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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장수 Mar 13. 2020

내 안의 마트료시카 인형

벗기고 벗겨도 내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어

대학에서 아랍어를 공부했던 한 여자 후배가 이슬람 문화권에서 자행되는 성폭력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그곳에서는 여성들이 사회적 차별 속에서 성범죄에 쉽게 노출되어있고, 설령 성범죄의 피해자가 된다고 하더라도 보호를 받기보다는 오히려 지탄의 대상이 된다고 했다.


궁금한 것을 못 참아 물어보았다.


"여성들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낮고 쉽게 범죄에 노출된다는 이야기는 들어서 알고 있는데,  여성분들이 부르카나 히잡 같은 걸로 온몸을 꽁꽁 싸매고 다니는 데 성범죄가 많이 일어나는 이유가 참 아이러니하단 말이야"


이 말을 하자마자 나는 ‘아차!’ 했다.  내 질문을 듣고 있는 후배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여성의 옷차림이 성범죄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그게 바로 남자들의 논리라고 했다. 할 말이 없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오해할까 봐서 하는 얘기인데, 내 말은 그 말이 아니라… "

 

변명을 해도 소용없었다. 나는 스스로 깨어있다고 생각했는 데, 아직은 남자의 전형적인 사고에 갇혀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러시아에는 ‘마트료시카’라는 나무 인형이 떠올랐다. 겉에 있는 인형을 열면, 그 안에 좀 더 작은 인형이 들어있고, 그 인형을 열면 또다시 더 작은 인형이 들어있다. 편견의 벽을 넘었다고 생각하면 예기치 않은 다른 편견에 갇혀 있는 내 모습과 닮아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은 괜찮은 걸까? 어떤 주제에 대해서 친구와 대화를 나눌 때면 그 친구의 이야기가 터무니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마치 나는 다 알고 있다는 듯, 내가 경험하고 배운 범위 내에서 훈수 두듯이 이야기할 때도 있었다. 가만 생각해보면, 내가 경험하고 배운 것은 내가 만들어놓은 프레임이 불과한데, 그 안에서 잘난 척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나는 벗기고 벗겨도 내 인식의 틀 안에서 밖에 사고를 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존재였던 것이다. 그럼 내가 믿고 추구하는 가치에는 문제가 없는가?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 보면 나는 평생 진리를 찾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고 진리를 찾으려는 노력 또는 진리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조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장자>에 이런 대화가 나온다. 동곽자가 장자에게 도가 어디에 있냐고 묻는다. 장자는 도가 어디든지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으며, 개미, 땅강아지에도 있고, 기와와 벽돌에도 있으며 심지어 오줌과 똥에도 있다고 한다. 장자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하찮은 것조차 도를 가지고 있으니 특정한 것으로 한정하지 말라는 의미일 것이다. 내가 만든 편견의 감옥에서 벗어나라는 의미로 다가온다.


내게 부족했던 것은 상대를 이해하려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만약 내가 이슬람권에 살고 있는 여성의 입장이라면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발생하는 성범죄에 늘 불안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친구의 입장이라면 충분히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훈수 따윈 둘 일이 없을 것이며 경청하면서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 성차별에 이야기를 하라면 내가 가진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주절주절 이야기를 할 수는 있겠지만, 당사자가 듣기에는 피상적이거나 공감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아직 우리가 공감하지 못한 많은 문제들이 있다. 그중에는 당사자가 되어보지 못한다면 절대 그 고통을 절감하지 못하는 것도 있다. 그나마 공감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대상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꾸준한 관찰이 필요한 것 같다. 오늘은 내가 잊고 살았던 이웃들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해야겠다. 멀리서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면 저이니, 안심하시길.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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