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5월23일 금요일 흐림
어제 수원화성엘 다녀오려고 새벽에 일어났는데 예보도 없는 비가 오는 바람에 출발하지 못하고, 하루 미뤘다가 오늘 다녀왔다. 개롱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오금과 수서에서 2번 갈아탄 후 수원역에 내려 화성행궁 (華城行宮)을 찾아갔다. 걷기엔 좀 먼 거리(2.4km)라 버스를 타고 가도 되지만, 버스 기다리는 시간까지 더하면 소요시간이 엇비슷하게 걸릴 것 같아 걸어가기로 했다.
수원역 8번 출구로 나와 네이버지도를 보면서 가는데, 처음엔 큰길(매산로)을 따라가다 좁은 길로 접어들어 한동안 더 걸어갔더니 화성행궁 광장 못 미처 오른쪽 골목으로 팔달문(八達門) 표지판이 보여 따라갔지만, 사진을 찍기엔 애매하다. 제대로 된 사진을 정면에서 찍으려면 큰 찻길로 들어서야 하는데, 그럴 수 없으니 난감하다. 하는 수 없이 보도(步道)에서 대충 찍고 되돌아와야 했다.
팔달문은 수원화성의 남문(南門)으로, 정면 5칸의 2층 누각이며 1794년 2월28일 착공해 9월15일 완성됐는데, 그 이름은 행궁의 진산(鎭山)인 팔달산(八達山146m)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하지만 팔달산에 위치한 문은 서문(西門)인 화서문(華西門)이다. 팔달문 좌우로 성벽이 연결돼있었지만 도로를 개설하면서 성벽을 헐어냈으며, 1975년 수원성곽 복원공사를 하면서 옹성을 수리했다.
오전 8시30분 조금 지나 광장에 도착했지만, 아직은 화성행궁이나 관광안내소 모두 문이 닫혀있다. 안내문을 보니 개장시간은 9시부터라지만 기다릴 수 없어 성곽일주를 위한 출발점으로 창룡문(蒼龍門)으로 향하다 수원화성박물관에 잠시 들었는데, 9시 전이라 역시 문은 닫혀있다. 정원에는 화성을 축조할 때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만들어 사용했다는 몇 가지 도구들이 전시돼있었다. 그중 유형거(游衡車)는 저울의 원리를 이용한 반원모양의 복토(伏兎)를 사용해 수레바퀴의 성능을 향상시킨 수레이며, 거중기(擧重機)는 도르래 원리를 이용해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릴 수 있도록 고안한 장치다. 또한, 녹로(轆轤)는 긴 장대 끝에 도르래를 달고 끈을 얼레에 연결해 돌을 이 들어올리는데 사용하던 도구다.
정원 한켠에는 정조태실(正祖胎室)도 설치돼있다. 태실비에는 ‘正宗大王胎室 (정종대왕태실)’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이는 정조 사후 처음 정해진 묘호 (廟號)가 정종(正宗)이었다가 1899년 대한제국이 수립되자 황제로 추존하면서 정조(正祖)로 격상시켰기 때문에 묘호가 바뀌었다고 한다.
9시8분, 창룡문(蒼龍門) 앞에 도착했다. 안내문을 보니, “창룡문은 수원화성 동문(東門)이다. 조선시대 건축에는 위계질서가 있어, 장안문(長安門)과 팔달문은 높은 격식을 갖춘 반면 창룡문과 화서문은 한단계 낮춘 형태다. 그래서 장안문과 팔달문이 2층 문루에 우진각 지붕인 반면, 창룡문과 화서문은 1층 문루에 팔작지붕이다. 한국전쟁 때 문루가 파괴돼 1976년 복원했다.”
다른 기록을 찾아보니, 정조어제문집(正祖御製文集)인 <홍재전서 (弘齋全書)>에 따르면, “창룡문은 그 형상에서 이름을 취한 것”이라고 한다. 즉, 좌청룡(左靑龍)은 방위상 서쪽이지만 창룡문이 있는 산의 형상이 하늘에서 보면 마치 용이 용연(龍淵)에서 남수문(南水門)까지 꿈틀거리는 모습에서 그 뜻이 유래됐다고 한다.
창룡문을 지나 왼쪽을 따라 성곽을 돌아보기로 한다. 그리고, 첫번째 만나는 구조물이 동북노대(東北弩臺)다. 이는 기계식 활인 노(弩)를 쏘기 위한 시설로, 적의 동향을 살피고 깃발을 이용해 적의 위치를 알리는 용도로도 쓰였다. 화성에는 서노대와 동북노대가 있다.
성곽길을 따라 계속 가면, 수많은 시설물들을 만난다. 다음 시설은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이다. 공심돈은 돈대(墩臺)의 하나로, 돈대는 성역 안팎에서 일어나는 일을 감시하거나 화살이나 화포로 적을 공격할 수 있는 형태의 망루이며, 공심돈은 돈대 가운데가 비어있는 구조다. 화성에는 동북공심돈과 서북공심돈남공심돈 등 세 곳의 공심돈이 있다. 동북공심돈은 한국전쟁 때 무너졌던 것을 1976년 복원해 모습을 되찾았다.
이번에는 연무대(鍊武臺)라고 불리는 동장대(東將臺)를 지난다. 화성에는 두 곳의 장대가 있는데, 동장대를 평소에 군사들이 훈련하는 장소로 쓰고, 맞은편에 있는 서장대(西將臺)는 군사훈련지휘소로 썼다.
다음에 만나는 시설은 동북포루(東北鋪樓)다. 화성에는 모두 5곳의 포루가 있는데,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지은 시설이다. 동북포루 지붕 모습이 조선시대 선비들이 쓰던 각건(角巾)이란 모자와 비슷해서 ‘각건대(角巾臺)’란 별칭을 갖고 있으며, 2019년 복원했다.
북암문(北暗門) 위에 있는 동북각루(東北角樓)는 감시용 시설이지만 아름다운 연못과 함께 있어 경치를 즐기는 정자로 많이 쓰였으며, 정자의 별칭은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다. 정조는 이를 “현륭원(顯隆園)이 있는 화산(花山)과 수원읍치(水原邑治)를 옮긴 땅 유천(柳川)를 가리키는 뜻”이라고 풀이했다고 한다. 군사들의 휴식과 임금을 위해 12층에 온돌방까지 만들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안전진단 결과 보수가 필요해 향후 2년 정도 출입을 제한한다는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북수문(北水門)은 보기엔 아름답지만 사진 찍기가 너무 어렵다. 제대로 찍으려면 물길 아래로 내려가야 할 것 같은데, 내려가는 길도 없다. 이래저래 구경만 하고 지나갈 수밖에 없다. 북수문은 화성 북쪽 성벽이 수원천과 만나는 곳에 설치했으며, 일곱 칸의 홍예문(虹霓門) 위로 돌다리를 놓고 누각을 지었는데, 화홍문(華虹門)이란 별칭으로 더 알려져 있다. 홍수로 무너진 누각을 1932년 다시 지었으며, 2016년에는 <화성성역의궤>를 근거로 창문을 복원했다.
이번에 만나는 시설은 북동포루(北東砲樓)다. 같은 이름의 포루(鋪樓)는 군사들이 휴식하면서 머무는 공간이고, 포루(砲樓)는 화포를 갖춘 시설이다. 화성에는 이와 같은 포루(砲樓)가 동포루서포루남포루북동포루북서포루 등 5곳이 있다. 포루는 벽돌로 만든 3층 구조로, 아래 두 층은 화포나 총을 쏠 수 있도록 만들었고, 3층은 군사들이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누각을 만들었다.
좌우 2개의 적대(敵臺)를 거느린 장안문(長安門)은 화성 북문(北門)으로, 바깥으로 원형 옹성(甕城)을 갖췄다. 1920년대 좌우 성벽이 헐리고 한국전쟁 때 누각이 소실됐다가 1978년 문루를 원래대로 복원했다. 장안문과 팔달문에는 적대가 있었는데, 팔달문 적대는 남아있지 않다. 적대는 성문에 접근하는 적을 감시공격하는 방어시설로, 우리나라 성곽 중 화성에만 있다.
화서문(華西門)은 화성 서문으로, ‘화성의 서쪽’이란 뜻이지만 서쪽에는 팔달산이 있어 서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화서문 밖으로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어 주변을 감시하기 위해 높다란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을 함께 세웠다.
성곽에서 마지막으로 보는 시설물은 같은 공간에 설치돼있는 서노대 (西弩臺)와 서장대(西將臺)다. 서노대는 동북노대와 마찬가지로 기계식 활인 노를 쏘기 위해 높게 지은 시설로, 군사지휘소인 서장대를 지키는 역할을 한다. 서장대 위층 처마 밑에 걸린 ‘화성장대(華城將臺)’와 ‘시문(詩文)’ 현판은 모두 정조의 작품이다. 정조는 1975년 군사훈련인 성조(城操)가 끝난 뒤 ‘華城將臺’ 현판글씨를 직접 쓰고 만족스럽고 기쁜 마음으로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華城將臺 親閱城操 有詩題于楣上 화성장대에서 친히 군사훈련을 점검하고 지은 시를 문 위에 걸다
拱護斯爲重 현륭원 호위 중요하지만
經營不費勞 세금과 노역 쓰이지 않았네.
城從平地迥 성곽은 평지 따라 둘러 있고
臺陭遠天高 먼 하늘 기댄 장대는 높다랗구나.
萬垛䂓模壯 많은 성가퀴 구조 굳건하고
三軍意氣豪 군사들 의기 호기롭네.
大風家一奏 대풍가 한 곡조 연주함에
紅日在鱗袍 붉은 햇살이 갑옷을 비추는구나.
서장대를 지나 오른쪽으로 성곽길이 이어지지만, 그곳엔 특이한 시설물이 없어 가파른 계단을 따라 화성행궁으로 향한다. 그리고 10분이 채 안돼 행궁에 도착했는데, 단체로 온 학생들이 아주 많다. 대부분은 고등학생쯤 돼 보이지만 그보다 어린 학생들도 꽤 많다.
화성행궁 입장은 유료지만, 65세 이상인 신분증을 제시하면 무료로 입장할 수 있기 때문에 모바일 신분증을 보여주고 안으로 들어갔다.
좌우문(左翊門)과 중양문(中陽文)을 차례로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좌우로 경룡관(景龍館)과 봉수당(奉壽堂)이 있는데, 학생들이 진을 치고 있어 구경할 수가 없다. 옆에 있는 안내문을 보니, “경룡관은 장락당(長樂堂)으로 들어가는 대분 상부에 지은 다락집이다. 아래층 대문이름은 지락문 (至樂門)이다. 이는 즐거움에 이른다는 뜻으로, 장락당으로 들어가는 것이 즐겁다는 의미다.”
봉수당은 화성행궁에서 가장 위상이 높은 건물이다. 정조 13년(1789) 고을수령이 동헌(東軒)을 지어 장남헌(壯南軒)이라고 했는데, 1795년 헌경왕후(獻敬王后= 惠慶宮 洪氏)의 회갑연을 계기로, 궁궐에서 대비나 상왕이 머무는 건물에 목숨 수(壽) 자나 길 장(長) 자를 붙이는 전통이 있어, 장수를 기원하며 봉수당으로 이름을 바꿨다. 마당 한가운데 왕이 지나는 어로 (御路)를 뒀고, 건물 앞에는 넓은 기단인 월대(月臺)를 갖췄다.
경룡관을 지나 나오는 장락당은 헌경왕후 회갑연 때 헌경왕후가 머물던 처소로 지은 건물이다. 정조는 중국 한나라 고조가 어머니를 위해 장락궁을 지은 것을 본받아 장락당을 짓고 현판글씨를 썼다. 장락당과 봉수당은 연결돼있어 이동이 자유로우며, 장락당은 임금이 화성에 내려오면 머무는 처소로도 사용됐다.
화성행궁에서 공식행사나 연회를 열 때 사용하던 낙남헌(洛南軒)에 가니 그곳에도 한무리의 학생들이 문화해설을 듣고 있었다. 낙남헌은 중국 한나라를 세운 유방이 부하들 덕분에 나라를 세울 수 있었음을 감사하며 낙양(洛陽) 남궁(南宮)에서 연회를 베풀었다는 이야기를 본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는 수원군청과 신풍국민학교 교무실로도 사용됐지만, 궁궐 전각과 비교해도 손색 없는 아름다운 건물로 원형이 잘 남아있다.
마지막으로 둘러본 화령전(華寧殿)에 있는 운한각(雲漢閣)은 정조의 어진 (御眞)을 모시고 제사 지내는 건물이다. 중앙에 정조 어진을 모신 합자 (閤子)를 두고, 좌우에 있는 익실(翼室)에는 정조가 편찬한 책과 제사에 쓰이는 물품을 보관했다. 현재 봉안돼있는 어진은 2004년 다시 그린 표준영정으로, 원래 모셨던 어진은 1908년 서울로 옮겼지만 1954년 부산 피난처에서 소실되고 말았다.
행궁을 나와 광장 끝 벤치에 앉아 잠시 쉬면서 커피와 간식을 먹은 후 귀가하기 위해 수원역으로 향했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버스를 타고 갈 수도 있지만, 이왕 걸으러 왔으니 내처 걷기로 했다. 그리고, 수원역 못 미처 있는 서브웨이(subway)에서 샌드위치를 사서 먹었다. 그런데, 서브웨이를 보면 생각하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오래 전에 캐나다 밴쿠버 지역에 갔을 때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려는데 정류장을 알 수 없어 지나가는 주민한테 물었더니 엉뚱한 곳을 가르쳐줬다. 바로, “서브웨이가 어디냐?”고 물어본 것. 그땐 서브웨이란 음식점이 있는 줄도 모르던 때였고, 주민은 점심 때쯤 됐으니 당연히 먹을 걸 찾는 줄 알고 알려줬겠지만 그때서야 서브웨이란 샌드위치를 파는 프랜차이즈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1990년 처음 들어왔지만, 2009년 규격화된 서비스가 도입됐다고 한다.
수원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수서역과 오금역에서 두번 갈아탄 後 무사히 귀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