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11일 (일)
오늘 아침에도 역시 6시에 일어나 얼른 씻고, 어두운 사무공간에 앉아 간단한 아침식사를 했다. 빵 2조각과 복숭아 반 개, 그리고 물과 주스가 전부였다. 오늘도 중간에 바르를 만나기 어려울 것 같아 걱정스러웠다.
6시45분쯤 알베르게는 나와 왼쪽으로 조금 돌아 철길을 건넜다. 역사(驛舍) 2층에 알베르게가 있기 때문에 생기는 색다른 경험이었다. 철길을 건너 어느 쪽으로 가야 하나 잠깐 망설였는데, 뒤따라오던 순례자들이 왼쪽에 화살표가 있다고 알려줬다.
바다와 이어진 데바 강(Río Deba)을 가로지르는 다리(Puente de Deba-Motrico)를 건너 산으로 접어드니 바로 어두컴컴하다. 며칠 전에 잃어버린 헤드랜턴이 이렇게 아쉬울 수가 없다. 그래도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버틴다. 다행히 핸드폰에 손전등 앱이 있어서 가끔 사용하지만, 오래 쓰면 배터리가 방전될 것 같아 계속 쓸 수는 없다.
조금 걷다 보니 뒤로는 보름달이 떠있고 앞에는 해가 뜨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어제 소식을 듣기로는 이번 추석에 오랜만에 맞이하는 대보름달이 뜬다고 했는데, 아침에 봐서 그런지 그렇게 큰 줄을 모르겠다. 아마도 지고 있는 달이어서 그런 가보다.
1시간쯤 걸어서 칼바리오 예배당(Ermita del Calvario en Mutriku)에 도착했다. 인터넷에서 자주 봤던 곳이지만 특별한 것은 없고, 길가에는 시멘트로 만든 십자가들이 늘어서 있었다. 십자가에는 아무 것도 써있지 않아 무슨 용도로 세웠는지는 모르겠다. 십자가는 마을에 이를 때까지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돼 있었다.
이비리 아우소아(Ibiri Auzoa)란 마을에 도착했는데, 집만 몇 채 있을 뿐 아무런 편의시설이 없다. 하긴 처음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었다.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서 더 그런 것 같다.
마을을 지나면서 아침에 만났던 한국인 순례자를 다시 만났다. 산 세바스티안에서 처음 봤을 때는 그날 오리오까지만 걷을 거라고 해서 다시 만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오리오까지는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더 걸었다고 했다. 통성명을 하긴 했는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성남에 사는 조 모씨로, 2016년에 지금은 군대에 가있는 아들(당시는 초등학생이었단다)과 함께 프랑스길을 걸었다고 했다. 몇 마디 얘기하다가 걷는 속도가 맞지 않아 알베르게에서 보기로 하고 헤어졌다. 물론 내가 조금 더 빨리 걸었다.
올라츠(Olatz)까지 1.4km란 이정표를 조금 지나니 철망으로 출입문을 설치해놨다. 하지만 열고 지나가면 되니까 큰 불편함은 없다. 아마도 짐승들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설치해놓은 것 같다. 올라츠 마을을 지나는데 이곳에도 쉬어갈 곳은 없다. 마을초입에 이시도로 예배당(Ermita de San Isidro en Olatz)이 있는 걸 빼면 집도 몇 채 없는 조그만 마을이다. 이곳엔 바르가 있을 거라고 기대했었는데. 커다란 개 한 마리가 달려들려고 했다. 이것도 환영식인가? 마침 옆에 있는 주인이 말려서 더 이상 오진 않았다.
이곳에 설치된 이정표들은 믿을 수가 없다. 처음에는 오늘의 목적지인 마르키나 세메인(Markina-Xemein, 스페인어: Marquina-Jemein)까지 16km 남았다는 이정표를 봤는데, 한참 걸었는데도 16.3km 남았다는 이정표가 나타난다. 도대체 어떻게 측정한 거야?
그나저나 마르키나 세메인까지 아무런 마을도 나타나지 않을 거란 생각과 달리 3시간 반쯤 걸었을 때 우물가가 보였다. 아르노아테(Arnoate)란 마을이다. 물론 이곳에도 아무런 편의시설이 없지만 지붕이 씌워진 우물가에 앉을 자리가 있어서 토마토와 빵을 먹고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도 몇 모금 마셨다. 물 맛도 괜찮았는데, 아직도 정확안 우물의 용도는 모르겠다. 아마도 가축들에게 먹이려고 설치해놓은 게 아닌가 싶다.
이 마을부터는 끝없는 오르막이다. 햇볕은 뜨겁고 몸은 피곤한데 배까지 고프니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배낭에 간식이 있지만 입맛도 없고 먹을 곳도 마땅치 않으니 참으면서 걸어가는 수밖에 없다.
이곳에는 요즘 유칼립투스 나무를 심는 게 유행인가 보다. 벌목한 곳에 조림하는 걸 보면 대부분 유칼립투스 나무다. 산비탈에도 심어져 있다. 전에 프랑스길을 걸을 때는 갈리시아 지방에 갔을 때만 유칼립투스 나무를 봤었는데, 이곳도 산악지역이 많아서 그런 것 같다.
이제는 마르키나 세메인에 다 왔을 거라고 생각하는 지점에 아직 4.8km 남았다는 이정표와 함께 경사 급한 내리막길이 나타났다. 도대체 어디까지 가야 하는 거지?
마르키나 세메인 마을 초입에서 한 무리의 순례자들을 만났는데, 따라가 보니 산 미겔 예배당(Ermita de San Miguel de Arretxinaga)으로 들어갔다. 여기는 예배당 안에 커다란 바위 3개가 있어서 유명한 곳이다. 그렇지만 힘도 들고 빨리 알베르게(Albergue de peregrinos Convento del Carmen)를 찾아야 하니 보는 둥 마는 둥 다시 마르키나 세메인 시내로 들어갔다.
지나가는 마을주민들에게 알베르게 위치를 물어보니 친절하게 가르쳐주긴 하는데 아직은 한참 더 가야 했다. 아니,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닌데 지친 상태여서 아주 멀게 느껴졌다.
그렇게 알베르게에 다다랐는데 내가 첫번째 도착이었다. 그곳에는 오후 3시에 오픈한다는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먼저 배낭을 내려놓고 필요한 것만 에코백에 담아 점심을 먹으러 갔다. 바르는 사람들이 붐비는 곳이었는데 배도 고프고 피곤하니까 재빨리 자리잡고 앉아 토르티야와 맥주를 주문했다. 그저 만만한 먹을거리가 토르티야다. 제대도 식당에서 한번쯤 먹어보고 싶은데, 장소와 시간이 잘 맞지 않는다.
점심을 먹고 나오면서 슈퍼마켓 위치를 물어봤더니 오늘은 일요일이라 문을 닫았을 거라고 했다. 물 살 곳은 있냐고 물어봤더니 바르 직원이 마을주민들에게 물어서 장소를 가르쳐줬다. 그곳을 찾아가보니 인도인으로 보이는 아시아인들이 운영하는 가게였다. 어제 들렀던 가게도 비슷한 모양이었는데, 이들이 아니면 오후 시간이나 휴일에 아무 것도 구입할 수 없을 것 같다. 스페인 사람들은 휴일에 가게를 잘 열지 않고 시에스타 시간에는 대부분 문을 닫기 때문이다.
공원벤치에 앉아 동영상을 보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2시 반쯤 알베르게로 갔더니 순례자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요즘 북쪽길이 대세인가? 순례자들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오후 3시가 되어 알베르게 문을 열어주는데, 제일 먼저 온 내가 첫번째로 침대를 배정받았다. 이곳은 기부제(donativo)로 운영되는데, 10유로를 지불했다.
오늘도 2층 침대를 배정받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이곳은 1층 침대만 있는 곳이었다. 정말 다행이다. 침대배치가 좀 좁은 게 흠이지만.
저녁에는 며칠 전부터 눈인사만 했던 한국인 순례자(이름이 ‘조’라고 했다)와 저녁을 같이 먹으러 가기로 했다. 묵고 있는 알베르게가 카르멘 수도원(Convento del Carmen)에 붙어있는 거라고 수도원을 끼고 돌면 바르가 있었다. 이곳은 낮에 점심을 먹었던 곳이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식당을 찾는 게 어렵기도 하고, 늘 먹던 토르티야 정도면 저녁식사로 괜찮을 것 같아 선택한 곳이었다.
조와는 식사하면서 좀더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는 최근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90일(관광목적으로는 무비자 최대기간이라고 했다) 일정으로 북쪽길을 걸은 다음, 다시 스페인 남쪽의 세비야(Sevilla)로 내려가 걸어서 올라올 거라고 했다(은의길[Vía de la Plata]). 대단한 결심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걷는 것도 놀랍고, 경비도 만만치 않을 텐데 그걸 챙겨준 가족들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식사를 마치고 음료수를 사기 위해 바르 옆에 있는 가게로 갔는데, 내가 낮에 들렀던 가게는 이미 문을 닫았다. 다행히 발 옆에 있는 가게는 열려 있었지만, 과일은 없고 음료수만 살 수 있어서 아쉬운 마음에 물만 한병 사 갖고 나왔다. 그런데 조는 덩치가 있어서 그런지 여러 음료수를 4병이나 샀다. 나중에 조와는 나이도 얘기하게 됐는데, 나와 띠동갑(1970년생)이라고 했다.
그리고 조와 얘기하면서 아주 중요한 정보를 알게 됐다. 내일 목적지로 예정한 게르니카(Guernica y Luno, 바스크어: Gernika-Lumo)에 있는 공립알베르게가 문을 닫았다는 거였다. 알베르게가 없다면 비싼 숙소에서 묵어야 하는데, 먼 길을 무리해서 걸어가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게르니카 7.4km 전에 있는 마을인 올라베(Olave)에 있는 알베르게에서 묵기로 했다.
그런데 알베르게 수용인원이 20명 뿐이고 게르니카의 알베르게가 문을 닫았다는 걸 아는 순례자들은 대부분 그곳에서 묵으려고 할 것이기 때문에 예약을 하기로 했다. 먼저 조가 이메일로 예약하고 답장해달라고 했는데, 답장이 없었다. 이번에는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대안을 만들었다. 오늘 내가 먼저 알베르게에 도착해서 예약여부를 확인하고, 만약 예약이 돼있지 않으면 게르니카까지 가서 50유로짜리 2인용 방을 이용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