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델피(DELPHI)
델피는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근교 도시로 아테네에서 자동차로 2시간 정도 달리면 갈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자동차를 렌트해서 가려는 생각도 해 보았으나 혹여라도 난감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로 아테네에 머물며 현지 당일치기 투어상품을 이용하여 다녀오게 되었다.
이 도시는 한국인들이 즐겨 찾는 도시가 아닌지 한국말 가이드 상품이 없어 영어 가이드 투어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투어버스에도 한국인은 나와 내 딸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날 우리의 여행을 책임져 주셨던 가이드분은 족히 연세가 70세는 훌쩍 넘어 보이는 노부인이셨는데 핸드 마이크도 없이 영어와 프랑스어를 다 구사하시며 목청껏 또박또박 많은 것을 알려주시려 노력하시는 열정적인 분이셨다. 그래서인가 내 짧은 영어실력 탓에 그분이 전해주시고자 했던 많은 메시지들을 반도 이해하지 못함이 지금도 죄송스럽고 델피를 생각하면 늘 제일 먼저 우리 가이드 할머니가 떠오르면서 아직도 그때 그 모습으로 건강히 활동하고 계신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이렇게 아테네의 신타그마 광장을 출발한 투어버스는 곧 시내를 벗어나 한적한 평원을 지나는가 싶더니 다시 험준한 산악지역으로 접어든다.
마치 인류에게 불을 가져다줌으로 신들의 노여움을 산 프로메테우스가 여기 어디에선가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형벌을 당하고 있을 것만 같은 영험한 분위기의 높은 산들과 깊은 계곡을 굽이굽이 돌다 보면 신탁의 도시 델피에 도착하게 된다.
델피는 고대 그리스 시대에 태양의 신 아폴론의 신전이 있었던 도시이며 그 시절 사람들은 이 도시의 중심을 세상의 배꼽(옴파로스)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기원전 6세기경에 세워졌다고 하는 이 도시는 여러 역사의 흐름 속에서 폐허가 되었다가 19세기에 와서야 발굴을 통해 옛 흔적을 찾을 수 있게 되었는데, 화려했던 아폴론 신전의 영광은 지금 몇 개의 기둥으로 남아있으며 마케도니아와 로마에 의해 약탈당한 보물창고는 무너져 내린 건물을 다시 지어 흔적을 짐작케 할 뿐이다.
그러나 이곳이 태양신의 도시라고 하는 사실을 의심할 바 없는 것은 이 모든 고고학적 사실과 역사의 고증이 아니라 지금 그 도시를 내리쬐고 있는 태양에 있다 할 것이다. 나무가 우거지고 계곡물이 졸졸 흐르는 우리나라의 산과 달리 델피의 산들은 그저 하늘 아래 두 팔을 벌려 온 가슴으로 태양을 맞이하겠다는 형국으로 서 있으니 그 첩첩산중 그것도 산 꼭대기에 펼쳐진 이 도시에 내리쬐는 태양은 강렬하다 못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지금 하루 낮을 방문하는 이방인에게도 이럴진대 고대인들이게 태양은 그 자체로 경이와 복종과 두려움의 대상이었을 것이며 이 모든 마음을 담아 그곳에 태양신의 신전을 짓고 섬겼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델피(델포이)는 아폴론 신전의 신탁으로 명성을 날렸던 도시였다. 델포이의 지반에는 증기를 뿜어내는 구멍이 있어 여사제가 이 증기를 마시면 정신이 혼미해져서 두서없는 말을 지껄이곤 했는데 이를 다른 사제가 해석하여 신들이 내리는 예언이라 믿고 “델포이의 신탁”이라 하였다 하며, 인류의 스승 소크라테스도 델포이에서 “너 자신을 알라”는 신탁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델포이의 신탁은 유명세를 타면서 개인적인 문제 이외에 국가적인 재난이나 긴급상황에서도 이 곳을 찾았다고 하니 가히 그 명성이 어떠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그러나 신탁의 말들은 모두 모호하여 사제의 해석에 따라 의미가 부여되니 어쩌면 들려주고 싶은 말로 해석하고 듣고 싶은 말로 들었을지도 모른다.
사람의 마음은 본디 심약한 것이어서 결정이나 판단을 어딘가에 의존하고 싶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한 가지인 듯하다. 그렇기에 우주에 정거장을 만들고 AI가 사람보다 바둑을 잘 두는 21세기에도 사람들은 매일 오늘의 운세를 들여다보고 길거리에는 각종 점집들이 성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신탁은 BC 6세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신탁은 21세기에도 있다. 민주주의의 갑옷을 입고 이성의 칼을 차고 현대의 사제들은 합리적이고 공정한 신탁을 들려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지금도 사제들은 델피의 아폴론 신전에서 뿜어져 나오는 증기를 마신 듯 혼미한 정신으로 그들이 들려주고 싶은 말만 지껄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21세기가 BC 6세기와 다른 것은 그들이 들려주고픈 지껄임을 멈추게 하고 위대한 태양신의 이름으로 거짓을 지껄이는 자를 아폴론 신전에서 영원히 추방할 수 있는 시민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