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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i훈 Jul 03. 2019

이해한다는 것

공감 남용 사회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이해하게 된 일들이 부쩍 많아졌다. 나름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이라 믿었고, 없는 것보단 가진 게 많다고 자부해왔지만(단순히 자위적), 사회의 그늘은 내게도 분명 존재했다. 누구나 아플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아픔은 누구에게나 지독하다는 것. 그렇다 보니 아픔에 대해 조심스러워졌고 존중하고 싶어 졌다. 신기하게도 그런 자각이 한동안 나를 지배했을 때, 지인의 추천으로 신형철 작가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읽게 됐다. 타인의 슬픔에 대한 작가의 감수성은 그 안에서 성찰하는 나를 땀 흘리게 했다. 성찰에 대한 성찰. 그러니까 반성하는 내 모습마저도 반성하게 되는 그런 책이었다.


이해한다는 것


기자를 준비한다는 것은 내게 매우 슬픈 일이었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전달해야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처지를 헤아릴 줄 아는 일인 것인데, 기자의 업이란 특정 인물의 목소리에만 국한될 수 없기 때문에 곧 만인의 만사를 ‘이해’하는 것으로 수렴된다. 그러나 내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진다는 것은 슬픈 일이었다.  

  

나는 늘 중심부(사회가 규정해놓은)였다.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나 온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학창 시절엔 친구가 많은 남자아이였다. 공부도 썩 못하는 편이 아니었고, 또래 남자 학생 사이에서 가장 큰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운동도 꽤나 잘했다. 어느 정도 리더십도 인정받아 학생회 간부, 학과 회장을 도맡았고 장교로서 군 복무를 마쳤다. 어느 조직에서든 중심에 서있었다. 그래서 놓친 게 많았다. 시선은 언제나 중심으로만 향했던 탓에 그 주변을 살피지 못했다. 그런 자각을 하게 된 건, 기자를 준비하고 하며 내가 지금 서있는 자리가 오롯이 내 노력으로 오르게 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 뒤였다.     


책과 신문 등 수많은 매체를 접하며 만난 노동자, 장애인, 여성, 성소수자. 처음엔 꽤나 불편했다. 그 대척점에서 살아온 내겐 낯선 존재들이었다. 양질 전환이랄까. 시선이 쌓일수록 낯설었던 것이 익숙해지고, 익숙했던 것들이 낯설어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세상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일상 속 무심코 내뱉었던 말 한마디에도 강자의 특수성이 보편성의 이름으로 채색되어 있었다. 내가 그동안 누렸던 것들도 그것과 다르지 않았음을 알게 된 순간, 기자를 준비하는 건 곧 나 자신의 삶을 속죄하는 일이었다. 동시에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고자 했던 몸부림이었다. 그건 너무나도 슬픈 일이어서 나는 실수를 범하고야 말았다.      


이해를 한다는 것. 그것은 ‘공감’의 환각이었다. 단순히 인간의 이성적 사고에 대한 맹신이 낳은 결례였다. 그 결과 존중이 아닌 동정을 보냈고, 권리가 아닌 시혜로 여겼다. 두뇌를 지나치게 믿은 나머지 타인의 마음까지 두뇌의 영역으로 몰아넣은 이해의 한계였다. 그러고 보면 얼마 전 ‘공감 능력 제로’의 누명을 쓴 야당 대표의 행동도 비슷한 맥락이다. 오롯이 자신의 사유에만 기반했을 터, 강단 위에만 서있던 자가 학생들이 앉아있는 책상의 불편함을 안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앉아봤어야 했다. 직접 경험하고 느껴보지 않았으면 말을 아꼈어야 했다. 때론 그것이 너무나도 지나쳐서 이젠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냐며 피해자들을 괴물로 만들어 버리는 때. ‘이해 능력’의 남용이 ‘공감’으로 오용된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 또한 나 자신을 종종 검열의 영역으로 들일 때가 있다. 단순히 ‘이해’라는 가면을 쓰고 있는 건 아닌지 말이다. 작가 신형철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라면 인간은 자신이 자신에게 한계라고 했다.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한계는 타인을 위로하는 행위가 가면에 불과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슬퍼할 줄 아는 생명이어서, 한계를 슬퍼하며, 그 슬픔의 힘으로, 타인의 슬픔을 향해 노력할 수 있는 존재라고 저자는 덧붙인다. 이 말에 나름의 주석을 달자면, 인간은 ‘이해’에 그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자각하고, 그에 대한 성찰적 태도로 상대방에게 다가간다면, 그것이 가면과 자아의 갈등을 최소화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공감을 너무 쉽게 소비해버리는 우를 범할 일도 없을 테니 말이다.     


적어도 너도나도 ‘공감을 남용하는 사회’에서는 ‘이해’의 반대말이 어쩌면 몰이해가 아니라 ‘공감’ 일지도 모른다. 이해가 그저 슬플 수도 있는 일이라면, 공감은 아픈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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