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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라는 이름의 무심함 앞에서

우리 모두 소중합니다.

by 따뜻한 불꽃 소예

오늘, 함께 일하던 직원이 계약만료로 회사를 떠난다는 소식을 들었다. 순간, 마음이 쓰렸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이별을 종종 마주하게 된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더 쓸쓸했다. 고용형태라는 이름으로 나뉘는 구분들. 그것은 때때로 '분별'과 '차별'의 이름으로 작동한다. 누군가는 말했다. "제도는 합리적이야." 맞다, 어쩌면 문제는 제도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제도 속에 들어가 있는 인간들의 '행태'일지도 모르겠다.


그 직원은 들었다고 한다. "재계약될 수도 있다."는 말. 그리고 다시, "재계약하고 싶다고 하면, 내가 한번 노력해 볼께."라는 희망고문. 고용의 종료를 앞두고, 인격적 마무리는커녕, 차가운 책임 회피만 남아 있다.


고용은 결국, 회사의 필요와 개인의 필요가 맞닿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그 끝은 서로의 정도(正道)를 지켜야 하지 않을까.

'너 필요 없어.'

이런 식으로 마무리되는 관계는 남겨진 사람에게 큰 상처를 남긴다.


회사는 인격체가 아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 바로 그들의 회사의 인격(Personality)이 된다. 그래서일까. 회사를 떠나며 받은 마지막 말 한마디가 그 회사에 대한 평판이 된다. 결국, 이 평판은 그 회사의 꼬리표가 되고, 어느날 좋은 인재를 잃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AI가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해가고 있는 지금, 회사는 점점 더 '효율'을 좇는다. 하지만, 효율만 남는 조직엔 사람이 남지 않는다. 감정 없는 의사결정이 조직의 미래를 더 황량하게 만들 뿐이다.


대단한 사업가로 불리는 일론 머스크가 가끔 그런 인물로 비춰진다. 해고를 하나의 퍼포먼스처럼 하는 그를 보며, 나는 생각한다. 사람을 그렇게 다룬다면, 언젠가 뿌린 대로 거두게 될 것이라고. 돈과 권력은 사람을 잠깐 조종할 수는 있어도, 끝내 신뢰는 사지 못한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한다. 오늘의 '갑'이 내일의 '을'이 되기도 한다. 언제까지나 회사가 우위에 설 수는 없다. 인구 소멸의 시대, 언젠가는 '제발 와서 일해 주세요." 그런 시대도 올 것이다. 그래서 더 생각하게 된다. 이 세상에 무시당해도 되는 존재는 없다. 누구도, 그 어떤 일도, 심지어 길가의 돌멩이일지라도. 우리는 서로 존중받아야 할 존재다. 회사든, 사회든, 인간다움을 잃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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