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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속 첫 만남의 순간들

#SCENE1...책

by 카오스 혜영

며칠 전 대학에 다니는 아들 녀석으로부터 학교 과제라며 개인 구술사 인터뷰를 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별다른 특징도 없고 대단할 건 더더군다나 없는 인생이기에 과제에 적합한 소재가 되지 못할 듯하여 고사하려 하였으나 그냥 가볍게 살아온 이야기를 해주면 된다는 아들의 성화에 마지못해 응하게 되었다.

인터뷰를 하려고 하니 변변치는 않으나 오십여 년 살아온 기억의 파편을 더듬어 삶의 시간을 복기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과정에서 내 삶의 곳곳에 숨어있던 각종 첫 만남의 대상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만남의 대상은 사람이기도 사물이기도 하며 때론 사건이기도 하고 찰나의 순간이기도 하다.

그중 첫 번째, 책과의 만남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 한다.


IMG_E4997.JPG 피렌체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에 비치된 오래된 서적

내가 기억하는 가장 어릴 적 나는 학교 가기 전 5살 무렵이다. 요즘처럼 유아 교육이 제도화되어있지 않은 시절이었기에 나는 늘 집에 있었고 항상 심심했었다. 아버지와 엄마는 일하시느라 바쁘셨고 나보다 6살 많은 오빠는 감히 나의 놀이 대상이 되기엔 어려운 존재였다. 게다가 잦은 잔병치례로 병약하기까지 했던 나는 동네에 나가 맘대로 뛰어놀지도 못하고 심심함을 견디며 지내야 했다. 7살 무렵 드디어 한글을 깨치게 되면서 온 동네 한글로 된 간판이란 간판은 죄다 주워 읽으며 활자와의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선물이라며 내게 주신 것이 그림책 “미운 오리 새끼”였다. 글자보다는 예쁜 그림이 더 인상적이고 쪽수도 몇 장 되지 않았으나 통째로 외워버릴 듯이 수백 번 읽고 또 읽었던 기억이 있다. 시간의 순서로 보면 이 미운 오리 새끼 그림책이 내 생애 최초의 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나 심정적으로 내가 인정하는 최초의 책은 따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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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1학년이었는지 2학년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미운 오리 새끼 그림책 때와 마찬가지로 어느 날 아버지가 내게 책 한 권을 건네주셨다. 이번에는 글자로만 된 200페이지 정도 되는 책이었다. 받자마자 책을 읽기 시작했고 완독 하기까지 채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는데 그 반나절이야 말로 내 인생 최초로 책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시간이었으며 책을 통해 신세계를 경험하는 황홀경을 느낀 순간이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그 순간을 가능하게 해 준 책은 어린이용 동화전집 중 한 권으로 “아라비안 나이트”였다. 이 책과의 만남 이후 나는 더 이상 심심하지 않았으며 책들이 한 권 두권 늘어가면서 경험하게 되는 매번 새로운 세상 속에서 행복한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하늘을 나는 양탄자를 타고 아라비아를 여행하는가 하면 소공자의 세드릭과 친구가 되기도 했다. 학교에서 선생님께 벌이라도 받게 되면 소공녀의 세라와 빨강머리 앤을 불러서 위로받기도 하고 물거품이 된 인어공주를 생각하며 눈물짓기를 여러 번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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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는 책을 살 때 전집이 아닌 낱권으로 구매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셨는데 이 때문에 한 권을 다 읽어야 또 다른 책을 살 수 있었으며 다 읽었다고 해도 바로 새책을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다음 책을 살 수 있을 때까지 수십 번 읽고 또 읽으며 애타게 새책을 기다려야만 했다. 공급을 줄이고 욕구를 최대화하여 한계효용을 극대화하려는 아버지 나름의 전략이었다면 그 전략은 멋지게 성공한 셈이다. 그 뒤로 나는 밥상머리에서도 책을 놓지 않는 독서광이 되었으니까.


만약에 내가 미운 오리 새끼와 아라비안 나이트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만나더라도 훨씬 더 나중에 만났더라면 내 삶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그 다른 방향의 결과에 관계없이 나는 나의 책들과의 첫 만남에 감사한다. 그들은 내게 친구이자 연인이고 세계와 우주를 보여주는 거울이었으며 생각을 일깨워주는 스승이었기 때문이다.

개인과 세계를 이어주는 매체가 점점 다양해짐에 따라 책에 대한 사람들의 충성도는 예전 같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같은 책이라고 하더라도 e-book, audio book 등 다양한 형태로 출간되고 있으니 종이책의 효용도 점점 떨어지고 있는 듯 보인다. 편리함으로 인해 나조차도 요즘엔 미용실이나 지하철에서는 휴대폰으로 e-book을 보고 있다. 그러나 “종이책은 가장 완벽한 매체”라고 하는 움베르토 에코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여전히 종이책은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얻을 수 있는 지혜의 보물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처음 만났던 그 설렘으로 여전히 나의 새로운 책들을 맞이한다. 비록 지금은 돋보기 없이 이들을 마주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으나 좀 불편하면 어떤가. 그래도 아직까지 함께 할 수 있어 좋고 돋보기로도 어찌할 수 없는 그날까지 함께하면 그만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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