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뜨거웠던 한글 코드 논쟁
요즘 사람들은 한글날만 되면, 한글의 우수성을 칭찬하면서, 특히 컴퓨터나 스마트폰에서 한글 사용이 아주 쉽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 모든 게 세종대왕 덕분이라고 하면서, 마치 세종대왕이 미래의 컴퓨터를 예견해서, 컴퓨터에 사용하기 편하도록 만들었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입니다.
하지만, 컴퓨터에서 한글 사용이 처음부터 쉬웠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한글은 14개의 자음, 10개의 모음만으로 모든 글자를 타이핑할 수 있기에, 어떤 키보드에서도 타이핑이 쉽고, 심지어 숫자키 만으로도 타이핑이 가능합니다. 문제는, 한글이 여러 자음과 모음의 조합으로 하나의 글자가 완성이 되는 형태라서, 표현할 수 있는 글자 수가 엄청나게 많고, 또 조합이 되는 방식도 여러 가지라서, 다음에 타이핑되는 자모에 따라, 이미 컴퓨터 화면에 표현된 글자의 모양까지 변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요즘엔 이게 무슨 어려운 문제인가? 모든 컴퓨터와 스마트폰에서 자동으로 다 지원되는 거 아닌가 하겠지만, 몇십 년 전만 해도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았습니다. 특히 초창기 컴퓨터는 제한된 하드웨어로 인해, 표현할 수 있는 캐릭터 수가 제한이 되다 보니, 한글 사용은 아주 어려웠습니다.
제한된 하드웨어에서 한글을 표현하려다 보니, 한글 코드 방식부터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한글을 글자 단위로 저장하는 게 아니라, 자모 단위로 저장한 후 조합을 해서 표현하는 '조합형'이 80년대에는 인기가 많았습니다. 조합형은 8비트 컴퓨터라도 모든 한글을 표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코드가 자모 단위로 들어가다 보니 한 글자가 차지하는 비트(bit) 수가 많아지고, 글자에 따라 차지하는 비트의 수도 달랐습니다.
게다가 한글 코드와 표현되는 글자의 모양이 1:1 매칭이 되지 않다 보니, 따로 렌더링을 커지지 않으면 받침이 없는 글자, 받침이 있는 글자, 모음이 우측에 오는 글자, 모음이 아래에 오는 글자 등이 각기 다른 크기로 표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조합형 한글을 지원했던 MSX 컴퓨터의 경우 한글 모양이 이상했고, MSX2에서는 렌더링을 거친 스크린 모드에서 정상적인 한글 글자 모양을 지원했지만, 소위 그래픽모드에서만 작동되어서 불편했습니다. 이러한 여러 단점에도 제한된 코드로 모든 한글을 표현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조합형 코드는 많은 지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80년대 말에 정부에서 '완성형 코드'를 표준으로 제시하면서, 한글 코드 논쟁은 본격화되었습니다. 완성형은 완성된 글자 하나마다 코드가 부여되는 방식으로, 글자 모양과 코드가 1:1 매칭된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한글은 조합해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글자의 수가 엄청 많기에, 조합형보다 훨씬 많은 코드가 필요했습니다. 당시에는 표현 가능한 모든 글자를 완성형 코드에 넣을 수 없어서, 주로 실생활에 쓰이는 글자만 넣다 보니, 아예 컴퓨터로 쓸 수 없는 한글 글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예로 90년대 인기 드라마인 '똠방각하'의 제목을 컴퓨터로 쓸 수 없는 해프닝이 벌어져서, 많은 사람들이 완성형을 표준으로 선택한 정부를 비난했습니다.
이로 인해 90년대 초반에 PC통신 등 컴퓨터 사용자들이 모이는 곳마다 한글 코드 표준화는 엄청난 논쟁거리였습니다. 그냥 있다가는 컴퓨터로 표현되는 한글이 제한되어서, 우리말 자체가 이상하게 바뀌는 게 아니냐 하는 우려까지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조합 방식으로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 때문에 우리나라만 정보화 시대에 뒤처질 수 있다는 이야기까지 나왔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쓰면서 세종대왕 덕분에 쉽게 사용한다고 하는 걸 보면, 정말 격세지감입니다.
이로 인해 기존의 단점들이 개선된 새로운 코드 방식들이 나왔지만, 어떤 것을 표준으로 해야 하느냐는 더욱 큰 문제였습니다. 이렇게 한글 코드 방식이 난무하다 보니, 특정 한글 카드를 써야 한글이 제대로 표현되기도 했고, 한 컴퓨터에서 표현된 한글이 다른 컴퓨터에서는 이상하게 표현이 되는 호환성 문제도 컸습니다.
표준은 한번 정하면 바꾸기가 힘들기에, 이러한 한글 코드 문제는 단지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 표준의 문제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었습니다. 한편 이런 코드 논쟁은 우리나라만이 아니어서, 1991년에는 전 세계의 문자를 통일된 코드로 만들자는 '유니코드 컨소시엄'이 결성되었습니다.
그런데, 전 세계 문자는 엄청나게 많고, 특히 중국의 한자는 수만 개나 되고 사용하는 인구수도 많습니다. 유니코드의 목표는 전 세계 모든 문자들을 표준 코드에 넣자는 것이었지만, 코드 수가 제한이 되다 보니 어떤 문자를 먼저 넣을 것인가는 큰 논란이었습니다. 유니코드에 들어가도 앞쪽 코드, 즉 빠른 버전에 들어가야 더욱 범용으로 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제한된 유니코드에 많은 나라들이 자기네들의 문자들을 먼저 넣으려고 하다 보니, 유니코드를 정하는 데는 기술적인 요소뿐 아니라 문화적, 정치적으로도 여러 요소들이 작용했습니다.
이때 한글을 사랑하고 한글 표준 코드의 중요성을 느낀 분들이, 유니코드에 한글 코드를 더 많이 더 먼저 확보하기 위해 열심히 고군분투하셨습니다. 전 세계 표준이 유니코드가 된다면, 표준 방식의 한글을 만들어 표현 가능한 한글을 모두 유니코드에 넣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한글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수는 남북한 인구 정도가 전부이고, 여기에 완성형 한글코드를 넣으려면 조합 가능한 모든 한글이 들어가야 하니, 만개가 넘는 코드가 필요했습니다. 또 조합형 한글 코드는 유니코드 자체의 성격과 달라 넣기가 어려웠습니다.
결국, 확장 완성형이라는 표준 코드가 만들어지고, 여기에는 현대 한글로 표현할 수 있는 11,172개의 글자를 모두 담았습니다. 그리고 이 표준 코드를 1996년에 유니코드 2.0에 전부 넣는데 성공을 했습니다.
유니코드 2.0에는 총 38,885개의 코드가 있었는데 우리나라 한글이 전체의 30%에 가까운 코드를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엔 우리나라가 선진국도 아니었고, 경제규모나 인지도에서도 지금보다 훨씬 떨어지는 상황인 데다 한글 사용자 수도 다른 나라 문자에 비해 현저히 적었지만, 세계 모든 사람들이 표준으로 쓰는 코드의 30%를 한글로 메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게 한글을 사랑하고 제대로 된 모든 한글을 전 세계 컴퓨터에서 표현 가능하도록 하겠다는 신념으로 많은 분들이 헌신하고 노력했던 결과였습니다.
유니코드의 등장과 표현 가능한 모든 한글 글자가 유니코드에 들어가자 한글 코드 논쟁은 사라졌고, 이후부터 표준 유니코드를 쓰는 모든 컴퓨터와 전자기기에서 한글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프로그램들이 공통된 코드를 쓰니 검색이나 호환도 문제가 없어졌습니다. 게다가 모든 한글이 표현 가능해졌기에, 이상한 신조어를 만들어 표현하는 것도 가능해졌고, 초성 드립이나 생소한 외국어까지 한글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 2009년에는 지금은 안 쓰는 옛 한글까지 유니코드 확장버전에 넣게 되어서, 이제는 훈민정음 원본이나 조선시대에 쓰인 한글까지 모두 표준 코드로 표현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지금은 스마트폰에서도 아무도 한글 사용에 불편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치 한글이 IT기기에 최적화된 훌륭한 문자라는 생각만 합니다. 하지만, 90년대에 한글 코드 표준화에 힘쓰고 유니코드에 표현가능한 모든 한글을 다 넣기 위해 노력했던 분들의 열정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반쪽자리 한글을 쓰면서 불편해했을지도 모릅니다.
매년 한글날만 되면 세종대왕을 칭송하지만, 한글 코드 표준을 위해 노력했던 많은 분들도 함께 기억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