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22일 (목)
오늘은 스페인의 천재적인 건축가인 가우디(Antoni Gaudí)의 작품으로 유명한 엘 카프리초(El Capricho)가 있는 코미야스까지 가기로 했기 먼 거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걷는 동안 바르가 있는 마을이 한 곳쯤은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렇지만 5시간 동안 걷는 내내 바르를 만날 수 없었다. 날이 밝기 전에 지나친 이름 모를 마을들은 말할 것도 없고, 오레냐에서는 어둠 속에 불을 밝힌 교회(Iglesia de San Pedro de Oreña)만 보였다. 또한 시구엔사에서도 교회(Iglesia de San Martín de Tours en Cigüenza) 말고는 별다른 건물조차 없었으며, 기대했던 코브레세스에서도 바르는 없었다.
코브레세스의 교회(Iglesia de San Pedro Advíncula de Cóbreces)를 돌아 마을로 가니 밖에 테이블과 의자를 내놓은 집이 있었다. 이곳 바르의 전형적인 모양새였다. 그런데 잡화가게였다. 먹기만 한다면 이런 가게도 괜찮겠지만, 바르에 들르는 목적은 먹고 마시고 화장실도 이용하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이 가게에서 해결할 수 있는 건 절반도 안되는 셈이었다. 어쩔 수 없이 가게 밖으로 나왔다.
마침 길 건너편에서 대화하고 있는 마을주민들에게 가서 바르가 있는 곳을 물었더니, 이 근처에는 없고 코미야스까지 가야만 한다고 했다. 이제 어쩌지? 여기서 카미노를 따라 가면 코미야스까지 10km가 조금 넘고, 차도(CA-131)를 따라가면 7km 정도였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가기 위해 차도로 걸었다. 그런데, 차도에서도 가끔 카미노 표시가 보였다.
그렇게 2시간쯤 걸어서 코미야스에 도착했다. 포장도로만 계속 걸었더니 발바닥에 불이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시 카미노를 따라 걷다가 코미야스 초입에서 바르를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빵집이었다. 그래도 이곳에서는 먹고 마시고 화장실도 이용할 수 있어서 바르 안으로 들어갔다.
먼저 화장실을 다녀와서 오렌지주스와 토르티야를 주문해서 다 먹고 난 다음, 옆에서 음식을 먹고 있는 마을주민에게 알베르게(Huella del Camino) 표시가 돼있는 지도를 내밀며 어디로 가면 되냐고 물었더니, 잘 모르겠다고 했다.
할 수 없이 내가 그냥 찾아 나섰다. 이럴 때도 조가 가르쳐준 지도 앱은 아주 유용하다. 그렇게 알베르게를 찾아갔는데, 입구에는 오후 2시부터 오픈한다고 붙여놓았다. 2시간 반을 기다려야 한다. 배낭을 알베르게 입구에 내려놓고 필요한 짐만 챙겨 엘 카프리초를 찾아갔다.
엘 카프리초는 가우디가 바르셀로나 이외의 지역에 지은 건물 3곳 중 하나다. 나머지는 레온(León, Museo Casa Botines Gaudí)과 아스토르가(Astorga, Palacio Episcopal)에 있다. 가우디의 후원자였던 구엘(Eusebio Güell)의 장인이 이곳 코미야스의 귀족(marqués de Comillas)이었는데, 고향에 집을 짓고 싶어하는 장인의 바람을 가우디를 통해 이뤄드린 것이라고 한다.
지도를 보면서 엘 카프리초를 찾아갔더니 예상과는 달리 입장료를 내야 했다. 7유로. 좀 비싸긴 했지만 이왕 온 김에 들어가보기로 했다. 그런데 입구부터 너무 실망스러웠다. 인터넷에서 보면 멀리서 봐도 아주 잘 보이고 사진도 멋있게 나왔던데, 지금은 건물에 바짝 붙여 울타리를 설치해놔서 울타리 밖은 물론 안에서도 전경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그리고 주위도 그늘이 많이 져서 다소 어두운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입장료를 받으려고 그랬겠지만, 가우디의 작품을 망쳐놓은 것 같았다. 보자마자 실망이 크니 실내로 들어가서도 여러 전시물들이 좋아 보이지만은 않았다.
안 좋은 추억을 남긴 엘 카프리초 관람을 마치고 알베르게 인근 광장에서 점심을 먹었다. 1시간쯤 전에도 뭘 좀 먹긴 했지만 또 배가 고팠다. 오늘은 메뉴판을 보고 보카디요를 주문했는데, 또 실수였다. 돼지고기란 단어만 보고 주문한 거였는데, 나온 건 얇은 돼지고기를 바게트 속에 넣은 게 다였다. 그러고도 가격은 8.5유로나 했다. 뭔가 속은 느낌이지만 몰랐으니 어떨 수 없는 일이다.
오후 1시 반쯤 되어 알베르게로 다시 올라갔다.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보면서 기다리다가 2시가 되어 문이 열리길래 안으로 들어갔더니 대뜸 예약했냐고 물었다. 아니오! 예약을 안 했으면 침대가 없다고 했다. 이런!
이제 어쩌나? 인터넷으로 주변숙소를 찾아봤다. 가까운 곳에 숙소가 있긴 한데, 숙박료가 45유로나 된다. 그 숙소에서라도 묵을까 하다가, 어차피 내일 걷는 거리가 꽤 멀기 때문에 조금 더 가서 묵기로 했다. 그래서 산 비센테 데 라 바르케라까지 가기로 하고, 다시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그곳에도 알베르게가 있었다.
이제 그곳으로 어떻게 가야 하지? 주민들에게 물어봤지만 방법을 알지 못했다. 마침 가까운 곳에 관광안내소(Oficina de Turismo de Comillas)가 있어서 안으로 들어가, 산 비센테 데 라 바르케라로 가려고 한다니까 버스시간표를 보여줬다. 그런데 오후 2시5분과 6시25분에 가는 버스가 있었지만 2시5분은 이미 지나버렸고, 6시25분까지 기다리는 건 너무 늦은 것 같아 택시를 타고 가기로 했다.
그래서 택시 타는 곳을 물었더니 옆으로 돌아가면 된다고 했다. 그런데 운 좋게도 바로 택시가 왔다. 먼저 타고 온 손님들이 내리자마자 배낭을 트렁크에 싣고 산 비센테 데 라 바르케라의 알베르게(Albergue de peregrinos de San Vicente)를 향해 달렸다. 택시요금은 17유로가 나왔다.
알베르게에 도착해보니 먼저 온 순례자들 몇 명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 알베르게는 오후 3시에 문을 연다고 붙어있었다. 그냥 앉아있기엔 너무 심심해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햇볕이 너무 따갑고 땀이 났다. 다시 알베르게 앞으로 와서 오픈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알베르게 문은 3시 정각에 열렸다. 나보다 먼저 온 순례자들이 먼저 접수하고 나는 다섯번째로 접수를 마쳤다. 숙박비는 기부제라는데, 인터넷에서 본 요금대로 10유로를 냈다. 그런데 바로 뒤에 접수한 순례자는 15유로를 냈다. 세탁비는 3유로다. 직원에게 빨래를 주면 세탁기를 돌려준다. 건조기까지 사용할 수 있지만 추가비용을 아끼기 위해 세탁한 옷들을 빨래줄에 널어놓았다. 저녁때까지 마르길 바라면서.
이제 저녁 먹을 곳을 찾아나서야 한다. 알베르게가 외진 곳에 있어서 알베르게에서 먹을 수 있는 게 있나 물어봤지만, 좀 멀더라도 밖으로 나가야 된다고 했다.
오후 6시쯤 저녁을 먹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가 마땅하게 먹을 곳을 찾지 못하고, 가게에서 즉석식품을 사서 알베르게로 다시 돌아와 전자레인지에 음식을 데워먹었다. 저녁 먹을 곳이 딱히 없을 때는 값도 싸고 입맛에도 맞는 이런 즉석식품을 선택하는 것도 좋은 방법 중 하나다. 그런데 어제까지는 가게에서 파는 걸 보지 못했었는데, 오늘 비로소 찾게 된 것이다. 바르에서 간단하게 먹는 식사보다는 꽤 괜찮은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