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19일 (월)
아침에 일어나서 씻은 후에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바로 출발했다. 아침에 먹을 걸 준비하지도 않은데다 걷는 동안 쉬어갈 곳이 있을 거란 기대에서였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걸어야 했다.
산토냐의 알베르게는 시내 중심가에 있고 카미노도 한동안 시내를 이어졌다. 시내를 벗어나고도 포장도로를 따라 걸으니 가로등이 있어서 걷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다가 베리아 해변(Playa de Berria)에서 정식 카미노인 오른쪽으로 난 노하(Noja) 방향으로 가지 않고 왼쪽의 포장도로로 걸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노하로 가는 해변길이 험하다고 해서였다.
그런데 조금 가다 보니 이 길에도 인도(人道)에 조가비 모양이 있었다. 이 길도 카미노인가? 게다가 아르고뇨스(Argoños) 마을에는 산티아고의 조각상까지 세워놓았다. 내가 알기로 정식 카미노는 노하를 거쳐가는 길인데, 이 길에도 꽤 많은 순례자들이 지나가는 가보다.
오늘 걸으면서 옥수수 수확하는 걸 처음으로 봤다. 프랑스길을 걸을 때부터 이곳에서 농작물을 어떻게 수확하는지 궁금했었는데, 오늘 드디어 그 광경을 보게 된 것이다. 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수확하고 있긴 했지만 그 모습은 자세하게 볼 수 있었다.
여기는 경사진 경작지가 많은 데도, 오늘 보니 콤바인과 대형트럭이 세트가 되어, 콤바인이 옥수수대를 잘라 분쇄해서 바로 옆에 따라다니는 트럭에 싣고 있었다. 그러니까 여기는 옥수수 열매를 먹기 위해 농사짓는 게 아니라 가축사료로 쓰기 위한 것 같았다. 지나다니면서 볼 때 옥수수가 좀 잘다고 생각했었는데, 어차피 옥수수 줄기와 열매를 함께 분쇄해서 가축사료로 쓸 것이기 때문에 별 상관이 없었던 거였다.
오늘은 걷는 동안 쉴 만한 바르가 하나도 없었다. 처음엔 이른 시간이라서 문을 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걷는 내내 바르가 없는 마을을 지나거나 멀리 마을이 보이는 곳에서 카미노는 방향으로 나있어 그 마을을 지나지 않으니 바르를 만날 기회가 없었다(물론 그 마을에도 바르가 있었는지는 모른다).
한참 걷다 보니 ‘Albergue de Peregrinos’란 이정표가 보였다. 여기가 어느 마을이지? 또 다시 정신 없이 걷는데 왼쪽 언덕에 집 한 채가 있고 벽면에 ‘Güemes’라고 쓰여있었다. 벌써 오늘의 목적지인 구에메스에 온 건가? 언덕을 올라 의자에 앉아있는 할머니한테 물어보니 조금만 더 가면 알베르게(Albergue La Cabaña del Abuelo Peuto)가 있을 거라고 했다.
오르막을 올라가니 다시 이정표가 나타나고, 그곳엔 ‘Albergue del Abuelo Peuto’라고 쓰여있었다. 오늘 묵으려고 했던 바로 그 알베르게다. 그리고 왼쪽으로 하얀 건물이 보였다. 맞다, 그 알베르게가 하얀 집이었지.
인터넷에서 보면 이 알베르게 앞에서 하얀 수염을 가진 할아버지가 혼자 또는 순례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이 많이 검색된다. 그만큼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그것 때문에 이곳에 묵으려고 한 건 아니지만(거리가 맞아서 선택하게 된 것뿐이다), 괜찮은 경험을 하게 된 것 같다.
접수한 후에 침대를 배정받았는데, 전부 1층으로만 된 침대라서 아주 좋았다. 처음엔 출입구에서 먼 곳의 침대를 쓰려다가 생각해보니 콘센트가 가까이 있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출입구 바로 오른쪽 침대를 쓰기로 했다. 아무 침대나 먼저 고를 수 있는 게 먼저 온 사람의 장점 중 하나다.
이 알베르게는 마을과 많이 떨어져 있어서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다른 곳을 갈 수가 없었다. 배는 고픈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했더니 오후 2시에 식당으로 모이면 함께 식사할 수 있다고 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바르에서 어설프게 사 먹는 것보다 이렇게 알베르게에서 먹는 게 훨씬 맛있다.
점심메뉴는 샐러드와 콩수프였는데, 꽤 맛있는 음식이었다. 순례자들과의 대화도 대부분 카미노에 대한 이야기여서 대충 알아들을 만했다. 어느 나라에서 왔냐? 어디서 출발했냐? 어디까지 가냐? 내일은 어디서 묵을 거냐? 그런 대화가 대부분이었다. 점심식사 때 레드와인도 몇 잔 마셨더니 좀 몽롱했다.
점심식사 후에 내일의 목적지로 정한 산타크루스 데 베사나(Santa Cruz de Bezana)를 찾아보니 이곳의 알베르게가 문을 닫았다고 했다. 이러면 일정을 조정해야 한다. 그 다음 알베르게가 있는 마을까지는 너무 멀었다. 이럴 땐 걷는 거리를 줄이는 수밖에 없다. 결국 내일은 산탄데르(Santander)까지만 걷고, 다음날은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목적지인 산티야나 델 마르(Santillana del Mar)까지 버스를 타고 가는 것으로 결정했다.
저녁에는 7시 반에 모임을 갖고 그 후에 저녁식사를 한다고 해서 오랜 시간을 무료하게 보냈다. 이 알베르게에서는 와이파이도 잘 안 돼서 유튜브를 제대로 볼 수 없으니 더 지루했다. 사무실 근처에서는 잘 되는데 거리가 좀 떨어져있는 침실에서는 안 됐다.
그래서 좀 추운 날씨인데도 7시쯤 와이파이가 잘 되는 사무실 근처로 자리를 옮겼다. 동영상을 보고 있는데, 인터넷에서 봤던 그 사람(Padre Ernesto Bustío, 85세)이 다가오더니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했더니 몇 마디 덕담을 해줬다. 그 사람은 영어를 잘 모르고 나는 스페인어를 모르니 긴 얘기를 할 수는 없었다. 아무튼, 알베르게에 도착하명서 그의 존재여부가 궁금했었는데, 아직 생존에 있었다.
동영상 보기를 멈추고 식당으로 갔더니 저녁 먹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식당 밖의 나무벤치에 앉아있는데, 7시 반이 조금 안된 시간에 자원봉사자(이 알베르게는 자원봉사자들이 운영한다고 했다) 몇몇이 종을 치며 앞장서고 오늘 이 알베르게에서 묵는 순례자들이 모두 그 뒤를 따라갔다. 건물 뒤쪽에 있는 넓은 방으로 안내됐는데, 이런 모임을 하는 장소인 것 같았다.
처음에는 좀 전에 봤던 흰 수염의 신부가 몇 가지 얘기를 했다. 오늘 여기에 19개국의 순례자들이 모였다는 것과, 신부의 나이가 85세란 것 말고는 알아듣지 못했고 그 내용도 그다지 중요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신부가 20분 정도 이야기를 마친 다음에 자원봉사자 중 한명이 앞에 나섰다.
그런데 그는 앞의 신부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했다. 처음에는 같이 일하고 있는 자원봉사자들을 소개하고 나서 이 알베르게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인터넷을 찾아보니 거기에 지금 얘기하고 있는 것보다 더 자세한 내용들이 있었다. 그러니까 5분이면 읽어볼 수 있는 내용을 30분이나 장황하게 설명하는 거였다. 대부분 그런대로 경청하고 있는 듯했지만, 나를 비롯한 몇몇은 지루한 표정이었다.
지원봉사자의 얘기가 끝난 후에는 남녀 둘이서 노래 부르는 시간도 있었다. 그것도 2번씩이나. 나름대로 재미있게 구성한 거였겠지만 그 노래마저 지루하게 느껴졌다. 나는 앉은 자리에서는 음악을 들어본 적이 거의 없다. 대부분 운동이나 등산하면서 음악을 듣기 때문에 빠르고 신나는 노래를 좋아하게 됐다. 그런데 축 처진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지루할 수밖에.
그렇게 8시 반이 지나서야 식당으로 이동해서 저녁식사가 시작됐다. 순례자들이 너무 많아서 식당은 물론 밖에 있는 식탁에도 음식이 차려졌다. 나는 조금 일찍 식당으로 갔기 때문에 밖의 식탁으로 안내 받았는데, 처음엔 조금 추운 듯했지만 이내 괜찮아졌다.
치킨과 국수가 들어가 수프는 조금 짜긴 해도 맛은 좋았다. 주는 양도 많아서 2그릇이나 비웠다. 메인 메뉴는 치킨 볶음밥이었다. 치킨도 꽤 많이 들어있고 밥도 잘 익어서 이 또한 아주 맛이 좋았다. 마지막 디저트는 사과를 하나씩 나눠줬는데, 시지 않은 게 마음에 들었다.
이 알베르게는 식사와 숙박이 모두 기부제로 운영되는데, 다른 순례자들은 얼마씩 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25유로를 냈다. 그런데 100유로짜리밖에 없어서 자원봉사자에게 잔돈으로 바꿔달라고 해서 지불했다. 점심과 저녁, 그리고 다음날 아침식사에 숙박비까지 포함된 가격이어서 조금 덜 낸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