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일, 포르토마린에서 팔라스 데 레이까지

by 이흥재

2024년 7월3일(수)


여럿이 한방에 모여 잠을 자면 코 고는 사람은 늘 있다. 오늘 새벽에도 화장실에 다녀온 후 코 고는 소리 때문에 결국 잠을 설쳤다. 일찍 일어나는 사람은 없었지만 화장실 들락거리는 소리에 알람보다 일찍 일어나 화장실에 갔더니 누군가 먼저 사용하고 있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올라와 짐을 꾸렸다. 오늘도 여전히 제일 먼저 알베르게 밖으로 나갔지만, 다른 알베르게에 묵었던 순례자들 몇 명이 앞서 걸어가고 있다.


일본에서 친선을 위해 거리표지석을 세워놓은 게 있는데 91.5km다. 하지만 갈리시아 정부가 세워놓은 표지석에는 91.953km로 돼있다. 이 표지석이 세워져 있는 위치까지 감안하면 1km쯤 차이가 난다. 이왕 세워놓는 거 다른 곳에 있는 걸 참조해서 맞춰놓으면 어떨까? 91.953km 표지석과 나란히 오른쪽 화살표를 나타내는 표지석(complemenato)도 세워져 있지만, 어디로 가는 건지는 모르겠다. 91.512km 표지석은 출발한지 14분만에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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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한지 1시간쯤 지나면서 안개가 짙어진다. 며칠 전 오 세브레이로에 도착할 때도 비가 오는 듯한 짙은 안개가 낀 적 있었는데, 오늘도 마찬가지다. 가로수를 지날 때마다 나뭇잎에 맺혀있던 안개로 인한 물방울들이 비오는 것처럼 떨어진다. 비오는 날에는 나무 밑으로 들어가 조금이라도 비를 피할 수 있는데, 지금은 나무 밑으로 들어가면 비가 내리는 것 같은 희한한 현상이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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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오르막길이 꽤 있다. 갈리시아지방에 산이 많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산이 많아서인지 해도 늦게 뜬다. 그나마 오늘은 안개가 걷히고 해를 보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11시는 돼서야 햇빛을 봤다.


걷는 동안 몇 번 마주쳤던 한국인 모녀를 오늘아침에도 만났다. 전에 헤어질 때 나보다 한 마을 더 간다고 했었기 때문에 앞서 간줄 알았는데, 컨디션이 좋지 않아 사리아에서 이틀 묵으면서 일정이 늦어졌다고 했다. 잠시 얘기를 나누다가 내가 앞서 갔지만, 아침식사 하는 바르에서 다시 만났다. 그리고 또 다시 내가 먼저 출발했는데, 결국 숙소에서 다시 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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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비슷한 여러 마을을 지나고 어느 바르에 들러 맥주를 마시며 화장실까지 다녀왔다. 좀전에 아침식사를 한 곳은 와이파이도 되지 않는데다 화장실 이용도 불편해서 이제서야 다녀오게 된 것이다.


안개가 짙어도 가까이 있는 화살표는 확인할 수 있으니 걷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주위가 어두우니 경치를 구경할 수 없다. 엊그제 가족들에게 사진을 보냈더니 스페인 날씨가 참 좋다고 감탄했는데, 그런 사진만 골라 보내서 그렇다. 특히 갈리시아지방 날씨는 스페인에사도 안 좋기로 유명하다. 비도 많이 내리고 지금처럼 안개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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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시30분쯤, 갈리시아정부에서 세워놓은 78.1km라고 새겨진 색다른 거리표지석을 지났는데, 20분쯤 더 걸어가니 78.319km 표지석이 또 있다. 이 정도면 낭비다. 맞지도 않는 시설물을 뭣 하로 설치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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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는 순례자들이 여럿 있다. 대부분은 내가 앞질러 가지만 나보다 빨리 걷는 이들도 더러 있다. 특히 둘 이상이 함께 걸으면서 나보다 빨라 가는 건 쉽지 않다. 그만큼 다들 잘 걷는 것 같다. 그래도 한참 걷다 보면 이런저런 이유로 내가 그들을 앞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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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시 반이 지나면서 안개가 조금씩 걷히기 시작한다. 하지만 안내가 모두 없어지고 햇빛이 나기 시작한 것은 11시쯤 돼서다. 경험상 안개는 아침에 생겼다가 해뜰 무렵이면 대부분 걷히는데 이곳 안개는 참 유별난 것 같다. 오늘처럼 11시가 돼서야 걷히기도 하고, 심지어 오 세브레이로에서는 오후 3시가 지나서야 안개가 걷히고 해가 났다.


안개를 뚫고 쉬지 않고 걸어 11시14분, 팔라스 데 레이에 있는 공립알베르게 (Albergue de peregrinos de Palas de Rei)에 도착했더니, 문 여는 시각인 오후 1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도 기다리는 순례자들이 아주 많다. 그동안 순례길을 걸으면서 알베르게 앞에 이렇게 많은 순례자가 기다리는 모습은 처음 봤다. 나도 맨 끝에 배낭을 내려놓고 점심 먹을 곳을 찾아 다녔지만 마땅한 곳이 없다. 한군데 식당에서는 오후 1시부터 식사가 가능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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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알베르게로 돌아와 맞은편에 있는 바르에 들어가 맥주를 한잔 마시며 유튜브를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는 동안 기다리는 순례자들은 점점 많아졌다. 배낭행렬이 알베르게는 물론, 길가 보행자도로에 죽 늘어섰다.


오후 1시, 드디어 알베르게 문이 열리면서 순례자들이 우루루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내가 접수할 때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공립알베르게를 선택하는 유이는 크게 2가지다. 가격이 다른 알베르게에 비해 저렴(10유로)하고, 예약 없이 선착순으로 접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립알베르게는 와이파이가 되지 않는 등 시설이 열악한 경우도 있다. 오늘도 여느 때처럼 세탁기를 돌리긴 했지만, 빨래 널 곳이 마땅치 않아 예정에 없던 건조기까지 돌려야 했다. 빨래줄이 실내에 걸려있는 데다 벌써 많은 빨래들이 널려 있어서 빨래 널 곳이 없었다. 또 널어놓는다 해도 오늘 안에 마을 것 같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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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를 모두 끝내고 점심을 먹으러 식당으로 갔다. 그런데, 선택을 잘못했다. 조금 더 돌아다니더라도 ‘메뉴’ 파는 곳을 찾았어야 했는데, 가까운 곳에 들어가 주문하려니 ‘메뉴’처럼 먹으려면 전부 따로 주문해야 해서 제대로 먹으려면 2배는 비싼 것 같았다. 그래서 최소한으로 주문한다고 음식 하나와 맥주 한잔을 시켰더니, 빵도 필요하냐고 묻는다. 그래서 무료로 주는 줄 알고 달라고 했는데, 그마저 따로 돈을 받았다. ‘메뉴’에서는 공짜로 주는 것들을 전부 계산해야 아니 점심값이 18.5유로나 됐다. 게다가 좀전에 건조기 비용 3유로까지 더하면, 공립알베르게를 이용하면서 절약된 숙박비보다 더 많이 들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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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은 오늘도 파에야를 데워 바게트와 함께 먹었다. 납작복숭아와 요구르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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