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각하면 여자배구를 선택한 건 잘한 일이다. 당시 나에겐 시선을 돌릴 수 있는 강렬한 것이 필요했다. 어설프면 안됐다. 주변 소리를 다 차단하고 거기에 몰두할 수 있도록 내 몸과 정신을 다 빼앗는 것이 절실했다.
짧게나마 봐서 알고 있던 룰(예를 들면 서브를 넣을 때 선을 밟으면 안 된다, 세트가 끝나면 코트를 바꾼다, 배구공을 세 번 이상 터치하면 실점 등등.), 다른 스포츠에 비해 짧은 랠리, 그 덕분에 빠르게 오르는 점수, 그럴 때마다 집중하고 환호할 수 있다는 점.
세어보면 여자배구를 선택해야만 했던 이유는 많다. 혼란스럽고 힘들었던 시기를 견뎠고, 앞으로도 견뎌내야 한다는 사실을, 끝날 때까지는 절대 끝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뒤 깨달은 거다.
그럼 그땐? 꼭 여자배구여야만 하는 이유는 없었다. 나는 급했고, 빨리 내 숨통을 뚫어야만 이 상황을 버틸 수 있었고, 무거운 현실에서 잠시나마 시선을 돌릴 수 있는 여유가 필요했다.
나를 살게 하는 거라면 다른 스포츠를 고를 수도 있었고, 꼭 스포츠가 아니어도 괜찮았다. 영화배우를 좋아해서 배우가 나오는 영화를 볼 수도 있고, 아이돌을 좋아해서 끝없이 쏟아지는 컨텐츠를 즐길 수도 있고, 뮤지컬을 찾아보거나, 클래식 공연을 보거나, 작가를 좋아해서 작가의 작품에 빠져들 수도 있었다.
선택지는 많았다. 지금에야 하는 말이지만, 그런 상황에서 여자배구를 골랐다? 이건 어쩌면 나에게 주어진 운명일지도 모른다. 여자배구를 봐야만 하는 운명.
솔직히 배구는 몰라도 김연경은 알지. 나의 레전드 배구황제. 너무 사랑해요.
2024년 12월 3일 이전, 그러니까 도대체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질 거라는 사실을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시절에 내 존경을 싹 가져가신 그 분. 은퇴했어도 최애선수, 영원히 내 최애선수, 사랑해요 김연경, 배구 역사상 없어서는 안 될 전설, 대한민국 여자배구 전 국가대표 주장,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 영구결번, 영원한 10번 삼산 호랑이, 지금은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 어드바이저, kyk 이사장님, 그냥 너무 좋아요, 그대는 나의 어쩌고 저쩌고 주접 생략.
원래 김연경을 좋아하긴 했다. 지금처럼은 아니지만...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언제나 멋있다. 심지어 그 자부심이 당연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잘하고 능력 있다니. 나도 그렇게 일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쓴 글에 자부심을 가지는데 능력도 있다니. 완전 장난 아님. 짱 멋있음.
그런데 그냥 잘하는 게 아니라 노력도 해? 안타깝게도 노력이 항상 긍정적인 답을 주는 건 아니다. 노력을 쏟아낸 부분을 이루려고 하는 목적에선 그렇다. 나는 그런 식으로 나에게 맞지 않은 걸 찾아가는 것도 긍정적이라고 보지만.
어쨌거나. 잘하는데 노력도 해, 그런데 그 노력을 받아줄 만큼 재능 있어, 거기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가려고 해, 자기가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게 눈에 보여... 그로 인해 배구황제가 얻은 명성과 상이요? 그거 다 쓰려면 손가락이 너무 아파요.
어릴 때부터 일하는 사람이 참 멋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커리어를 만들어 가는 사람은 항상 멋있다. ‘나’라는 사람을 표현할 때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게 스스로에게 얼마나 큰 자부심을 심어주는지, 아는 사람은 알 거다.
나는 노동이 한 사람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노동을 너무 신성시 여겨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너무 하찮게 생각하는 것 또한 안 된다고 생각한다. 노동에 관한 생각은 복잡하고, 아직 스스로 정돈되지 않았기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생각도 많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커리어를 가진 사람을 존경했다. 노동하는 사람이, 거기에 시간을 들이고 정성을 부어 자신의 것을 만들어가는 사람이 짱 멋있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항상 내가 아는 어른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것으로 트집 잡으며 놀리려고 하는 아이들(내가 초등학교 다닐 땐 특정 직업을 낮게 평가하고 그것을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았다. 지금도 그런가? 설마... 2025년인데...)에게 비웃음을 날려주었다. 노동의 가치를 모르는 것들, 아직 어려가지고, 하하하(이것 또한 초등학생 시절의 제 생각이니 지금의 생각과 시기에 맞지 않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내 명함을 가지는 게 꿈이던 시절도 있었고, 일하는 사람을 멋있게 생각한다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인생 계획을 차근차근 꾸려가기도 했다. 물론 그대로 되진 않았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이가 되면 내 집도 있고(ㅋ...), 내 차도 있고(ㅋㅋㅋ...), 내 명함도 있는(ㅋㅋㅋㅋ...), 이름만 대면 사람들이 다 안다는 대기업(ㅋㅋㅋㅋㅋ)의 잘 나가는 커리어우먼(내가 이런 계획을 세우던 나이에는 이 단어가 굉장히 세련된 단어였다. 아닌가, 내가 느끼기에 세련된 단어였나.)일 줄 알았다.
지금은 그때와 생각이 많이 바뀌었고, 꿈도 바뀌었다. 하지만 여전히 ‘내가 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이 신기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좋다.
예를 들면, 소설을 쓰던 내가 에세이에 도전하는 건 쉽다. 그러나 갑자기 해본 적 없는 웹툰 그리기를 도전하면 어렵다. 이런 식이다. 나는 글을 쓰는 일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그만큼 나의 색깔을 만들었지만, 그건 글에 대한 것일 뿐이다.
세상엔 시간을 투자하면 충분히 자신의 색을 만들 수 있는 일이 많지만, 사람에겐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 “나이가 몇인데 이런 걸 하느냐”가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뜻이다. 만약 내가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죽겠다 마음 먹은 걸 기특하게 본 신이 그래, 너 한번 해봐라, 하고 시간을 준다면 앞으로 다섯 세기는 더 보고 죽어야 한다. 그보다 더 걸릴지도.
주변 환경도 마찬가지다. 보호자의 가치관이 주는 영향부터 돈과 시간이 없음에서 오는 영향까지. 하고 싶은 건 많지만, 그걸 다 해낼 수 없는 이유도 분명하다. 하고 싶어 하는 것에 재능이 있는지, 그게 나와 맞는 건지 확인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게 바로 주변 환경과 시간인데.
으윽.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그걸 다 표현하기엔 내 공부가 너무 부족하다. 배우고 표현하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잠시 이야기가 옆으로 갔다. 다시 앞으로 가보겠다.
쉽게 말하면 운동선수가 멋있어 보였다는 뜻이다. 운동엔 영 흥미가 붙지 않고, 재미도 느끼지 못하는 내 눈엔 그걸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 참 대단해 보인다. 그림, 조각, 전시, 디자인, 작곡, 철학, 의학, 수학, 각종 언어, 사진, 노래, 춤, 악기, 영상 연출 및 편집, 강의, 건축... 아주 많지만, 일단 운동만.
그러니까 ‘내가 원래 멋있다고 생각한 부분에 딱 맞는 사람이 운동선수다’라는 부분이 정말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냥 김연경이라는 사람이 멋있고, 나도 그렇게 되고 싶었다는 뜻이다.
불안하고 위태롭던 그 순간을 이겨내기 위해 무언가를 잡아야 한다, 깊게 덕질해야만 살겠다고 허둥지둥거릴 때, 이미 멋있다고 생각했던 어떤 존재는 나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돌돌돌 굴러가는 배구공이 이리로 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배구 경기를 직관하기로 마음 먹은 건 충동적이었다. 그 다음 날인가? 배구 경기가 있다는데, 각 구단 홈 중에 가장 가까운 곳이 바로 인천 삼산월드체육관,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의 홈 경기장이었다.
사실 도쿄 올림픽 여자배구 4강 신화를 쓰던 시절 최애선수는 김희진 선수였다. 지금도 물론 좋아한다. 저는 도쿄 올림픽 여자배구 국가대표 선수들을 모두 사랑해요. 지금도 각 구단에서 뛰는 선수, 부상으로 뛰지 못하는 선수, 은퇴선수 볼 때마다 다 좋고, 행복하고, 안전하고 행복한 배구 했으면 좋겠고, 건강했으면 좋겠고, 각 구단은 제발 선수들 막대접 좀 안 하면 좋겠고... 정신 좀 차리고 선수 대접 잘 좀... 쫌...
하지만 내가 사는 곳에서 화성은 멀었다. 다른 구단 홈도 마찬가지였다. 차는커녕 면허도 없는 내겐 멀어도 너무 멀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쉽게 갈 수 있고, 가까운데, 김연경 선수 나오고, 자리도 있는 경기장이 딱 삼산이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날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는 인천 삼산월드체육관에서 열린 2025년 첫 홈 경기를 승리하게 되었다.
홈 경기장에서 경기가 끝나면 선수들이 퇴근하는 길에 팬들과 대화를 나누고, 사인도 해주고, 사진도 찍어주는, 일명 ‘퇴근길’이 있다. 그때 처음으로 배구장을 갔기 때문에 당연히 몰랐다. 게다가 퇴근길 장소는 지하철 입구와 정반대 방향이었다.
티브이로 봤던 배구와 직관 배구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무엇보다도 응원과 공이 오고 갈 때의 소리가 크게 다가왔다. 처음엔 응원도 음악도 너무 커서 놀랐는데, 지금은 그게 없으면 심장이 뛰질 않는다.
중계도 좋지만, 만약 배구에 관심이 생겨서 한번 보고 싶은데 경기장 갈까, 말까? 고민하신다면 가보는 걸 추천한다. 응원하는 팀의 홈 경기를 가세요. 그냥 가보면 무슨 말인지 압니다.
경기도 이기고, 김연경 선수도 보고, 노래도 나오고(홈 경기장에서 이기면 윤수일의 아파트가 흘러나온다). 재미있다고 생각했었나? 그렇기도 했는데, 처음 간 직관이라서 모든 게 신기하고 정신없었다. 내가 지금... 레전드 배구황제가 코트에서 뛰는 걸 봤다니...
넋을 놓은 채로 지하철을 향해 가려던 내 발걸음을 잡은 건 가방에 식빵 키링을 달고, 손에 식빵 모양의 편지지를 든 채 어딘가로 달려가는 사람들이었다.
덕질을 하다 보면 그런 순간이 있다. 아, 저거 따라가야 할 거 같은데? 하고 생각이 드는 순간. 감이 팍 오는 순간. 저 사람들이 가는 곳에 무언가 있다. 놓치면 죽기 직전까지 내 감을 믿었어야 한다고 한탄하다가 눈 감을 거 같다. 지금 당장 저 뒤를 따라가야 한다.
큰 소리에 오래 노출되어 있었고, 몸이 고된 탓인지 자꾸만 빠져나가려는 정신머리를 부여잡으며 그들을 따라갔다. 거기에, 마치 한낮의 태양처럼 따스하게 빛나는 퇴근길이 있었다.
그날 경기를 멋지게 끝내고 나온 배구황제는 사방을 돌며 팬들과 인사하고, 사진 찍고, 사인해주고, 장난도 치고, 편지도 받아 갔다. 그날 정말 오래 머물러 주셨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멀리서 보던 김연경 선수와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김연경 선수는 다르죠. 멀리서 봐도 좋은데 가까이서 보면 더 좋음. 원래 좋은 건 크게 보라고 하는데,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덴 다 이유가 있다.
사인을 받진 못했다. 아직까지도. 가족은 내가 배구 직관 가는 걸 보고 “가서 김연경 선수 사인 받아오라”는데, 나도 그러고 싶은데 그게 힘들다니까... 사람이 정말 장난 아니게 많다니까... 그나마 내 키가 있어서 얼굴이라도 볼 수 있는 거라니까... 그나마도 나중엔 나보다 큰 사람이 많아졌지만.
그땐 아쉬웠는데, 지금은 그렇지도 않다. 왜냐하면 내가 여자배구에서 발 빼기엔 늦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까. 배구황제께서 배구 발전을 위해 힘쓰시는 한 사인 받을 수 있겠지? 아마도...?
배구황제와 함께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 버스가 떠나고, 나는 대중교통을 이용해 터덜터덜 집에 돌아왔다. 가방 정리를 하고, 씻고, 잠자리에 눕기 전에 약 챙겨 먹고, 스마트폰 충전기를 연결하고, 가만히 천장을 보다가 말했다. “아, 망했네...”
이건... 아무래도 운명이었던 게 맞다. 그렇지 않고선 이렇게 될 수가 없다.
그날 이후로 24–25 시즌 마무리가 될 때까지 나는 삼산에 붙어 살게 되었다(이제 25–26 시즌이니까 또 붙어 살고 있다. 어제, 11월 20일 홈 경기도 다녀왔는데, 지금 시간 금요일 오후 7시 40분, 아직도 아파트 부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