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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 성문종주 제2일, 대남문~대동문~서암문

by 이흥재

2025년 5월6일 화요일 맑음


™ 코스: 개롱역~ 광화문역~ (7212번 버스)~ 승가사 버스정류장~ 구기분소 (0.8km)~ 대남문(2.5)~ 대성문(0.3)~ 보국문(0.6)~ 대동문(0.6)~ 용암문(1.5)~ 백운봉암문(1.2)~ 대동사(1.3)~ 원효봉(1.0)~ 효자리(1.6)~ (양주37번 버스)~ 구파발역~ 개롱역, 총 주행거리 11.4km


북한산성 성문종주 이틀째를 맞아 오늘은 대남문으로 간다. 먼저 개롱역에서 광화문역까지 지하철을 타고 가서 2번 출구로 나가 7212번 버스를 갈아타고 승가사입구 버스정류장에서 내린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7212번 버스 배차간격이 12분인데, 오늘은 운 좋게 3분 정도 기다렸다 탈 수 있었다.


그리고, 승가사입구에서 버스를 내리자마자 걷기 시작한다. 우선 구(舊) 구기분소까지는 0.8km 남짓 되는 포장길이다. 구기분소가 가까운 곳으로 옮기면서 구(舊) 구기분소는 ‘자원활동가 센터(Volunteer Center)’란 명패를 바꿔 달았는데, 오늘은 문이 닫혀있어 어떤 용도인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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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자원활동가 센터를 지나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박새교)를 지나자마자 곧바로 급경사 길이다. 게다가 돌로 만든 계단은 단차가 커서 더 힘들다. 다른 곳에선 나무데크 계단이 많아서 불평한 적이 있었는데, 차라리 나무계단은 높이가 거의 일정하고 바닥도 반듯해서 돌계단에 비하면 훨씬 수월하게 올라갈 수 있다.


가파른 돌계단을 쉬지 않고 걸어 승가사와 문수사 갈림길을 지나 1시간 만에 2.5km 산길을 걸어 대남문(大南門)에 도착했다. 오늘도 대남문에 대한 설명을 읽는다. “대남문은 북한산성의 가장 남쪽 성문으로, 산성이 축조된 1711년(숙종37) 지어졌다. 소남문이라고도 불린 대남문은 비봉능선을 통해 도성의 탕춘대성과 연결되는 중요한 성문이다. 문루는 소실됐던 것을 1991년 복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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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남문에 대한 기록을 찾다 보니, “대남문은 원래 소남문이었는데, 영조임금이 내시의 등에 업혀 대성문으로 행차하고 소남문으로 내려가면서 임금이 지나간 문을 암문(暗門)으로 둘 수 없어 문을 크게 만들고 문루를 올려서 대남문으로 바꿨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런데, 그 사실여부를 알 수 있는 출처는 찾지 못했다. 다만, <정조실록> 정조 9년 6월17일자에 “문수봉 오른쪽에 문수봉의 암문이 있는데, 지금은 대남문이 됐으며(有文殊暗門, 而今爲大南門,)”란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처음에 암문이었던 것만큼은 확실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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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영조 41년(1765) 4월22일 기록을 보면, “북한산성 북문루를 지금 고쳐 세우고 있지만 그 문은 높은 산봉우리 위에 위치해 나뭇길만 있습니다. 이 북한산성 북문 문루를 더욱 긴요하지 않습니다. 또 신사년 동가(임금이 탄 수레가 대궐(大闕) 밖으로 나감) 이후 대성문은 영구히 폐쇄하고, 문수문을 정문으로 삼았으니 일의 체모(體貌, 남을 대하기에 떳떳한 도리나 얼굴)는 전보다 매우 무겁습니다. 북문 문루의 재목과 기와로 문수문의 문루를 새로 건립하는 일이 매우 타당하기에 감이 이를 앙달 (우러러보고 아룀)합니다(北漢北門樓, 今方經紀改建, 而其門在於高峯之上, 只有樵路, 乃是北門, 而初無門樓, 則今此北漢北門之樓, 尤爲不緊, 且辛巳年動駕後, 大成門永鎖, 文殊爲正門, 事體與前甚重, 以北門樓材瓦, 新建於文殊門樓, 事甚便當, 敢此仰達,)”라고 부호군(副護軍) 구선복 (具善復)이 아뢰자, “좋다, 그리하라(上曰, 誠好, 依爲之.)”고 했다고 한다.


이로 보면, 대남문은 북한산성 축조 당시 소남문이란 암문으로 지어졌다가 1765년경 성문을 확장하고 문루를 세워 지금의 모습을 한 것으로 보인다.


대남문으로 들어가 이내 오른쪽으로 난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 대성문으로 향한다. 이곳에도 역시 짤막한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대성문(大城門)은 북한산성 동남쪽에 있는 성문으로, 1711년 세워졌다. 문루는 소실됐던 것을 1992년 새로 복원한 것이다.”


그런데, <정조실록> 정조9년(1785) 6월17일 기사를 보면, “보현봉 아래 대성문이 있는데 경진년(영조36년, 1760) 영구히 폐쇄(閉鎖)한 뒤부터 문루 (門樓)와 처마가 퇴락(頹落)했다(普賢峰之下, 有大城門, 自夫庚辰永閉之後, 樓圮簷頹.)”는 것으로 보아, 이미 오래 전부터 사용하지 않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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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보국문을 향해 또 다시 가파른 돌계단을 오른다. 아무래도 성문은 봉우리 사이 골짜기에 지어지다 보니, 성벽을 따라 다음 성문으로 갈 때마다 가파르게 올라가야만 했다. “보국문(輔國門)은 북한산성 동남쪽에 있는 암문으로, 1711년 지어졌다. 소동문(小東門) 또는 동암문(東暗門)이라고도 한다. 1993년 보국문 상부 여장을 복원했고, 부분적으로 수리했다.” 보국문 옆에 있는 안내문 내용이다.


오전 9시46분, 대동문에 도착했다. 그리고 안내문 내용은 이렇다. “대동문 (大東門)은 북한산성 동쪽 성문으로, 1711년 지어졌다. 문의 형식과 모습은 대남문이나 대성문과 같다. 상층의 단층 문루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사용됐다. 문루는 소실됐던 것을 1993년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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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변사등록> 1711년(숙종37) 10월8일 기록에도, “본영에 떼어준 북한산성의 대동문•소동문과 두 곳의 암문 등 4문은 이제 완공했다 (本營分授北漢大東門·小東門·暗門二處竝四門今已畢役,)”고 돼있다.


다음은 용암문(龍巖門)으로 향한다. 이정표를 보니 대동문에서 1.5km 거리다. 그리고, 20분 남짓 걸어 도착한 용암문은, 용암봉 아래 있어서 용암봉암문이라고도 부르며, 우이동으로 통하는 관문이다. 용암문 상부 여장은 무너졌던 것을 1996년 복원한 것이다. 원래 이름은 용암암문 (龍巖暗門) 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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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변사등록> 1711년 10월18일자에는 북한산성의 여러 시설에 대한 제원이 기록돼있는데 언급된 성문을 보면, 수문(水門)•북문(北門)•서암문 (西暗門)•백운봉암문(白雲峯暗門)•용암암문(龍巖暗門)•소동문(小東門)•동암문(東暗門)•대동문(大東門)•대서문(大西門)•청수동암문(淸水洞暗門)•부왕동암문 (扶王洞暗門)•가사당암문(伽沙堂暗門)•소남문(小南門) 등이다.


이정표를 보니 백운대까지 1.4km다. 그런데, 대동문에서 용암문까지의 비교적 수월했던 산행길과는 달리, 백운대로 가는 길은 경사도 심하고 산길도 다소 험해서 걷기에 꽤 불편하다. 게다가 여기까지 오느라 많이 피곤했기 때문에 더 힘든 것 같다.


그래도 쉬지 않고 열심히 걸어 30여분 만에 백운봉암문(白雲峰暗門)에 도착했다. “북한산 주봉(主峰)인 백운대와 만경대 사이에 위치한 성문으로, 북한산성 성문 중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위문

(衛門)으로 불려왔다.” 안내문 내용이다.


이제 백운대(白雲臺 837m)까지는 300m 남았다. 그런데 휴일이어서인지 사람들이 너무 많다. 아무래도 왕복 1시간은 걸릴 것 같아 오늘은 과감하게 포기. 그리고 성문종주를 이어가기로 했다. 이어지는 코스는 대동사를 지나 원효봉에 올랐다가 서암문으로 내려가면서 끝난다.


대동사(大東寺)를 향해 가파른 돌계단을 따라 내려가다 벤치가 설치된 곳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 앉았는데, 여기도 금세 사람들로 가득 찼다. 북적이는 등산객들 틈에서 어제 사온 햄버거로 점심을 먹고 내려가다 이정표를 만났는데, 백운대 2.0km 원효봉 0.6km 지점이다. 그리고 북한산탐방지원센터까지는 2.1km. 눈 딱 감고 바로 내려갈 수 있지만, 이왕 성문종주를 나선 길이니 북문과 서암문을 만나기 위해 원효봉 쪽으로 향한다.


가파른 돌계단을 따라 오르다 상운사(祥雲寺)를 지나 20분쯤 걸려 북문 (北門)에 도착했다. 이곳은 안내문 내용이 좀 길다. “원효봉과 영취봉 사이 해발 430m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산능선이 말안장처럼 보이는 안부(鞍部)에 자리한다. 주변에 상운사와 훈련도감 유영지가 있는 곳으로 보아 훈련도감 유영과 상운사에서 북문지역 수비와 관리를 맡은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북한산성에는 대서문•대남문•대동문•대성문•중성문•북문 등 6개 대문이 있으며, 북문과 대동문은 간선도로에서 벗어나 있다. 북한산성 대문이 완성된 때는 1711년인데, 30여년 후 간행된 <북한지>에는 북문 문루가 표현돼있지 않다. 18세기 전기에 문루가 없어졌으며, 그 상태가 지금까지 이어져왔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기록을 찾아보면 1764년(영조40) 방화사건이 일어난 데다, 이듬해 북문 문루 재목과 기와를 문수문(대남문)을 새로 건립하는데 사용한 것으로 돼있다. 북문을 별로 이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문 화재에 대한 <비변사등록>기록은, 영조 40년(1764) 11월12일에 “본성의 북문은 깊숙이 무인지경에 있는데 어제 밤에 갑자기 미쳐서 제정신을 잃은 사람이 성문을 방화해서 몽땅 타버렸다. 북문은 전부터 굳게 잠겨있고 평상시에 열고 닫는 일이 없다(則本城北門, 處在深僻無人之境, 而昨夜忽有一狂易之人, 放火城門, 盡爲燒燼云矣, 北門自前牢鎖, 常時雖無開閉之事,)”고 돼있다.


북문에서 원효봉까지는 200m다. 단숨에 올라가보니 여기에도 사람들이 꽤 많다. 하지만 정상바위가 넓은 데다가 사람들이 가장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구경하기엔 너무 좋은 장소다. 날씨까지 화창해서 주변경치가 황홀하게 보인다. 다른 사람한테 부탁해서 멀리 북한산 삼각봉을 배경으로 사진도 한장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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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봉 정상에 안내문이 세워져 있는데, 북한산 봉우리 가운데 이렇게 안내문이 설치된 곳은 유일한 것 같다. “북한산성은 북한산 여러 봉우리를 연결해 쌓은 산성으로 길이는 11.6km, 내부면적은 5.3km2에 달한다. 산성공사는 1711년 4월3일 시작해 6개월 만인 10월19일 끝났다. 이는 삼군문(三軍門;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이 영역을 분담해서 쌓은 결과다. 원효봉은 해발 505m의 봉우리다. 봉우리 아래 원효암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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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하산해야 하는데, 이정표는 ‘효자리(孝子里) 1.6km’라고만 돼있다. 마지막 남은 성문인 서암문으로 가야 하는데, 잘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효자리 방향으로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15분쯤 내려가자 원효암(元曉庵)이 보였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원효가 좌선하면서 창건했다는 설이 있지만, 조선 숙종 때 승병장 성능(聖能)이 원효를 기리기 위해 창건한 후, 중건을 거듭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하는데, 원효봉이란 이름을 낳게 한 암자치고는 너무 초라하다. 사람이 기거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가마저 드는 초막(草幕)이다.


다시 10분 남짓 더 내려가 서암문(西暗門)에 도착했다. 이번 성문종주의 마지막 성문인 셈이다. “1711년 북한산성을 축조하면서 설치한 8개 암문 중 하나다. 서암문은 성내에서 생긴 시신(屍身)을 내보내는 문이라 해서 시구문(屍軀門)이라고도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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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쯤 내려가자 갈림길이 나온다. 이제 버스를 타고 구파발역으로 가야 하는데, 어느 방향인지 모르겠다. 네이버지도를 켜고 방향을 잡아 가운데 길로 내려가는데, 외국인 여자 둘과 마주쳤다. 눈인사만 하고 지나쳐 걷다가 다음 갈림길에서 또 헷갈려 가던 길을 되돌아왔더니 그 외국인들이 이쪽 길이 맞다고 알려준다. 나도 막 지도를 본 터라 알곤 있었지만, “고맙다”고 했더니, 자기들도 길이 어렵다고 했다. 하긴, 나도 찾아가기 어려운데, 초행길이었을 외국인들이야 오죽할까?


어찌어찌 큰길을 찾아 건너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는데, 운행버스가 2대 표시돼있지만 한참 기다려야만 했다. 게다가 먼저 오리라고 예상했던 버스가 더 늦게 오는 바람에 오늘도 양주37번 마을버스를 타고 구파발역까지 가서 무사히 귀가했다. 산행하는 동안에는 피곤하고 힘들지만 이렇게 끝내고 귀가할 때면 언제나 목표를 이뤘다는 생각에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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