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1일 (토)
오늘은 목적지인 아빌레스까지 거리가 다소 멀어서 5시45분에 알람을 맞춰놓고 잤다. 15분이 긴 시간은 아니지만 심리적인 느낌으로, 언제나 좀 멀다고 느끼는 거리를 걷는 날에는 이 시간에 일어난 것으로 암묵적인 규칙을 정했다.
혼자 쓰는 침실에서 일어났더니 아침에 불을 환하게 켜놓고 배낭을 꾸릴 수 있어서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고 짐을 쌀 수 있는 게 좋았다. 알베르게에서는 다른 순례자들이 모두 잠든 시간에 짐을 꾸리려니까 불을 켤 수 없어서 더듬거리며 물건을 찾아 배낭에 넣으면서 몇 번이나 물건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요즘은 저녁에 최대한 짐을 꾸려놓고 아침에는 한 두 가지만 챙기는 것으로 새로운 규칙을 또 하나 만들었다.
히혼이 오비에도보다 작은 도시인줄 알았는데, 인터넷을 찾아보니 인구가 훨씬 많았다(2021년 기준 히혼 268,896명, 오비에도 217,552명). 도시규모도 훨씬 더 큰 것 같았다. 아침에 도심을 벗어나는 데도 한참 걸릴 정도로.
오늘 히혼에서는 아주 낯선 광경을 목격했다. 아직 6시밖에 안됐는데도 거리가 소란스러웠다. 무슨 일인가 해서 주위를 둘러봤더니 20~40대로 보이는 남녀들이 거리에서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계속 걸으면서 분위기를 보니까 디스코클럽이 끝나는 시각이어서 지금 막 밖으로 나온 사람들인 것 같았다. 그래도 아직은 여흥이 남았는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하나 둘씩 속삭이거나 여럿이 큰 소리로 얘기하고 있었다.
히혼 시내를 벗어나는 데만 50분이 걸렸다. 그리고 공장지대가 이어졌다. 카미노를 걸어오면서 공장지대를 보기는 오늘이 처음이었다. 스페인에도 어딘가에 공장들이 많이 있을 텐데, 그중 일부를 본 것 같았다.
아빌레스에 가까워지면서 제철소인 듯한 공장도 보였다. 바닥에 철판을 만드는 중간소재인 슬라브도 보이고, 완제품인 코일을 싣고 달리는 트럭도 있었다. 그런데 공장상태가 너무 허름했다. 철광석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용광로는 없는 것 같고, 한쪽에 고철들이 많이 쌓여있긴 한데 그 정도 양으로는 제철소를 돌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가끔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보이긴 하는데, 그저 궁금증만 쌓여갔다.
4시간 정도 걸어서 처음 만난 바르에 길을 건너서 들어갔다. 아침도 먹어야 하고 화장실에도 가야 했다. 오랜만에 오므라이스와 맥주를 시켜서 먹고 있는데, TV에서 블랙핑크의 브이로그가 나오고 있었다. 한글과 영어자막이 있긴 한데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무도 보는 사람은 없었지만 스페인의 시골마을에서 블랙핑크를 볼 수 있다니, 자랑스러웠다. 누군가 블랙핑크에 관심 있는 사람이 틀어놓은 게 분명했다.
오비에도에 이어 어제 히혼에서도 현대자동차 전시장을 봤었는데, 오늘은 도로에 세워진 현대자동차 광고판도 있었다. 외국인들이야 다들 무심하게 지나가겠지만, 내게는 가슴 벅찬 순간들이었다. 아, 대한민국!
아빌레스에 접어들면서 카미노는 큰 길(N-632) 오른쪽으로 돌아,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온 아빌레스 하구(Ría de Avilés)를 따라가도록 돼있었다. 멋진 풍경들이 이어졌지만 이때쯤이면 발목이 아파와서 그런 풍경을 감상할 여유가 별로 없었다. 이곳 사람들도 강변을 따라 열심히 걷고 달리고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한참 동안 정신 없이 걷다가 지도를 보니 카미노에서 조금 벗어나 있었다. 하지만 지도를 보면서 카미노로 찾아가면 되니까 걱정할 것까지는 없었다. 계속 걸어가다 보니 하구 맞은편에 인터넷에서 봤던 오스카르 문화센터(Centro Cultural Internacional Oscar Niemeyer)가 보였다. 그렇지만 가까이 가 볼 수는 없고 그저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다였다.
이곳에서 아빌레스 시내로 들어가려면 철길을 건너야 하는데, 고가도로 모양이 아주 특이했다. 간단하게 육교를 만들어 놓으면 간단했을 테지만, 아주 길게 경사로를 만들어놓았는데 다 건너와서 보니 캔틸레버가 엄청 길었다. 어떻게 이런 구조를 만들 수 있지? 아무리 봐도 대단한 광경이었다.
이제 알베르게(Albergue de Peregrinos Pedro Solís)를 찾아가야 했다. 지도를 봤더니 앞으로 쭉 가서 다음 골목에서 왼쪽으로 가면 됐다. 그렇게 앞으로 광장까지 가서 그늘에서 지도를 보고 있었더니 옆에 있는 주민이 뭘 찾고 있느냐고 참견을 했다. 알베르게를 찾아간다니까, 앞으로 쭉 가면 된다고 알려줬다. 지도에도 그렇게 표시돼있어서 알베르게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알베르게에 도착했는데, 오후 1시에 오픈한다는 안내문이 붙어있었다(그래도 다행인 게 11~3월에는 오후 4시에 오픈한다고 했다). 앞으로 40분 더 기다려야 한다. 어디에 다녀오는 것도 애매한 시간이어서 동영상을 보면서 기다렸다. 그 사이 신발을 벗어서 햇볕 잘 드는 곳에 갖다 놓고 말렸다.
20분쯤 지나자 여자순례자 2명이 왔다. 그들도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오후 1시가 되자 문이 열렸다. 오늘도 내가 첫번째 접수였다. 직원이 이런저런 안내를 하면서, 내일 이곳에서 마라톤 시합이 있어서 시청(Ayuntamiento de Avilés)부터 카미노 루트를 조금 변경해야 한다고 알려줬다.
샤워하고 빨래까지 끝낸 다음(오늘은 날씨가 좋아서 빨래가 잘 마를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알베르게 직원에게 슈퍼마켓 위치를 물어봤더니 좀 전에 카미노 루트를 알려주기 위해 내게 줬던 지도에 표시해줬는데,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슈퍼마켓에서 여러 가지를 사는 건 아니어도 꼭 필요한 과일이나 음료수 등 먹을거리를 장만해야 해서, 어디서든 우선적으로 슈퍼마켓을 찾게 된다.
슈퍼마켓에서 장을 본(즉석식품 파에야와 복숭아 2개, 오렌지주스를 샀다) 후에, 점심을 먹으러 갔다. 너무 늦게 먹는 거라서 배가 많이 고팠다. 슈퍼마켓 갈 때 봐 둔 식당으로 갔더니 주인이 없었다. 옆에 있던 손님 얘기로는 밖에 있다고 하는데, 자꾸만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서 길 맞은편에 있는 케밥집으로 갔다.
이곳 역시 음식이름을 알 수 없어서 그림을 보면서 주문했다. 그런데 단품은 5.5유로고 , 감자칩과 콜라를 더하면 8유로였다. 케밥만 먹을 순 없어서 세트로 주문했는데, 케밥이 생각보다 양이 많았다. 다행히 2조각으로 잘라서 주길래 하나만 먹고 하나는 저녁에 먹기 위해 싸 갖고 나왔다. 그러니까 저녁에 먹기 위해 사온 파에야는 아무래도 내일 점심에 먹어야 할 것 같다.
저녁에는 점심 때 싸 갖고 온 케밥과 슈퍼마켓에서 사온 복숭아 2개, 요구르트, 오렌지주스로 나름 성찬을 준비해서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