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미노 17일쩨, 산 비센테 데 라 바르케라에서 콜롬브

by 이흥재

2022년 9월23일 (금)


여느 때와 같이 아침 6시에 일어나 화장실 먼저 다녀온 후에 어제 사다 놓은 사과파이와 납작 복숭아를 먹었다. 아침식사를 하지 못하는 날도 있어서 이 정도라도 먹고 나면 든든한 기분이다.


6시45분에 알베르게를 나섰는데, 오늘도 제일 먼저 출발한 거였다. 밖은 아직 어둡지만 도심지에서는 가로등이 있어서 걷기에 어려움은 없다. 요즘은 날이 밝을 때까지 대부분 포장도로를 걷게 되어 그런대로 편하다. 더구나 오늘은 당초에 묵을 예정이었던 코미야스보다 11.6km나 지나서 출발했기 때문에 급할 것도 없는 날이었다.


1시간 반 남짓 걸어서 에스트라다 탑(torre de Estrada) 앞을 지났는데, 오래 전에 인터넷에서 봤던 모습 그대로였다. 무너진 탑을 수리하기 위해 가설물을 설치해놨는데, 공사가 전혀 진행된 게 없는 것 같았다. 도로에 이정표까지 세워놓을 걸 보면 꽤 중요한 문화재인 것 같은데, 아마 앞으로도 당분간은 공사가 재개될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차라리 보기 흉한 가설물을 없애고 무너진 탑을 그대로 보존하는 게 낫이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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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쯤 더 걸어서 세르디오(Serdió)에 있는 바르에 도착해 주스와 샌드위치를 주문해 먹고 다시 걸었다.


다시 1시간쯤 걸어서 페수에스(Pesués)까지 갔는데 갑자기 배가 아파와서 다리 건너기 바로 전에 있는 바르에 들어가 화장실에 다녀온 후에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는데, 에스프레소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양은 조금 더

많았지만. 그래도 2개씩이나 주는 설탕을 넣지 않았더니 처음엔 꽤 쓰다고 생각했는데 몇 모금 마시고 나니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렇지만 결국 다 마시진 못하고 3분의1쯤 남겼다. 오랜만에 마시는 커피였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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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건너 칸타브리아 지방의 마지막 마을인 운케라(Unquera)를 향해 걸었다. 이곳은 철길 바로 옆을 지나는 카미노여서 운치가 있었다. 여기도 유칼립투스 조림이 한창이었다. 특별한 용도는 잘 모르겠지만 곧게 빨리 자라기 때문에 쓰임새가 많을 것 같긴 하다. 다리 밑을 지나는데 교각에 아주 큰 글씨를 써놓았지만, 언제나 그렇지만 그 뜻은 모르겠다. 그래도 보기에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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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각 밑 큰 글씨.jpg

저 멀리 운케라 마을이 보이는데, 남녀 한 쌍의 순례자가 강아지까지 데리고 앞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짐도 바리바리 들었는데 어디까지 가는지는 모르겠다. 앞서가던 그들이 이내 나무벤치로 가서 쉬는 동안 내가 그들을 앞질러 운케라로 향했다.


운케라 역을 지나 옷가게에 들어가서 양말과 장갑을 사고 싶다고 했더니, 여긴 없다면서 조금 더 가면 있을 거라고 했다. 그녀의 말대로 다른 가게로 갔더니 양말과 장갑이 있긴 한데, 생각했던 제품들이 아니었다. 보여주는 장갑은 너무 두껍고 양말은 너무 비쌌다. 한 켤레에 11유로나 하는 양말도 있었는데, 3켤레에 6유로쯤 하는 흰 양말만 사서 가게를 나왔다.


이제 다리(Puente de Unquera)만 건너면 아스투리아스 지방(Comunidad Autónoma del Principado de Asturias)의 부스티오(Bustio)다. 원래는 이 마을에 머물려고 했었는데, 알베르게가 문을 닫았다고 해서 콜롬브레스(Colombres))까지 가게 됐다. 다리를 건넜더니 바로 옆에 ‘Haciendo El Camino’란 조각상이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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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상.jpg

부스티오에서 콜롬브레스로 가는 길은 끝없는 오르막이다. 운케라에서 콜롬브레스까지 2km라고 했는데, 그 절반이 오르막인 것 같았다. 그런데 길바닥에도 돌로 디자인을 해놨다. 부스티오 마을에서는 좌우에 시멘트 포장을 하고 가운데만 돌을 깔아놓았는데, 콜롬브레스 마을로 가니 바닥이 전부 돌이었다. 가끔 깨진 곳을 수리하지 않고 그냥 둔 곳도 있었지만 많을 공을 들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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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바닥01.jpg

언덕을 올라 조금 더 갔더니 파란 벽의 알베르게(Albergue El Cantu) 건물이 보였다. 가까이 갔더니 문이 열려있었다. 그런데 주인이 열심히 청소 중이었고, 오후 1시에 오픈할 거니까 점심부터 먹고 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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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을 알베르게에 두고 마을로 갔는데, 바르에서는 술이나 커피만 파는 것 같았다. 요기할 수 있는 게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인근에 가게가 있어서 들어갔더니 다양한 즉석식품을 팔고 있었다. 그래서 점심은 물론 저녁과 내일 아침에 먹을 것까지 사 가지고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즉석식품.jpg

오후 1시가 되어 알베르게 문 열기는 기다리고 있는데도 주인은 아직 청소가 덜 끝났다면서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할 수 없이 20분을 더 기다렸다가 주인이 오라고 해서 접수를 시작했다. 순례자여권에 스탬프는 나한테 직접 찍으라고 하면서 주인은 여권의 내용을 노트에 옮겨 적었다.


예약한 순례자(배낭이 이미 와있었다)는 있었지만 접수는 오늘도 첫번째였다. 침대를 배정받고(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면 된다) 샤워한 후에 빨래부터 했다. 세탁기는 3유로, 건조기는 4유로였는데 세탁기를 쓰기엔 좀 아까운 마음에서다. 저녁 때까지 빨래가 마르기만 바랐다.


빨래해서 널어 논 후에 점심을 먹기 위해 좀 전에 산 즉석식품을 가지고 식당으로 내려갔다. 일기 쓸 노트북도 함께 챙겼다. 식당에는 전자레인지가 있어서 즉석식품을 데워먹을 수 있었다. 좀 전에는 식당에서 미처 숟가락 있는 걸 몰라, 가게에서 1회용 숟가락을 하나 사왔는데 나중에 보니 식당에도 숟가락이 있었다. 저녁에는 그걸 사용해야겠다.


날씨가 제법 쌀쌀한 요즘도 젊은 순례자들은 반바지에 반소매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데, 나는 바람막이 점퍼를 입어야 견딜 수 있다. 손도 시렸다. 한국에서 갖고 온 장갑은 며칠 전 산티야나 델 마르의 알베르게에서 잃어버렸기 때문에 다시 사야 한다(운케라의 양말가게 주인 말로는 야네스[Llanes]에 가면 장갑을 살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저녁에도 가게에서 사온 즉석식품을 데워먹었다. 고기와 야채가 골고루 들어있어서 영양이나 맛 모두 좋았다.


중년남녀들의 수다는 어딜 가나 비슷한 것 같다. 알베르게에서 같은 방에 묵었던 사람들이 저녁 때도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한참 동안 수다를 떠는 걸 봤었는데, 밤 9시가 지나 방으로 들어왔는데도 너무 시끄러웠다. 알베르게 규정상 10시까지는 뭐라고 할 수 없어서 잠도 자지 못하고 기다렸는데, 다행히 10시가 되기 전에 불을 끄고 잠잠해졌다.


그런데 웬걸, 친구인지 부부인지 잘 모르겠지만 가까운 사이인 것 같은 남녀 둘이 남자는 내 침대 위에, 여자는 바로 옆 침대에 누웠는데 둘이서 번갈아 가며 코를 골아댔다. 두들겨 깨우고 싶을 걸 억지로 참으면서 선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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