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무게를 이해하는 성숙함
명절은 부산하다. 사람들이 모이고 떠들썩 한바탕 소동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명절에 맞춰 나에게도 하나의 소동이 일어나, 마음의 부동심이 깨어졌다. 그래서인지 나는 명절 내내 속이 쓰렸다.
나는 내 불행을 일일이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아직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불행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은 나에게 상처로 남아있기에 그러한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타의로 내 불행이 내가 원치 않은 상대에게 전했졌을 때의 난간함... 그런 걸 겪었다. 브런치에는 이렇게 까발리면서 왜 아는 친척에게는 안되냐고 하면 나도 할 말이 없다. 브런치는 나에게 일종의 대나무숲이다. 내가 유일하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칠 수 있는 통로이다. 순간 원치 않은 발가벗음을 당하고 나니 마음이 심란했다. 별일 아니라는 것도,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다 알게 될 일 일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은 내가 원치 않았다.
내 고통의 무게가 타인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간혹 타인의 고통을 위안 삼는 사람도 있고, 내 불행을 가십거리로 삼는 것도 견디기 힘든 수치심이다. 하지만 어쩌리 이미 벌어진 것을 내가 주어 담을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이번 일을 계기로 다시 한번 내 안으로 들어가 나 자신을 살펴본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말의 무게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내가 내뱉는 말의 무게에 대해 생각해 보고, 상대에 대해서도 한번 더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 그게 필요한 거다. 타인의 불행을 안주거리나 대화주제가 생각나지 않았을 때 그냥 소재거리로 소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성숙함. 내가 유별나다고 해도 별 수 없다. 나는 그런 어른이 되겠다는 다짐이니 말이다.
그리고 이미 벌어진 이 상황에 대해서 더욱더 의연하고 당당하게 지내리라 결심했다. 시간은 흘러가고 사람들은 어차피 나에 대해 관심이 없으므로 작은 가십으로 흘러갈 뿐이다. 결국엔 남아 있는 것이 내 것이다. 그러니 궁즉독선기신하자.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과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데일리 필라소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