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미노 셋째날, 산 세바스티안에서 게타리아까지

by 이흥재

2022년 9월9일 (금)


엊저녁에는 최악의 룸메이트를 만났다. 숙소도 가성비가 좋지 않아 맘이 불편했는데, 잠자리까지 뒤숭숭한 밤이었다. 젊은 남자 순례자 다섯 명과 같은 침실을 사용했는데, 비밀번호까지 설정된 출입문은 항상 열려 있었고 밤에도 서로 대화가 끊이질 않아 너무 시끄러웠다. 9시 반쯤 되어 너무 시끄럽다고 얘기했더니 아직은 10시 전이니 이해해 달라고 했다. 그래, 어쩔 수 없지!


너무 시끄러워서 잠 잘 수가 없다. 그러다가 10시가 지났는데도 계속 시끄럽길래 “이제 10시가 지났으니 조용히 해달라”고 했는데도 불을 끄지 않고 계속 대화를 이어갔다. 호스텔의 프런트로 내려가 조용하게 해 달라고 부탁하고도 싶었지만, 참았다. 그들은 결국 10시 반이 지나서야 불을 끄고 조용해졌다.


여기 와서 보니 담배 피우는 여자들과 수다스러운 남자들이 많았다. 남자들이 담배 피우는 건 별로 보지 못했고, 여자들은 대체로 조용한 것 같았다. 뭔가, 이상하다.


아침에는 미처 알람을 맞춰놓지 못해서 조금 늦게 일어났다. 오늘은 비교적 멀리 가야하고 다른 날도 일찍 일어나야 해서 6시에 알람을 설정했다.


어제, 오늘 아침에 먹을 음식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서 납작 복숭아 하나와 오렌지주스로 아침식사를 마쳤다.


출발하기 위해 짐을 챙겨 현관으로 내려왔는데, 다들 인사하는 중에 우리말이 들렸다. 카미노를 출발한지 며칠 지나진 않았지만 이 길을 걸으면서 처음 만나는 한국인이었다. 그 사람은, 어제 나를 봤는데 급하게 지나가는 바람에 얘기할 기회가 없었다고 했다.


반갑긴 하지만 오래 지체할 수 없어 행선지만 물어보고 헤어졌다. 난 오늘 목적지가 게타리아(Guetaria, 바스크어: 헤타리아[Getaria])고, 그 사람은 오리오(Orio)까지만 걷는다고 하니 앞으로 다시 마주치긴 어려울 것 같다.


출발하려고 현관문을 나서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잘 느끼지도 못할 적은 양이었지만 우선 판초우의를 뒤집어썼다. 아침 7시쯤 됐는데도 밖은 아직 어두웠다. 다행히 알베르게 주변으로는 가로등이 있어서 괜찮았는데, 산으로 접어드니 주위가 잘 분간이 되지 않는다. 특히 노란 화살표를 찾으려면 빛이 필요하다. 이때는 준비해온 헤드랜턴을 사용할 시간이다.


오늘은 재미있는 곳 두 군데를 지나는데, 그 첫번째 장소에 도착했다. 61세 때 순례를 시작해서 20여년간 10번의 순례경험이 있는 호세 마리(Jose Mari)란 사람이 만들어놓은 쉼터다. 전에는 이곳에서 물도 나눠주곤 했다는데, 지금은 서랍장 하나만 달랑 놓여있고 ‘Santiagoà795km’란 글자도 많이 지워졌다. 그 사람이 나이가 많다고 했는데 지금은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것 같다. 하긴 너무 이른 시간이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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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조금 그치는 것 같아 판초우의를 벗을까 망설이다가 귀찮기도 해서 그냥 갔더니 이내 소나기가 쏟아졌다. 아침에 내리던 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양이다. 판초우의를 입었는데도 무릎이 다 젖었다. 시간이 지나면 마르겠지! 숙소에 도착해서 빨면 된다.


그러는 사이 두번째 재미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누군가 바위 벽면에 순례자 그림을 아주 선명하게 그려놨다. 인터넷에서도 관심 있게 봤었는데 실제로 보니 똑같다. 다만 주위에 풀들이 많아 시간이 지나면서 보이지 않게 되지는 않을까 염려스럽기는 했다. 그때쯤 되면 누군가 잘 관리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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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비는 그쳤다. 부지런히 걷고 있는데 첫날 저녁을 얻어먹었던 순례자가 앞으로 지나간다. 내가 먼저 출발해서 한참 동안 보이지 않았었는데 언제 쫓아왔지? 내가 너무 느린 건가?


커피를 팔고 있는 마을주민을 만났는데 순례자여권에 기념 스티커를 붙여주고 순례자들과 사진도 함께 찍었다. 그런데 나는 아침부터 커피가 아니라 맥주를 마시고 싶었던 터라 그냥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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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오에 도착해서 바르에 들어가 맥주와 핀초를 주문했다. 맥주의 양이 조금 적은 게 아쉽지만 아껴먹는 수밖에 없다.


사라우츠(바스크어: Zarautz, 스페인어: Zarauz)까지 3.7km 남았다는 이정표가 보인다. 하지만 나는 그곳을 지나 게타리아까지 가야 한다. 사라우츠 초입에 가니 ‘Santiago 816kmà’란 이정표가 있다. 좀 전에 오리오에 도착하기 전에는 ‘Santiago 787km’란 이정표를 봤었는데, 어느 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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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우츠 마을이 끝나는 곳에 있는 바르에 들어가 맥주와 토르티야로 점심을 먹었다. 이곳도 바스크지방 행사가 있었는지, 전통복장을 입은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오늘의 목적지인 게타리아로 가기 위해 사라우츠 해변(Playa de Zarautz)으로 내려섰는데, 앞이 확 트이면서 시원하다. 경치도 물론 좋다. 어떤 남자가 모래로 조각작품을 만들고 있어서 사진을 한장 찍었는데, 옆에 돈을 받는 보자기가 놓여있었지만 그냥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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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을 따라가다 다리 밑을 지나는데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있길래 사진을 찍으려고 했더니 다양한 포즈를 잡으면서 시끌벅적 하다. 학생들이 많이 나와있는 걸 보니 학생들을 위한 행사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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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우츠에서 게타리아로 가는 길은 내내 해변을 지나지만 걷기엔 좀 먼 거리다. 그리고 이 시간이면 어김없이 발바닥도 아파오지만 묵묵히 걷는 수밖에 없다.


게타리아에 도착해서 알베르게를 찾아가려고 했는데, 초입에도 알베르게가 있었다. 하지만 이 알베르게에 대한 정보가 없다. 입구에는 오후 3시에 문을 연다고 쓰여있었다. 일단 알베르게 앞에 배낭을 내려놓고 물을 사기 위해 슈퍼마켓을 찾는데, 앞에 있는 경찰에게 물어보니 오늘은 모두 문을 닫았다고 했다. 그 경찰이 이유를 알려줬지만 알아듣지는 못했다.


물을 사고 싶다고 했더니 앞으로 쭉 가면 자판기가 있을 거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앞으로 갔더니 자판기는 있는데 물은 없다. 다시 무작정 더 가니 중국인이 운영하는 가게가 있었다. 물과 오렌지주스를 사서 다시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과일도 좀 사고 싶었지만 없었다.


알베르게에는 여자 순례자가 한 명 와있었다. 나한테 알베르게에 대한 정보를 물어보는데 나도 처음이니 알 수가 없다. 잠시 망설이다가 원래 가려고 했던 알베르게(Albergue Kanpaia)를 찾아 다시 걸었다. 찾아본 정보에 따르면 그 알베르게는 저녁과 아침식사도 가능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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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게에 도착하니 벌써 순례자 몇 명이 먼저 와있었다. 하지만 이곳도 오후 3시에 오픈한다고 했다. 그늘에 앉아 시간을 보내다가 알베르게 주인이 와서 여권을 제출하고 침대를 배정받았다. 그런데 숙박비가 20유로나 된다. 아침식사(4유로)는 7시부터 가능하다고 했는데, 저녁식사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그럼 오늘 저녁은 어떻게 해결하지?


게타리아에는 알베르게가 2개 있는데, 먼저 들렀던 알베르게가 더 나을 것 같다. 정확한 숙박비나 서비스는 잘 모르겠지만 밖에서 보기에 내부 분위기도 좋고 가게나 식당들이 가깝다. 반면에 내가 묵었던 알베르게는 식당이나 가게를 가려면 급경사 길을 오르내려야 했다.


엊저녁에는 알베르게에서 식사를 해결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급경사 길을 다녀와야 했다. 그런데 바르에서는 저녁에 먹을거리를 찾지 못했다. 그러다가 바로 옆에 중국인이 운영하는 가게에 들어 빵과 음료수를 사왔는데, 너무 달아서 3개 중 2개만 먹고 1개는 버렸다. 그래도 그럭저럭 저녁식사는 됐으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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