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16일 (금)
오늘 아침에는 휴대폰 알람진동이 여러 번 울리는데도 듣지 못했다. 휴대폰이 침대 밑으로 떨어져 있었던 거다. 깜짝 놀라 일어나 재빠르게 짐을 챙겨 화장실부터 다녀왔다. 침대 수에 비해 화장실이 너무 적어서 조금이라도 늦으면 오래 기다릴 수 있어서다.
아침식사는 어두운 탁자에 앉아 휴대폰 불빛을 비춰가며 어제 사놓은 빵과 요구르트, 주스, 그리고 포도 몇 알로 때웠다. 그런데 빵이 너무 달아서 먹기 힘들어 1개만 먹고 나머지는 모두 버리고 말았다.
6시 반이 조금 지난 시각, 짐을 챙겨 알베르게 밖으로 나왔다. 아직은 밝지 않았지만 시내도로를 걸으니 가로등도 있고 바닥도 평평해서 걷기 좋았다. 게다가 잠시 후부터는 차도가 없는 자전거와 보도로만 이용하는 길이 계속 이어졌다. 처음에 마을주민이 이 길을 알려줬을 때는 아무런 표시도 없어서 긴가 민가 하며 걷다가 다른 순례자들을 만나 그제서야 확신하고 계속 걸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배낭커버만 씌우려고 하다가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는 것 같아 나무 밑에서 판초우의도 꺼내 입었다. 얼마 후에 비는 그쳤지만 마땅히 쉴 곳도 없고 바람막이도 되는 것 같아 판초우의를 계속 입고 걸었다.
오늘은 바스크지방(넓게는 프랑스 남부와 스페인 북부에 있는 지역을 가리키지만, 좁게는 스페인의 바스크 자치지방[Comunidad Autónoma del País Vasco]을 말한다)의 마지막 마을인 포베냐(Pobeña)을 지나 칸타브리아 자치지방(Comunidad Autónoma de Cantabria)의 온톤(Ontón)까지 가는데, 도중에 몇몇 마을들을 지났지만, 마을 안으로 들어가는 경우는 거의 없고 멀리서 바라보며 걸었다. 터널도 몇 개 지났는데 입구와 터널 안에 온갖 그래픽을 그려놓았다. 여기는 터널 뿐만 아니라 고가다리 교각에는 물론이고, 심지어 빌바오의 누에바광장 벽면에까지 그래픽을 그려놓을 걸 보면 하나의 문화가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다.
3시간 정도 걸어서 라 아레나(La Arena) 마을에 도착했다. 이곳에도 바르가 있었지만 포베냐까지 1km 남았다는 이정표가 있어서 그냥 포베냐 마을까지 가기로 했다.
포베냐 바로 전, 바다와 만나는 곳에 사장교형 인도교(人道橋)가 있고, 다리를 건너면 왼쪽 조그만 동산에 소코로 예배당(Ermita Virgen del Socorro en Pobeña)이 있는데, 문이 굳게 잠겨있어서 올라가보진 못했다.
다리를 건너면 바로 포베냐 마을인줄 알았더니 300m 더 가야 한다는 이정표가 보였다. 먼 거리는 아니지만 이럴 땐 조금 귀찮긴 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오늘의 목적지인 온톤까지는 아직 5~6km 더 가야 하니까 귀찮더라도 포베냐의 바르에 들렀다 가야 한다.
마을입구에 있는 주차장을 가로질러 가니 바로 바르가 있었다. 이제 막 영업준비를 하는 바르에 들어가 지금까지 입고 있던 판초우의를 벗고 배낭커버도 벗겼다.그리고 화장실을 다녀온 후에 맥주와 핀초를 시켜서 먹었다.
이제 알베르게가 있는 온톤으로 가면 된다. 130개 계단(하나씩 세어봤다)을 숨을 헐떡이며 올라가니 산중턱에 난 길을 따라 바다가 멋지게 펼쳐졌다. 한참 동안 걸어가다가 갈림길에서 산 쪽으로 향하는 온톤 이정표가 보였다. 남은 거리는 3.1km. 이때부터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다. 아무래도 너무 먼 거리다. 그리고, 왜 산 쪽으로 가라고 하지? 그래도 이정표를 따라 올라갔더니 역시 잘못된 길이었다. 조금 오르다 보니 더 이상 이정표도 없고 길에도 풀이 무성했다. 주위에 사람도 없으니 물어볼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짐작되는 방향을 그냥 걸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걸어가다가 강아지를 끌고 오는 주민에게 물어보니 오던 길로 계속 가라고 했다. 결국 평지 길을 놔두고 길도 없는 산으로 올라갔다 온 셈이었다. 온톤 마을로 들어섰지만 너무 조용했다. 그러다가 다행히 마을주민을 만나 알베르게(Albergue Tu Camino) 위치를 물어봤더니 언덕 쪽을 가리켰다.
다시 계단을 올라 알베르게에 도착했지만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하긴 오후 2시에 연다고 했으니 당연했다. 알베르게 앞에 있는 나무벤치에 배낭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있는데, 주인부부가 왔다. 혹시 근처에 바르나 가게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1마일은 가야 할 거라고 했다.
난감한 표정을 지었더니 피곤하면 조금 기다렸다가 점심을 함께 먹자고 했다. 나야 완전 OK지. 배낭을 알베르게 안에 들여놓고 1시간 정도 있다가 주인이 차려준 점심을 함께 먹었다. 에피타이저인 수프와, 계란과 소시지로 만든 메인 요리 등 2가지였는데, 수프가 조금 짠 것 말고는 아주 맛있었다. 답례로 한복엽서와 바욘 대성당에서 산 배지를 선물로 줬다.
점심을 먹고 났더니 알베르게 오픈 시간인 오후 2시가 다 됐다. 결국 오늘도 첫번째로 알베르게 침대를 배정받았다. 샤워하고 빨래까지 마친 후에 일기를 쓰려고 하는데, 휴대폰 충전코드가 없어졌다. 아마도 이전 알베르게에 두고 온 것 같다. 몇 번 만난 적 있는 순례자에게 충전코드를 빌려줄 수 있냐고 물어보는데, 옆에 있던 다른 순례자가 빌려주겠다고 했다.
마침 그 순례자가 충전코드를 여러 개 가지고 있길래 나한테 팔 수는 없겠냐고 물어보니 본인도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게는 할 수 없다고 했다. 빨리 구입할 수 있어야 할 텐데, 걱정이다.
저녁에는, 온톤 마을에 바르나 가게가 없어서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알베르게에서 제공하는 저녁식사를 먹기로 했다. 8시에 저녁을 준다고 해서 한참 기다렸다. 더구나 코드를 빌려서 충전한 터라 다시 빌리기 미안해서 배터리 절약을 위해 휴대폰 보는 것도 자제해야 하니 시간이 더 느리게 가는 것 같았다.
8시가 되어 식당에 자리잡고 앉았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식사가 나오지 않았다. 15분쯤 지난 후에, 이번에는 식탁을 정리해야 한다고 했다. 아무래도 인원이 많으니까 식탁이 더 필요했던 거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8시 반에 돼서야 저녁식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나온 음식을 보니 기다릴 만했다. 에피타이저로 양상추 샐러드가 나오고 곧이어 파스타를 주는데, 그릇이 어마어마하게 큰 것에 모두 놀랐다. 하지만 파스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 입맛에도 맛있었고, 또 여럿이 먹다 보니 다 먹어 치웠다. 나도 한 그릇 반이나 먹었다. 레드와인도 마실 만큼 줬다. 마지막에 디저트로 푸딩을 줬는데, 그 또한 맛이 좋았다.
식사하면서 시끄럽게 대화하던 게 식사를 마치고도 끝날 줄 몰랐다. 나는 유럽의 여러 나라 언어가 섞인 대화를 알아들을 수도 없거니와 중요한 내용도 아니어서 먼저 일어나 양치한 후에 자리에 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