바퀴 돌게 됐다. 그런데 아직은 11시도 되지 않아 당연히 문은 닫혀있다. 아니, 출입문은 닫혀있지만 창문은 열려있었다. 알베르게에는 순례자 한 명이 더 와있었고, 배달돼온 배낭들도 여럿 보였다.
조금 기다리니 나이 든 여자가 나와서 아직은 시간이 남았으니 기다리라고 하고 들어갔는데, 잠시 후 이번엔 나이 든 남자직원이 나오더니 여권과 순례자여권을 달라고 했다. 그래서 오늘도 첫번째로 접수를 마치긴 했는데, 아직 청소가 덜 됐다며 기다리라고 했다. 그리고 청소하는 직원과 잠시 얘기하더니 드디어 2층에 있는 방으로 안내해줬다.
이 알베르게는 특이하게 1층 침대만 놓여있었다. 상태가 좋아 보이진 않지만, 2층이 없으니 앉아있기 편해서 좋다. 짐을 내려놓고 씻은 다음 수건만 빨아 널었다. 오늘은 비를 맞아서 세탁기를 돌려야 하나 생각했지만 오는 동안 옷이 다 마르기도 했고, 여기엔 세탁기가 없는 것 같아 내일로 미뤘다.
이제 점심을 먹어야겠는데 마땅한 곳이 없다. 아니, 있긴 한데 점심과 저녁을 같은 메뉴로 먹는 게 부담스러울 수 있어서 점심을 간단하게 먹으려니까 선택하기 쉽지 않다. 바르에는 점심으로 먹을 마땅한 음식이 없어서 물을 사온 마트엘 다시 가봤지만 거기도 별로 없다. 그래도 굶을 수는 없고 빵으로는 안될 것 같아 진열대를 살펴보니 밥 위에 고기가 올려진 즉석식품 그림이 보인다. 그래서 그걸로 선택했다.
그런데, 숙소로 가져와 전자레인지에 데운 다음 포장을 뜯으니 밥 뿐이다. 그림에는 분명 고기가 있었는데, 따로 준비해서 먹으란 거였나? 결국 아무런 반찬도 없이 맨밥으로 점심을 때웠다. 다행히 밥은 약간의 간이 돼있어서 오래 씹으면 고소한 맛도 났다. 지금까지 먹은 점심 중에서 가장 약소했던 것 같다.
점심 먹을 걸 찾아다니다가 저녁에 먹을 메뉴를 찾아놓았다. 지난번 왔을 때도 저녁 먹은 식당인데, 안내판에 ‘오늘의 메뉴’와 태극기도 있어 정감이 가는 식당이다. 다른 안내판을 보니 숙소도 겸하는 곳인 듯한데, 거기엔 ‘객실’이라고 쓰여있다. 하지만 잠자는 곳은 따로 있으니 상관없다.
식당의 저녁식사 시간은 오후 7시30분부터. 시간 맞춰 식당에 갔더니 사람들이 아주 많다. 순례자들도 있지만 마을주민들도 꽤 많은 것 같다. 처음엔 ‘오늘의 메뉴’만 있는 줄 알았는데, 메뉴판을 보니 다양한 음식들이 있다. 그중에는 ‘오늘의 메뉴’ 말고도 맘에 드는 음식이 있긴 했지만, 그냥 ‘오늘의 메뉴’를 주문했다.
그런데, 종업원 아가씨 말이 너무 빨라서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한번 더 물어본 후에 에피타이저로 어니언수프를 메인은 갈비를 주문했는데, 괜찮은 선택인 것 같다. 디저트는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와인도 주는 대로 다 마셨더니 3잔이나 마시게 됐다. 꽤 빨리 먹었다고 생각했는데도 계산을 마치고 나니 8시40분이나 됐다. 1시간 이상 먹은 셈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보다 훨씬 오래 걸리는 것 같다.
아직은 밖이 훤하지만 내일의 여정을 위해 알베르게로 돌아와 낮에 빨아놓은 수건을 들고 침대로 갔다. 낮 동안 비가 내리고 흐려서 그런지 수건이 다 마르지 않아 침대 옆에 걸어놓고 잠을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