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미노 넷째날, 게타리아에서 데바까지

by 이흥재

2022년 9월10일 (토)


엊저녁에는 밤 9시가 지나도록 유튜브를 보다 잤다. 밤 10시면 강제로 불을 끄고 아침에는 6시에 알람을 맞춰놓고 일어나니 잠자는 시간은 충분한 편이다.


오늘 아침에도 역시 6시에 일어났다. 그런데 아침식사 시간까지는 1시간이나 남았다. 아침식사 후 이빨 닦고 출발하려면 7시 반은 돼야 한다. 그래, 그냥 출발하자. 이미 지불한 아침식사 비용이 조금 아깝긴 하지만 아침에 1시간을 더 버는 게 낫다. 더구나 오늘은 여러 마을을 지날 예정이니 먹고 쉴 곳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밖으로 나오니 아직은 역시 어둡다. 그런데 어제 썼던 헤드랜턴이 보이지 않는다. 어디에 둔 거지? 아, 어딘가에 두고 그냥 온 것 같다. 길을 잘 모르기 때문에 노란 화살표를 찾으면서 가야 하는데 불빛이 없으면 곤란하다. 어쩔 수 없이 핸드폰에 있는 ‘손전등’을 켰다. 주위가 어둡기도 하고 화살표가 자주 있는 것도 아니어서 정말로 눈에 불을 켜야 할 지경이었다.


첫 마을인 아스키수(Askizu)는 가까워서 금방 도착했지만 아직은 어둠이 가시지 않아 당연히 문을 연 바르도 없다. 아직은 견딜 만하니 그냥 갔다.


아침 7시가 지나면서 조금씩 어둠이 걷히기 시작했다. 방목장에는 소들이 누워있거나 풀을 뜯고 있었다. 밤새 방목한 건가? 이슬이 내리지 않아서 괜찮나? 이곳 지형은 경사가 너무 심해 밭농사 하기엔 부적당한 것 같다. 그래서 목장이 많은데도 소들은 많이 보지이 않는다. 그리고 경사가 저렇게 심하면 소들도 풀 뜯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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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마야(바스크어: Zumaia, 스페인어: Zumaya) 마을을 지날 때쯤 내 뒤를 따라오던 순례자 일행들이 앞서갔다. 매일 이런 식이다. 언제나 내가 제일 먼저 출발하는데, 중간쯤 가면 어느새 나를 앞질러가는 순례자들이 몇 있다. 첫날 와인과 음식을 나눠줬던 순례자들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쫓아갈 필요는 없다. 나는 내 컨디션에 맞춰 걸으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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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마을은 엘로리아가(Elorriaga)인데, 마을이랄 것도 없이 교회를 중심으로 주택 몇 채가 전부다. 주민 전체가 참여한다 해도 교회를 운영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한 걱정! 그러니 이곳엔 당연히 바르가 없다(이곳에는 순례자들보다 마을주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바르가 많았다. 그러니 마을이 작으면 바르를 운영할 수 없을 거다). 이제는 이제는 배가 고파서 허기가 밀려온다. 다음 마을에 기대를 걸어본다.


터벅터벅 이치아르(Icíar, 바스크어: Itziar)를 행해 다시 길을 걷는다. 발바닥은 자꾸 아파오지만 참는 수밖에 없다. 이치아르는 언덕에 위치한 마을이어서 오르는 게 쉽지 않다. 그래도 바르 하나쯤은 있을 것 같은 기대감에 열심히 올라갔지만 이곳에도 바르는 없었다. 이 마을에도 교회가 있고 꽤 많은 집들이 있었지만 쉬어갈 만한 곳은 없었다. 6시 반에 알베르게를 나서 벌써 4시간째 걷고 있는데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쉬지도 못했다.


이제 알베르게가 있는 오늘의 목적지 데바(Deva)를 향해 간다. 데바에는 당연히 먹고 쉴 곳이 있을 거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터벅터벅 걸었다. 그렇게 드디어 데바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 마을은 고도(高度) 차가 너무 심해서 마을 가운데 엘리베이터를 설치해 놓았다. 앞서 가는 순례자는 계단으로 내려가는데, 나는 경험 삼아 엘리베이터를 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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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주민이 같이 타길래 슈퍼마켓과 알베르게 위치를 물어보니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그 주민이 알려준 대로 먹을 것을 향해 돌진했더니 얼마 안가 반가운 바르가 나타났다. 얼른 들어가 토르티야와 맥주는 주문했는데, 특별히 맛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저 한끼를 때우기엔 괜찮을 정도였다.


점심을 먹은 후 좀 전에 지나쳐왔던 엘리베이터를 다시 한번 타보려고 아픈 다리를 절룩거리며 다녀왔다. 슈퍼마켓이 바로 옆에 있었지만 지금은 너무 피곤하니 알베르게부터 찾고 나중에 다녀오기로 했다.


인터넷에서 찾아본 정보대로라면 오늘의 알베르게(Albergue de peregrinos Geltoki, 데바 기차역 2층에 있다)는 낮 12시부터 문을 연다고 해서 시간 맞춰 찾아갔지만 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옆에서 근무하는 기차역 직원에게 물어보니 그 사람도 잘 모르는 것 같다. 마침 젊은 순례자가 와서 그 직원에게 스페인어로 다시 물어보니 관광안내소(Oficina de Turismo de Deba)에 가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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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례자가 관광안내소로 전화했더니 그쪽으로 오라고 해서 나도 따라갔더니 거기서 알베르게 관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직은 오픈시간이 아니니까 1시 반에 다시 오래고 했다. 이렇게 번거로울 수가! 이곳에는 행정편의주의적인 게 꽤 있다. 고객보다는 주인 맘대로다.


나중에 알베르게에 와보니 이곳에도 현장직원이 있는데, 왜 이렇게 번거롭게 하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숙박비는 반드시 신용카드로 결제하라고 하는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신용카드를 찾는데 갖고 간 현대카드가 없다. 어디에선가 또 잃어버린 것 같다. 부랴부랴 가족한테 연락해서 카드 분실신고를 하라고 부탁하고, 체크카드로 결제했다. 다른 알베르게는 현금만 받는데, 이곳은 무슨 유난인지 모르겠다.


접수증을 들고 숙소로 가니 나이든 여자가 침실을 안내해줬다. 샤워나 빨래할 곳은 있는데 말릴 곳이 마땅치 않았다. 직원은 밖에 나가서 널라고 하는데, 빨래줄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어디에 널어야 할지 난감하다. 마침 나무벤치가 있길래 거기에 걸쳐놓았다. 이 뜨거운 대낮에 벤치에 앉을 사람은 없을 것 같아서다.


물을 사려고 밖으로 나갔다. 좀 전에 봤던 과일가게에도 들르려고 했는데 시에스타(siesta, 낮잠시간으로 오후 2시부터 4~5시 사이에 문을 닫는 가게들이 많다) 시간이어서인지 문을 닫았다. 어쩔 수 없이 슈퍼마켓에만 가서 음료수와 내일 아침에 먹을 빵을 사 갖고 왔다.


저녁에 산 세바스티안에서 잠시 스쳤던 한국인 순례자를 다시 만났다. 그런데 서로 할 일이 있으니 이번에도 눈인사만 했다. 나는 일기를 써야 했고, 그 사람은 이제 막 알베르게에 도착해서 침대를 배정받고 있었다.


일기를 다 쓰고 저녁을 먹으러 시내로 나갔다. 하몽이 들어간 보카디요(bocadillo, 스페인식 샌드위치)와 토르티야, 그리고 또 다른 빵을 주문했는데, 토르티야를 빼고는 너무 짰다. 보카디요는 그럭저럭 먹을 만했는데 빵은 도저히 못 먹겠다. 안에 들어있는 하몽을 빼내고 먹었는데도 여전히 짰다. 아니 쓰다고 해야 할 정도였다. 결국 빵을 먹는 건 포기했다. 그래도 저녁으로는 충분한 양을 먹은 것 같다.


오늘은 처음으로 2층 침대를 배정받았다. 지난번 프랑스길을 걸을 때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 바스크어: Orreaga)에서 한번 자본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오르내리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계단이 수직으로 돼있어서 더욱 그랬다. 오르내리는 걸 줄이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몇 번은 오르내려야 하니 너무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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