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들어있던 기억의 파편을 들어 올리다
집안 청소를 하다가 박스 안에서 잠자고 있던 외장하드를 발견했다. 15년 전 구입했었는 데, 그 존재를 잊고 살았다. 오래된 유물이라도 발견한 마냥 신기해하면서도 그 안에 어떤 내용이 있을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방 안으로 달려와 노트북을 켜고 부서지기라도 할까 조심스레 외장하드를 연결했다.
그 안에서 펼쳐진 광경은 놀라웠다. 당시 과제 제출이 임박해 벼락치기로 밤을 새우면서까지 작성한 리포트부터, 마지막 학기 취업을 앞두고 닥치는 대로 써제꼇던 이력서가 나왔다. 그리고 ‘일기장. txt’ 파일이 보였다. 이 파일 앞에서 약간의 망설임이 생겼다. 오글거리는 내용이 있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클릭해서 파일을 열었다. 내가 작성한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지금은 기억나는 게 전혀 없었다. 일기장의 문구들도 생소했다. 일기장을 보고 있노라면 이 친구는 어딘가 모르게 우울하면서 어두운 성격에 사회 부적응자 같아 보였다. 일기에는 이십 대 중반에 중2병을 앓고 있는 듯 세상 고민은 혼자 하고 있는 듯했다. 더욱 놀란 것은 그 당시 내 사진이었다. 지금보다 체중이 15킬로 정도는 적게 나갔던 때였는데, 어딘가 모르게 촌스럽고 어색했다. 그때는 옷 입는 센스도 참 부족했구나 했다.
특히나 놀라운 것은 나의 외모였다. 난 내 얼굴이 늘 이렇게 생긴 줄 알았다. 살이 쪄서 얼굴이 찐빵 같다. 동글해진 얼굴 덕분에 못생겼지만, 인상이 좋다는 말로 위안 삼는다. 놀랍게도 사진 속의 내 얼굴은 나와 정말 딴 판이었다. 얼굴은 핼쑥했고, 덕분에 코가 도드라지게 나와 보이면서 70년대 교과서에서나 볼 법한 옛날 가난한 총각의 모습이었다. 마음이 복잡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친구들의 사진도 많이 찾았다. 사진 속에 친구들은 해맑았고, 어렸다. 당시에는 같이 늙어가는 처지라 소주잔을 기울이며 신세한탄을 했는데, 지금 보니 그냥 어린애다. 그런데, 우리들 중 누구도 서로가 늙어간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자주 보다 보니 그 미묘한 변화를 읽지 못했다. 부모님의 얼굴도 지금과 많이 달랐다. 당시에 부모님이 엄청 늙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그때가 제일 젊을 때였다. 돌을 막 넘기며 기어 다니던 조카는 호환마마보다 무섭다는 중2가 되었고, 당시 마당을 뛰어다니던 고양이와 강아지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우리 집 마당은 도둑고양이들이 자주 들락날락거렸고, 어머니가 고양이 밥을 챙겨주셨기 때문에 자기 집인 양 살면서 새끼도 낳았다. 그리고 저 사진 속의 고양이가 그 결실이다. 고양이의 이름은 나비였던 걸로 기억하고, 강아지의 이름은 떠오르지 않는다. 이 사진의 배경이 된 부모님의 집은 작년 재개발사업으로 철거되었고, 이제 이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복잡한 마음이었다. 사진이 없었다면 아무도 찾지 않는 곳에 기억의 파편이 묻혀있었을 것이다. 사진 한 장을 통해서 겨우 몇 개의 조각을 찾았다. 숨 막히는 바쁜 일상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오랜 추억은 부서지고 조각나 어딘가에 내가 찾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일기장을 열었을 때 느껴지는 그때의 감정은 복잡했다. 세상은 이런 곳이니 너의 감정이나 자존심 따위에 신경을 쓰다가 오히려 더 고달파질 테니, 가장 쉬운 방법은 너의 감정과 자존감을 내려놓는 거야. 좋은 인생과 그렇지 않은 인생은 두부를 가르듯이 쉽게 나눌 수 있는 게 아니고, 그 차이도 없어. 내 내면의 소리는 어린 나에게 이렇게 소곤거리고 있었다.
픽사의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Inside Out)’는 어린 소녀가 겪는 감정의 변화를 잘 보여준다. 소녀가 가지고 있는 즐거움, 슬픔 등의 감정을 의인화하여 한 소녀가 성장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소녀가 앓았던 마음의 계절이 지나가고 점점 성숙해갔지만, 대신 세상을 안만큼 그녀의 호기심은 점점 사라졌다. 나에게도 전쟁 같은 일상을 살아가면서 어딘가 잠들어있을지 모르는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다시 깨우진 못하겠지만, 오래된 사진 한 장을 통해서 너도 그러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희미해진 기억을 떠올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