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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네 마음이 오래가길

공포를 대하는 암환우 가족의 자세

by 따뜻한 불꽃 소예

12월이면 또 검진이다.

그래서인지 지난 몇 주간 남편의 심기가 또 불편해졌다. 아이와 개에게 괜한 짜증과 신경질을 부리고 있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 그래 검진일이 다가왔구나. 얼마 전에는 남편이 '내가 헛된 꿈을 꾸는 것일까?'라는 참 기운이 빠지는 헛소리를 했다. 남편은 지난번 검진 이후에 나름 자기 페이스대로 잘 지내는듯하더니 겨울 동장군이 성큼 다가오자 옴짝달싹 집안에 있더니 그런 맥없는 소리를 해대는 것이다. 이번엔 나는 그의 무드에 완전히 동조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아 때가 왔구나 하고 이내 그냥 돌아섰다. 그리고 며칠 뒤, 당신 참 잘하고 있어라고 응원을 해줬다. 그리고 오늘은 날씨가 좋아서인지 등산을 하곤 돌아오는 길에 나에게 전화를 했다. 그러더니, '검진에 어떤 결과가 나오든 간에 살아있으면 되는 거 아냐? 그렇지?! 요즘 통증 때문에 괜히 더 걱정하고 무서웠어. 그리고 더 큰 공포에 짓눌린 거 같아. 그러면 안 되는 거 같은데, 난 내 길을 갈 거야' 하고 다시 힘을 낸다. 그래 이번에 너의 그런 자세 오래가길 빌께.


암환우 가족이 가져야 할 태도는 무엇일까?

이런 고민을 참 많이 했었다. 그러다, 지난해 읽었던 어느 외과의사 선생님의 에세이가 생각이 났다. 그분은 자기가 암으로 인해 몇 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에세이를 썼다고 한다. 그 선생님께는 누님이 계시는데, 어느 날 또 암이 재발해서 수술을 하고 집에서 요양을 하고 있을 때, 그분의 누님이 매주 복숭아를 사들고 집으로 와선' 괜찮니' 안부인사를 하곤 많은 말은 하지 않으신 채, 그냥 바라보고 가신다고 했다. 그리고 누님의 그런 배려있는 위로에 많은 용기를 얻으셨다고 했다. 아 이거구나. 아마도 암이라는 큰 불행이 닥쳤을 때, 모든 주변 가족들 특히, 배우자나 부모, 자식들은 멘붕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암환우가 가장 힘들다는 점이다. 따라서, 가족이 너무 슬퍼하거나 힘들어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암환우에게 보여줘서는 안 된다. 도움이 필요할 때 그들 옆에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인지시키고 동시에, 약간은 무심한 듯 그 환우의 감정과 분리되어 환자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려 줘야 한다. 그래야만 진짜 그들이 내 도움이 필요할 때 나에게 의지할 수 있기에, 같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태도를 취해선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맨 처음에는 너무 슬프고, 지금도 슬프지만 이제는 남편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의 무드가 저점을 향해 달려갈 때는 '아 이 아이가 또 그 사이클에 진입하는구나' 하고 잠시 거리를 둔다. 그리곤 무심히, '당신 너무 잘하고 있어'라고 말해주곤 그냥 기다린다. 좀 있다 보면, 그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온다. 그때 그냥, 당신 정말 잘하고 있어라고 격려를 해준다. 그의 감정상태 하나하나에 반응하기보다는 조금은 무심한 듯, 그렇다고 너무 무관심하지도 말고, 적당히 그리고 미묘한 밀땅을 하고 있는 듯하다. 연애 때도 하지 않은 밀땅을 결혼 10년 차에 하고 있다니.... 내가 이렇게 섬세해지는 날도 오는구나, 그리고 내 감정이 아닌 타인의 감정을 먼저 생각해 보는 날도 있구나. 그렇게 생각할 따름이다.


그리고 무엇이 되었건, 이번 단계에서 내가 가져야 할 자세는 바로 절대 공포에 잠식되지 않는 것이다!!!

그 어떤 불행이라고 불릴 수 있는 사건들이 우리 앞에 온다 하더라도 내가 많이 봐온 히어로물에서처럼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한 채, 굳세게 이 상황을 헤쳐나가리라. 아무리 살아도 모르는 게 인생이라고 한다. 정답은 없겠지만, 그래도 공포에 질리거나 두려움에 떨지는 않으리라. 지금 우린 분명 그렇게 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그냥 하루하루를 당당하게 그리고 온전히 살다 보면, 순간순간 일상 너머로 아름다움과 영광이 모래알처럼 반짝거리게 보이는 그런 날이 오리라*' 나는 믿는다.


* 파친코 2권 378쪽 인용

할머니가 된 지금 이 순간에도 일상 너머로 아름다움과 영광이 반짝거리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 사실을 아무도 모른다 해도 그것이 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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