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2일 수요일 흐림
지난주엔 이런저런 사정이 겹치면서 산엘 가지 못했다. 이번주에도 늘 가던 화요일(어제)엔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서 오늘로 미룬 터였다. 행선지는 반년 만에 다시 가는 북한산 백운대로 정했다. 정초(正初)에 다녀온 後 처음 간다. 아니, 지난 5월6일 북한산성 성문종주를 하면서 백운대 바로 아래 있는 백운봉암문(白雲峰暗門)까지 갔었는데, 부처님오신날 연휴라 사람들이 너무 많아 백운대까지 올라가는 건 다음으로 미뤘었다.
구파발역에서 산행의 시작점인 북한산성입구로 가는 버스는 704번과 양주37번이 있는데, 37번이 먼저 와서 맨 앞자리에 앉아 편히 갈 수 있었다.
북한산성입구 정류장에서 버스를 내려, 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를 지나 갈림길에서 오른쪽 포장도로를 따라 대서문(大西門) 쪽으로 간다. 잠시 後 도착한 대서문 옆에 세워놓은 설명문을 보면, “북한산성 정문으로, 성문 (城門) 16곳 중 가장 낮은 지점에 위치한다. 1712년(숙종38) 숙종이 북한산성에 행차했을 때, 이 문을 통해 성내(城內)로 들어갔다. 과거 성내마을이 있었을 때 주민들이 대대로 이용했다. 지금 문루(門樓)는 1958년 복원한 것으로, 북한산성 문루 중 가장 오래됐다.”
그런데 다른 자료를 찾아보니, “북한산성 대문역할인 주문(主門)은 본래 대성문(大城門)이었지만, 숙종이 대서문을 거쳐 북한산에 오르면서 대서문이 주문 역할을 하게 됐다. 대서문이 주문이 되면서 문 주변에 북한동 마을이 생겨나게 됐다.”고 한다.
석장승(石長栍)을 지나 무량사(無量寺)로 향한다. 그런데, ‘장승’에 대해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연합뉴스> 2021년 7월3일 기사를 보면, 우리가‘장승(長承)’이라고 부르는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과 지하여장군 (地下女將軍)은 장승이 라니라 ‘벅수(法首)’다. 장승은 신라 21대 소지왕 (炤知王)이 역참(驛站) 제도를 도입할 때(487년) 세운 이정표였고, 벅수는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수호신이다. 이후 1895년 역참제도가 폐지되면서 장승은 사라지고, ‘장승배기’란 지명만 남았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학무국)가 우리 토속신앙을 미신으로 폄훼하면서 벅수가 장승인 것처럼 왜곡했다. 1912년에는 <언문철자법>을 만들어 “벅수와 장승은 같은 것인데 장승이 표준말”이라고 조작했다. 이규경(李圭景 1788~1856)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장승(長栍)의 ‘栍’자는 소리는 ‘生’이고 잘못된 음이 ‘承’이다. 길라잡이인 목인은 ‘栍’이고, 사실과 다르게 표현된 사투리가 장승이다(栍 : 音生, 譌音承. 里堠木人曰長栍. 譌呼長丞.)”라고 설명했다.
이내 무량사에 도착했다. 조그만 일주문 앞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大雄殿)과 약사전(藥師殿)범종각(梵鐘閣)이 나란히 있는 조그만 절이다. 절 앞에 설치된 설명문을 보니, “고종 후궁인 순빈엄씨(淳嬪嚴氏)가 산신각을 짓고 약사불좌상(藥師佛坐像)과 산신탱화(山神幀畵)를 모신 뒤 백일기도를 올려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영친왕 이은(李垠 1897~1970)이다. 이후 이 절은 순빈의 원당이 됐으며, 1900년 전후에 제작된 약사불좌상과 산신탱화가 모셔져 있어 경기도 전통사찰 1호로 지정됐다. ‘약사불’은 질병치료수명연장 재앙소멸 등으로 중생을 구제하는 부처를 말하며, ‘산신탱화’는 비단이나 종이에 산신모습을 그려 벽에 건 그림을 말한다.”
전에 ‘북한동역사관’으로 건물을 지나 2016년 10월 준공된 새마을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간다. 왼쪽길도 백운대로 향하는 데다 거리도 2.6km지만, 4.1km나 되는 오른쪽길로 가는 이유는 중성문(中城門)과 산영루(山映樓) 등 볼거리가 더 많기 때문이다. 또한 왼쪽길로 하산할 예정이기도 하다.
길가의 미륵불과 선봉사란 조그만 절을 지나 중성문에 도착했다. 중성문 옆에는 조그만 암문(暗門)이 있고, 예전에는 북한산성의 2개 수문(水門) 중 하나가 설치됐던 곳이기도 하다. 중성문 옆에 설치해놓은 설명문을 보면, “대서문에서 이곳까지는 지형이 평탄해 공격에 취약해서 차단성(遮斷性)인 중성을 쌓고 설치한 문이다. 문루는 1998년 복원했다. 중성문 옆 암반에 작은 암문이 있는데, 성안의 시신이 나간다고 해서 시구문(屍軀門)이라고 불렸다. 바로 옆 계곡에는 수문이 설치돼있었다.” 하지만 1745년(영조21) 편찬된 <북한지(北漢誌)>에 수문모습이 없어 30년도 채 버티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부왕동암문(扶王洞暗門)과 갈라지는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간다. 중흥사권역 (重興寺圈域)으로 가는 길이다. 중흥사를 중심으로 태고사(太古寺)산영루지 (山映樓址)부왕사지(扶旺寺址)중창지(中倉址)선정비군(善政碑群) 북한승도절목(北漢僧徒節目) 등의 문화재가 집중 분포하는 곳이다.
‘중창지’는 북한산성에 둔 상창(上倉)중창(中倉)하창(下倉)호조창(戶曹倉) 훈창(訓倉)어창(御倉)금창(金倉) 등 7개 창고 중 하나인 중창이 있던 곳이며, ‘선정비군’은 북한산성 관리 최고책임자 재임시의 선정과 공덕을 기리기 위한 선정비로 현재 26기가 남아있다. ‘북한승도절목’은 1855년(철종6) 새긴 325자의 암각문으로, 명문(銘文)에는 승병대장인 총섭(總攝)을 임명할 때 예상되는 폐단을 없애기 위한 3가지 규칙을 제시해놓았다.
북한산 계곡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누각 산영루에 도착했다. 산영루는 “아름다운 북한산 모습이 물가에 비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凸’ 자형 평면을 가진 정자였는데, 을축년(乙丑年1925) 대홍수 때 유실됐다.
문인 이정귀(李廷龜 1564~1635)가 북한산 일대를 유람한 뒤 남긴 <유삼각산기 (遊三角山記)>(1603)에 “산영루 옛터로 내려왔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오래 전에 건설된 것으로 여겨지며, 아름다운 이름처럼 당대 명사들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대표적으로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과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가 시문을 남겼으며, 이익(星湖 李瀷 1681~1763)도 산영루에 뜬 달을 삼각산 팔경 중 하나로 기록했다.
현재 산영루는 10개 주춧돌 등 그 터만 남아있던 것을 2014년 복원한 것이다. 산영루 옆에는 김정희의 <삼각산기행시축(三角山紀行詩軸)>에 실린 한시(漢詩)가 있다.
遊客住筇古樹間 고목 숲속에서 나그네 발걸음 멈추면,
亂流爭響夕陽山 어지런 물결이 석양 저문 산을 울린다.
此亭自古稱勝地 예부터 명승지로 알려진 이 정자에 올라,
徒倚華欄憺忘還 꽃 난간 기대서니 편히 돌아가길 잊게 되네.
다시 중흥사로 향한다. 중흥사는 12세기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지며 고려말 고승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가 주석(主席)했다. 또한, <북한지 (北漢誌)>(1745)에 따르면, 1711년(숙종37) 30여칸이던 것을 136칸 규모의 큰 사찰로 증축했는데, 1915년 홍수로 무너졌다. 이후 2012년 대웅전을 준공하고 2017년 만세루(萬歲樓), 그 이듬해 전륜전(轉輪殿)을 완공했다.
중흥사를 지나면 대남문(大南門)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백운대(白雲臺)로 가려면 왼쪽길로 가파른 경사를 올라가야 한다. 이정표를 보니 백운대까지는 2.4km 남았다. 하지만 산길은 정확한 거리를 알 수 없다.
갈림길에서 가파른 산길을 600m쯤 오르면 용암사지(龍巖寺址)와 북한산 대피소가 있다. 용암사는 북한산성 내 승영사찰(僧營寺刹) 중 하나였는데, 갑오개혁(1894) 때 승병이 강제해산 돼 쇠락해졌다 한국전쟁 때 파괴됐다. 현재는 축대시설과 탑부재기와편들이 산재해 있다.
용암사지 바로 위에 있는 북한산대피소를 지나 산행을 계속한다. 그리고 5분 만에 용암문(龍岩門)에 도착했다. 이것은 용암봉 아래 있어 용암봉암문이라고도 부르며 우이동으로 통하는 관문이다. 용암문 상부 여장(女牆)은 1996년 새로 복원한 것이다.
노적봉(露積峯) 밑을 지나 오른쪽으로 가면 노적봉이 한눈에 보이고 돌계단과 나무데크 계단이 이어진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안개가 지나가는 백운대 정상이 보인다. 맑은 날이면 흩날리는 태극기를 볼 수 있는데 안개 때문에 보였다 안 보였다 반복한다.
또 다시 가파른 나무데크 계단을 올라 백운봉암문(白雲峰暗門)을 을 지나 왼쪽으로 난 길로 계속 올라간다. 이 암문은 1711년 성곽축조 때 설치한 8개 암문 중 하나로, 일제강점기부터 위문(衛門)으로 불려왔다.
아직도 가파른 경사길을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부터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 등산객을 맞이한다. 바로 ‘러브버그’라고 불리는 붉은등우단털파리(Plecialongiforcep)인데, 4년 전부터 6월과 7월 사이에 비정상적으로 증가한다고 한다. 러브버그 같은 새로운 생명이 유입되면 천적이 없어 개체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지만 요즘 까치참새와 거미류사마귀 등이 잡아먹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신맛이 강하고 껍질이 단단해 좋은 먹잇감은 아니며, 익충(益蟲)으로 분류돼 생태계 교란을 우려해 살충제 방역도 제한적이라고 한다. 다행히 7월 중순이 지나면 차츰 없어진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절정인 것 같다. 더구나 정상으로 올라갈 수록 개체수가 점점 늘어난다. 바닥은 물론 가드레일에도 다닥다닥 붙어있어서 손을 짚을 수가 없다. 어쩌다 한번 짚고 나면 손바닥이 까매질 정도로 달라붙는다.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진 않는다고 해도 보고 있는 자체만으로도 너무 혐오스럽다.
그리고 러브버그 떼는 백운대 정상석에서 절정에 달한다. 바위에 새겨놓은 ‘白雲臺’ 글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다. 백운대에 오를 때면 정상 바로 아래 있는 넓은 바위에 앉아 간식이나 점심을 먹곤 했는데, 오늘은 그마저도 할 수 없다. 평일이라 산행하는 사람도 많지 않지만, 그나마도 오래 머물지 않고 바로 내려가서 바위가 텅 비어있다. 나도 마찬가지로 정상 사진 한장 찍고는 서둘러 내려왔다.
정상에서 내려오다 삼각산(三角山) 안내문을 읽어본다. “삼각산은 백운대 (白雲臺 836.5m)인수봉(仁壽峯 810.5)만경봉(萬景峰 787)이 고려 수도 개성에서 볼 때 3개 뿔처럼 보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온조(溫祚)와 비류(沸流)가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살 만한 곳을 정했다는 전설이 있는데, 그곳이 삼각산이다.”
하지만 이는 ‘전설’이 아니라 역사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溫祚王) 조에는 “”드디어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살 만한 곳을 바라봤다(遂至漢山, 登負兒嶽, 望可居之地.)”고 돼있고, <삼국유사 (三國遺事)> [기이(紀異)] 제이(第二)에도 “드디어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가 살 만한 곳을 찾아봤다(遂至漢山, 登負兒岳望可居之地.)”고 같은 내용이 기록돼있다.
안내문 밑에는 태조가 지은 한시도 ‘백운봉에 올라’란 한글로 풀어 적혀있는데, 인터넷을 찾아보니 전남대학교 교수를 지낸 김대현이 지은 <북한산 한시선(北漢山 漢詩選)>에는 무려 112편의 북한산 관련 한시가 실려있다. 특히 태조가 지은 한시는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온다. 즉, <세조실록> 세조9년(1463) 9월8일자 기사를 보면, 경복궁 사정전 (思政殿)에서 양로연(養老宴)을 베풀면서 태조의 시를 고관들에게 보여줬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引手攀藤上碧峯 손 이끌어 등 넝쿨 더위 잡고 푸른 봉우리에 오르니
一庵高掛斗牛中 암자 하나가 북두성과 견우성 사이에 높이 걸렸네.
若將眼界爲吾土 시야에 들어오는 전부를 우리 땅으로 삼는다면
楚越江南豈不容 중국 강남의 초나라 월나라인들 어찌 수용하지 못하랴.
잠시 내려오다 백운봉암문 조금 못미처에서 자리잡고 앉아 간단하게 점심을 먹었다. 초코파이 2개로. 그리고 본격적인 하산이다.
내려오는 길이 올라갈 때보다는 덜 힘들지만 자칫하면 사고가 날 수 있어서 위험하기 때문에 한발 한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다행히 아무런 사고도 없이 무사하게 산행을 마쳤다. 그래도 뜨거운 햇볕을 받으며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가는 것도 쉽진 않다. 왔던 때와 같은 양주37번 버스를 타고 구파발역으로 가서 지하철을 타고 무사히 귀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