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않았다.”*
봄이었고 내가 처음으로 문학을 배웠던 계절.
시인의 문장처럼 ‘스무세햇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이 말은 곧 나이기도 하고 나의 과거이기도 하다. 나머지 20%는 우연이었지만.
‘애비는 종이었다’라는 이 시의 파격적인 진술 또한 강렬한 울림과 동시에 공포를 일으켰다. 일탈의 세계란 무엇일까. 어떤 시인은 ‘구체성의 층위에 고착될수록 시의 언어는 죽음에 가까워진다‘**라고 했다. 인간의 시는 그렇다고 했다. 처음 ‘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끝없이 외로웠고 공허했고 내부의 혼란이 고착화돼서 스스로를 옭아매던 시절이었다.
“시인은 조금씩 죽음 또는 해탈에 접근한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시가 없다.”***
나의 지금은 시가 없는 길의 끝이다. 전처럼 두려움도 없고 분노도 없이 주어진 길을 걷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내일도 한동안은 물질적인 것을 손에 쥐고 삶에 대한 어떠한 꿈도 환상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너는 왜 내게로 왔을까. 일년이 다 지나가는 시점에 내 머릿속에서 시의 한 구절이 나타나서 나에게 묻는다. 삶은 무엇이게? 뱀은 왜 걷지를 못하고 말을 못 할까? 나는 앞으로도 나 사이에 있는 과거일까 아니면, 그 다음일까?
나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스스로의 이름도. 아름다웠던 당신도. ‘사랑’이라는 폭력 앞에 울었던 우리도. 모두가 그저 ‘삶’이라고 다그쳤다.
*서정주 시인, ‘자화상’
***이장욱, ‘영혼의 물질적인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