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18일 수요일 비
오늘 가파도에 들어가는 배편을 예약(경로할인 왕복 16,000원)해 뒀었는데, 며칠 전 일기예보부터 오늘 비가 올 거라고 했었다. 그리고 역시 오늘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가파도행을 내일로 미룰까 하다가, 가파도엘 가지 않으면 비가 오는 오전내내 숙소에서만 지내야 할 것 같아 배가 출발하는 운진항 선착장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가파도행 출발시간은 오전 9시인데, 숙소에서 선착장까지 가까운 거리임에도 아침 8시 조금 지나 숙소를 출발해, 8시 반도 되기 전에 선착장에 도착했더니 빗줄기가 점점 굵어졌다. 여객터미널 대합실로 가서 운항여부를 물었더니 비는 오지만 바람이 심하지 않아 예정대로 출발할 수 있다고 했다.
출발시간을 기다렸다가 비를 맞으며 배를 탔는데, 함께 가는 사람들이 꽤 많다. 아마 이들도 여행을 계획한 後 재수 없게도 오늘 비가 오지만 일정을 조정하기 어려워 우리처럼 가파도행을 강행하는 것이리라.
가파도까지는 15분쯤 걸리지만, 너울이 심해 배가 많이 움직인다. 그래도 다행히 멀미하지 않고 가파도 선착장에 도착했다. 이곳에도 역시 비가 내린다. 게다가 바람이 거세다. 우산을 쓰고 있으니 맞바람에 앞으로 걷기조차 어려울 정도다.
가파도는 가장 높은 곳이 20m쯤으로, 우리나라 유인도 중에서 가장 낮은 섬이라고 한다. ‘가파도’란 이름은 “생긴 모양이 가오리를 닮았다”, “파도가 섬을 덮었다”, “물결이 더 심하다” 등 이름에 얽힌 여러 설이 전해온단다.
오전내내 비가 올 거란 예보가 있었기 때문에, 우산을 쓰고 섬을 돌아보기 위해 무작정 길을 나섰다. 대부분 사람들은 우비도 입고 있었지만, 비를 피하긴 쉽지 않다. 조금 걷다 비가 조금이라도 잦아들길 기대하면서 카페에 들어가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커피를 한잔 주문해 마시고 기다려봐도 빗줄기를 전혀 변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카페를 나와 다시 빗속으로 나섰다.
가파도는 작은 섬(0.9km2)이고 해안길은 4.22km 정도여서 돌아보는데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은 비바람이 심한 데다, 아직은 이른 계절이라 이곳의 명물인 청보리도 새싹수준이어서 볼거리조차 별로 없다.
그런데, ‘청보리’란 이름은 정감이 있지만, 실제로는 특별한 게 아니다. 가을보리(秋播形)는 늦가을에 파종한 後 새싹인 상태로 겨울을 나고 초여름에 수확하게 되는데, 성장과정 중 5월쯤에 보리가 웬만큼 자라 녹색을 띠고 있는 기간이 ‘청보리’에 해당되는 정도다. 그러니까 가파도의 청보리가 특별한 게 아니라, 보리농사를 짓는 곳이면 어디든 4~5월에 청보리를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보리에 대한 인상이 별로 좋지 않다. 내가 어릴 때 부모님이 밭농사를 지으셨는데, 거기에 보리도 포함됐다. 그땐 ‘청보리’라고 부르지도 않았고, 보리를 수확해서 타작하는 시기가 초여름이라 꽤 더운 데다 보리수염이 바람에 날리며 살갗에 닿으면 여간 따가운 게 아니었다. 어린애였지만 부모님을 돕는다는 생각으로 타작하는 곁에 함께 있다 보니 그 따가움을 온몸으로 견뎠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는 피부 이곳저곳에 빨간 선들이 생겼다.
가파도를 주마간산 격으로 돌아보고 가파도 선착장으로 돌아오니, 11시20분 배가 제주로 들어가는 마지막 배이니 한 사람도 빠짐없이 타야 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우리는 어차피 그 시간에 나갈 계획이었지만. 그 시간 후로는 풍랑이 심해져서 오늘은 더 이상 운항할 수 없다고 했다.
11시10분쯤 배가 선착장에 들어왔고 기다리던 사람들이 우루루 배에 올랐다. 배가 운진항으로 가고 있는데, 가파도로 올 때보다 더 많이 요동친다. 이내 멀미가 나기 시작한다, 속은 메스껍고 손등마저 하얘진다. 그나마 운항시간이 짧아서 잠시 後 배가 운진항에 도착했고, 배에서 내리니 멀미가 사라졌다.
이제 점심을 먹으로 식당으로 간다. 숙소 근처에 국밥집이 있던 게 생각나서 차를 숙소 주차장에 대놓고 비를 맞으며 걸어서 국밥집으로 갔다. 비가 오니 날씨가 추워져서 따끈한 국밥이 점심으로 제격이었다.
점심식사 後 숙소로 돌아와 젖은 옷을 갈아입고 다음 행선지인 제주곶자왈 도립공원(서귀포시 대정읍 보성리)으로 갔다. 입장료가 1천원이지만 65세 이상은 무료라고 해서 신분증만 보여주고 숲길로 들어갔다. 곶자왈은 제주어로 숲을 의미하는 ‘곶’과 나무와 덩굴암석 등이 뒤섞인 곳을 뜻하는 ‘자왈’이 합쳐진 말로, 90년대 생겨난 합성어다.
비는 안오지만 날씨가 궂은데도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꽤 많다. 숲길은 아주 잘 조성돼있었다. 숲 가운데 전망대도 있었지만 날씨가 좋지 않아 가까운 숲 말고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안내판에는 많은 오름들과 한라산산방산도 보인다고 돼있었다.
전망대를 내려와 다른 숲길로 접어들었는데, 무심코 걷다 보니 방향을 알 수 없어 관리사무실로 전화해서 물어봤지만 제대로 안내를 받을 수 없었다. 그래도 힌트를 얻어 가던 길을 되돌아 나와 출발지점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걷는 동안 나무에는 길이름과 번호가 달린 리본이 매달려 있었고, 그 번호만 알면 방향도 알 줄 알았는데, 관리사무실에 근무하는 사람이 그 정도도 모른다면 업무유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오늘의 마지막 행선지인 마노르블랑(Manor Blanc 하얀 저택)으로 간다. 동백꽃과 핑크뮬리가 예쁘다고 해서 찾아갔었는데, 도착해보니 찬바람이 거세게 부는데다 지금은 동백꽃만 조금 있다고 해서 구경하는 걸 포기하고 되돌아 나왔다.
이제는 비가 그쳤나 했더니 숙소로 가는 동안 아직도 오락가락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